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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수도상/- 설산을 가슴에 품고 봄을 맞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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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김현정 2000년 05월 219호
『천상 세계가 비록 즐거운 곳이기는 하지만 복이 다하면 윤회하니 끝내 괴로운 세계일 뿐인데, 어찌 갖가지 괴로움의 원인을 닦아 괴로움의 과보를 구하려는가.』 누구나 영광의 순간만을 기억하려 하지만, 보살은 그 곳에 당도하기까지의 길목 길목과 길 위의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를 기억한다. 보살은 저 산 꼭대기에 오르고자 밤을 낮으로 삼아 알지 못하는 길이나 혹은 아는 길이나, 이 쪽으로 가면 옳은 길인가 또는 저 길로 가면 그 산에 당도하려나 노심초사했던 그 마음과 한 가지로 또한 그 길을 버린다.
태자(싯달타)는 그 산의 정상으로 가고자 멀찍이 보이던 설산雪山을 곧 자신의 이마 위로 했거니와, 그 강을 건너고자 네란자라 강물을 어깨에 걸고 배를 띄웠다. 그 높은 설산을 앞에 둔 태자는 앞길을 어떻게 가늠했을 것이며, 험한 강물을 격隔한 그가 그 길을 어찌 알았었겠는가.

어두운 세계의 중생이 그러하듯이 보리의 마음을 발한 싯달타도 반짝이는 눈빛으로 불빛을 찾고 또한 이정표를 얻고자 했으니 이때 그가 찾고자 한 것은 앞서간 이의 발자국이었다.
스승을 구하고 그 스승께 진리를 얻고자 하기를 그 몸이 부서지도록까지 간절했으리라. 천 길의 낭떠러지 앞에 더는 나아갈 곳이 없었던 것이 그의 행보였으나 그 천 길의 낭떠러지로 한 발을 내딛은 것이 또한 그의 발걸음이었다. 허공을 스치는 바람결이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처럼 태자가 가고자한 길도 아무런 흔적도 없는 전인미답지지前人未踏之地였으니 외도外道의 스승인들 갈 곳을 알았겠으며, 무심한 강물인들 그것을 어찌 알아 일러주었을까.

산에 오르다 보면 크고 작은 봉우리가 있거니와 그 경계 경계마다 산을 오르는 이는 새로운 용기와 기쁨을 찾는다. 길을 떠난 싯달타가 당도한 여섯 봉우리(육사외도六邪外道의 스승)는 올곧은 정상이 따로 있다는 것을 알려준 이정표와 같다. 마치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는 이치와도 같이, 앞이 막힌 옳지 않는 길이 있으니 정상으로 향하는 바른 길이 있다는 것을 그의 밝은 눈이 찾아 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석가여래의 보리수 아래 깨달음으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첫번째 보배로운 사건이다.

땅에 넘어진 이가 땅을 탓하고 그 땅을 해害하려 한들 그가 딛을 공간 마저 잃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괴로움의 원인을 닦고자 괴로움의 과보를 얻을 것인가. 땅에 넘어졌으니 땅 위의 돌부리나 혹은 자신의 허약함을 탓하고 고칠 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어리석어 그 땅을 탓하고, 자신이 설 곳을 잃는다. 이는 마치 눈앞에 괴로움을 뛰어 넘고자 더욱 가혹한 괴로움으로 그것을 잊기를 바라고 있는 것과 같으니 고통으로써 고통을 잊고자 하는 것은 두 가지 고통을 함께 얻는 일이다. 싯달타는 네란자라 강가에서 우유죽으로 몸을 보살피고 이제까지의 몸을 부수는 고행苦行을 버렸다. 고통을 여의는 것은 당당히 그를 뛰어 넘는 것이므로 그 고통에 눈을 감고 잠시 잊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고통에 집착하면 몸이 병을 얻으며, 그 몸에 집착하면 곧 공부에 병을 얻는다. 그러므로 보살이 걸어야 할 길은 극단이 아닌 중도中道이다. 이것은 위 없는 깨달음으로 향한 길목에서 만난 두번째의 보배로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눈 밝은 이는 강의 건너편에 다다르면 곧 그 배를 놓을 수 있는 용기와 지혜가 있다. 보리수 아래 석가가 이룬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행운이나 구원 같은 것이 아니다. 석가모니가 모든 중생에게 옳은 길을 알려줄 인연이 크게 보면 그의 오백 전생을 통틀어 비롯된 것일지나 수행길에 선 수행자로서의 안목으로 보자면 그의 여러 생과 오랜 시간의 선업과 수행의 고통, 진리에 대한 그리움으로 만들어진 결실이다. 그러므로 부처의 눈으로는 자신이 걸어온 모든 발자국의 공덕을 어느 하나 잊을 리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