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선을 하다가 깜박하여 출근시간이 늦었다.
한 시간이 걸리는 출근길이 더 멀게 느껴진다. 회사에 도착하여 주 정례회의를 하였다. 회사의 지난달 영업·생산실적을 검토하였는데, 계획에 대비하여 조금 미달이었다.
생산부서의 핵심기술 인력이 안정되지 않는다. 영업수주도 의도하였던 바이어를 유치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매출의 진도는 계획보다 늦다. 매월 월급을 주는 것은 어기지 않고 있으나, 자금의 비축계획은 차질이 난다. 신념이 있고 열의가 있으며 실력이 있는 사람으로 팀이 짜지고 합심 노력하면 잘 풀려 나갈 수 있는 구조인데 아직은 실력이 모자란다.
시간이 더 필요한데 일에는 타이밍이 있다.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 고통과 즐거움을 느끼는 일상생활을 하면서, 문득 오늘 활짝 핀 벚꽃을 보고 환함을 느낀다.
문제가 많다. 문제가 없는 사람은 없다. 일상의 문제에 끌려가기도 하고 적극적으로 원을 세워 실천하면서 살기도 한다. 이런 일상의 문제 속에 살면서 인간의 궁극적인 문제를 생각한다. 우리의 존재란 무엇인가. 왜 사는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운명적인가. 자유의지인가 등 인간에게만 궁극적인 문제가 있는가.
궁극적인 문제에 접근하면 기독교같이 신을 신앙하고 순종하면 되는 것이 편하지 않을까.
그러나 과학의 발달에 따라 천지창조와 부활같은 기독교의 교리가 더 이상 인간이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었다. 니체에 의해 신이 죽고, 헤겔에 의해 예술이 죽고, 하이데거에 의해 철학이 죽고, 비트겐슈타인에 의해 주체가 죽었다. 후쿠야마에 의해 역사가 죽고, 휴머니즘도 인간 이기주의라 하여 사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서구문명은 기독교라는 기반이 더 이상 종교로서 사회를 지탱해 주지 못함으로써, 무한한 자유주의가 인본주의로 타율에서 자율로 신앙에서 이성으로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사상 등 문화전반에 중심을 잃고 가치관의 혼돈이 증가하고 있다. 궁극적 문제에 대한 가치관의 혼돈은 인간을 방종과 향락과 무질서로 내몰아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연 인간은 그 이성과 자유의지에 의해 조화로운 생존을 지속할 수 있을까.
동양의 종교나 사상 그 중에서도 불교는 이러한 서구문명의 문제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일까. 현대과학의 발전과 시각에 따른 모든 자연현상에 대한 상대성의 인식과 절대좌표계의 포기는 인간사고의 혁신적 진전이며 고정불변의 실체를 부정하고 무한한 상대성 그 자체를 실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교의 연기론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고 있어 불교는 현대과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와 같은 종교적 기초를 부인당하지 않고 가장 과학적이란 말을 듣는다. 아인슈타인이 우주적 종교성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있는 종교를 불교라고 설파한 것에서 삼천 년 시공의 차이를 넘어선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의 위대성을 알 수 있다.
오월은 부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초파일이 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라고 하신 말씀을 다시 한 번 생각하면서 지혜와 자비의 실천을 위해 순수하고 유연하게 그리고 강인하게 수행하는 삶을 다짐한다. 나는 마음이 출렁일 때 티벳 고승의 아래와 같은 가르침을 몇 번 소리내어 읽곤한다. 스승들은 우리의 앞에 사람이 다 볼 수 있는 세계와, 깨달은 이를 뺀 모든 사람이 보지 못하는 또 다른 세계의 두 개의 세계가 있다고 가르쳤다. 모두가 볼 수 있는 세계는 아주 견고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고 우리가 볼 수 없는 세계는 전혀 현실성이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매일 보는 세계보다 더 견고하고 현실적이다. 눈에 보이는 세계의 명백함과 견고함은 덧없는 것이며 지속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인간의 모든 일은 매 순간마다 끝난다.
그 속에 실체가 없다. 매 순간이 끝날 때마다 우리는 다시 새로운 순간 속에 있으며, 이 순간순간의 종말과 창조를 사람들은 삶이라고 부른다. 한 순간에 일어난 모든 일들은, 한 순간에 끝난다. 그 이유를 누가 알까. 그것은 그냥 그럴 뿐이란다. 인간은 과거와 미래가 있고 지속되는 일과 중요한 일이 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기만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지속되는 것은 없고 정말 중요한 것도 없다. 감각을 통해서 그리고 마음의 인지작용을 통해서 삶을 경험할 때, 지속되는 것이 있는 것처럼 보일뿐이다. 이것이 공의 의미이다. 내적중재에서 불순한 것을 모두 없앴다. 지혜가 있으면 우리들의 걱정거리가 비현실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은 모두 앎의 빛의 진동하는 입자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본질의 한 측면, 죽음이란 삶, 삶이 곧 죽음, 완전하고 영원한 빛으로 잠시 돌아가 있다가 다시 태어난다. 눈앞에 보이는 이 세계는 매 순간 태어나고 죽는다. 태어날 때 보이지 않는 세계에서 다시 나왔다가 죽으면 다시 돌아간다.
유마거사는 출중한 지혜와 수행으로 깨달은 이인데 유마거사는 걱정이 없었을까.
아니다. 중생의 아픔을 같이하고 있으니까. 부처가 즉 중생이요. 중생이 곧 부처이니 보살마하살은 관일체법공觀一切法空이요 불사일체중생不捨一切衆生을 실천하며 사는 자라고 하겠다. 원이 보살마하살의 목표이며 원동력이며, 보살마하살은 당연히 쌓은 바 일체공덕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회향하여야 할 것이다.
삼법장반야경에 “만약 깨달음을 구하고자 하거든 반야바라밀다에 대해 신해심을 일으켜 스스로 받아지니고, 읽고 외우며 다른 사람을 위해 자세하게 설하여 전함으로써 널리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큰 이익을 얻게 하라.”고 수행과 포교가 연기적 관계에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삶은 곧 수행의 과정이요. 수행은 곧 포교를 동반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수행이 따르지 않는 포교는 허황하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참선수행을 하기가 만만치 않다. 그래도 오랜기간 명상, 기공수련과 함께 참선을 하면서 근래에는 백만배정진을 하면서 참회기도를 한다.
삶에서 성실히 그리고 지혜와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곧 수행이요. 포교이다.
웅웅거리는 기계소리 속에 직원들이 바삐 움직인다. 창 밖에는 환하게 벚꽃이 피어 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