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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 스님 콧등에 박혔던 펜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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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혜광 2000년 04월 21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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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에 부스럼이 심해 문둥이는 저리 가라 할 만큼 흉칙한 어린 행자를 노스님은 당신의 자식인 양 곁에 데리고 잤다. 그리고 배를 타고 시내에 나가 주사약을 사와 놓아 주시고 상처를 정성스레 치료해 주시며 그랬다.
“괜찮다, 업장 녹느라고 그러는 게야.”
영웅이란 무릇 싸움 잘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초등학교 시절, 내 이 조그만 몸보다 훨씬 덩지 큰 아이들을 단숨에 때려눕히는 것은 다반사요, 어른도 부당하다고 생각되면 달려들기 일쑤였던 나는 싸움대장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누구한테든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었다. 그러던 참에 부모님이 어디선가 ‘단명할 팔자니 절에 팔라’는 말을 듣게 되었고, 열셋 어린 나이에 선뜻 집을 나서 들어간 곳이 봉은사였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어머니께서 절엘 다녔다고 하나 내게 절집과의 인연이라고는 탁발승을 본 것이 전부였는데도 절에 들어오자마자 싸움질 잘하던 괄괄한 성질이 금세 삭으며 마음이 순화되는 것이었다.
천구백오십년대 중반의 봉은사는 운치 있고 정감이 가는 고찰이었다.
지금이야 서울 시내 한복판이 되어 버렸으나 그 당시만 해도 뚝섬에서 배를 타고 가야 할 만큼 세상과 떨어져 있었고 노스님들이 주로 주석하며 수행하던 조용한 곳이었다.
그 때 내가 맞닥뜨렸던 크고 작은 시비가 난무하는 떠들썩한 세상에 비할 수 없는 그 ‘고요’를 무엇으로 드러낼 수 있을까. 그것은 차 소리, 사람 소리 없는 밖에서 오는 고요가 아니었다. 철저한 수행 속에서 수행자들이 뿜어냈던 ‘적정寂靜’의 기운이었을 것이다.
어줍잖은 영웅 기질로 사람 때려눕히기를 좋아하던 내가 꾀부리는 법 없이 일 잘하고 염불하고 기도하며 스님을 지극 정성으로 받들었음인지 그렇게 머리가 헐며 업장이 녹은 모양이다. 아니다. 그것은 아마
평생 수행에만 전념해 온 노스님들에게서 나왔던 수행의 힘과 자비 덕분이었을 것이다. 진물이 줄줄 흐르고 피고름이 나오던 내 머리를 피붙이처럼 어루만져 주시던 노스님의 손길에서 오랜 세월 켜켜이 쌓였던 내 업이 녹아내렸을 것이다. ‘말 없는 가운데 도만 깊어 간다’고 하지 않았던가.
도라는 것은 스스로가 드날리거나 떠벌린다고 되는 것이 아닌 법, 수행으로 무르익은 사람은 아무리 스스로를 낮춰도 은연중 언행 속에 드러나는 것이다. 열세살 어린 행자이던 그 때 나는 그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아무튼 나는 절에 들어와 반 년도 안 되어 ‘꾀부리지 않고 일 잘하고 신심 있는 행자’로 개과천선하였다.
습이란 금방 떼어내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하여 때로 밖의 세상이 그리웠을 법도 한데 추운 겨울 새벽
명부전 앞의 샘물을 길어다 밥짓는 일이 금방 몸에 배었고, 새벽예불이 끝난 뒤 추워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염불 연습하는 것이 신기하게도 좋기만 하였다. 전기가 없던 시절, 깊은 새벽 밥솥 아궁이 속 불빛에 드러났던 구절들, ‘정구업진언 수리수리마하수리 수수리 수수리 사바하걖걖걖’ 천수경을 그렇게 외웠고, 부뚜막을 목탁 삼아 두드리며 하던 염불은 부뚜막 끝이 떨어져나가며 어린 행자의 가슴에 신심으로 단단히 박혔다.
요즘 공양간을 둘러보면 음식을 가볍게 다루는 것이 눈에 띄어 마음이 언짢을 때가 더러 있는데, 예전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경제가 어려운 시절이어서 음식을 소중히 하고 아꼈던 것만은 아니다.
쌀 한 톨 함부로 하는 죄가 그만큼 지중한 법이다. 공양주하는 행자에게 하시던 노스님들의 말씀은 한결같았다.
“박복한 사람 복짓는 데는 공양주가 제일이다.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 드리면서 공양주 노릇 잘하면 이 다음에 의식주가 풍족하고 앞길이 열려 큰복을 받을 것이요, 잘못하면 업 되어 빈천하게 된다.”
‘인간의 복은 제석보살이 주시는데, 진심을 내고 음식을 함부로 버리면 음식이 수채에서 썩을 동안 제석보살이 합장하고 서 계시다’는 어느 노스님이 들려준 말씀은 어린 행자의 마음 속에 고스란히 새겨져, 부뚜막에 떨어진 밥풀 한 알도 주워먹게 했고, 혹여라도 설거지 끝에 나오는 콩나물 대가리 하나도 낱낱이 씻어 먹었다. 음식물을 소중히 다루고 아껴야 하는 것이 어디 공양주뿐이겠으며 절집안에 국한된 일이겠는가. 아무리 예전에 견주어 물자가 흔해졌다고 하나 세속에선 음식물 쓰레기로 몸살을 앓는다고 하니, 밥찌꺼기 하나가 썩어 없어질 때까지 하염없이 합장하고 서 계실 제석보살님을 모두 명심했으면 싶다. 음식 함부로 하는 일이 바로 제 복을 감하는 것과 직결되는 것임을 모두 명심하고 살면 좋겠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절도 있게 일 잘하고 스님들 시봉 잘하며 신심이 익어가던 어느 날, 행자 시절 중 가장 잊지 못할 사건이 일어났으니 그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그 날도 아침 공양을 준비하기 전에 잠깐
펜글씨 교습본에 천자문을 썼는데 그만 잠이 소르르 오는 것이었다.
머리를 잠깐 책상 위에 두었는가 싶었는데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누군가 ‘아이구구’ 놀라는 소리에 퍼뜩 잠을 깨 보니, 세상에 주지 스님 콧등 위에 펜촉이 박혀 있는 것이 아닌가. 방금 내가 쓰던 펜이 앉은뱅이 책상 위에서 또르르 굴러가 그만 주지 스님 콧등 위에 빳빳이 꽂힌 것이었다. 지금이야 행자실이 따로 있으나, 그 때에는 대중 스님 모두가 한방을 썼으니 사단이 난 것이었다. 주지 스님 놀라는 소리에 여나믄 다른 스님이일어나 앉은 가운데, 등골에 식은 땀을 흘리며 나는 주지 스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었으니, 새벽에 무슨 날벼락이었겠는가.
‘큰 불사하려는데 마장 일으킨다’며 잠깐 나무람을 받고는 말았으나, 참으로 송구하고 기막힌 노릇이었다.
그 뒤 콧등에 박힌 펜자국은 문신이 되어 버려 약물을 사다가 뺄 만큼 깊이 꽂혔으니, 콧등이었으니 망정이지 눈이라도 다치셨으면 어쨌겠는가. 행자 시절 세 해 가운데 가장 모골이 송연했던 사건이었다.
그 때의 주지 스님은 그 뒤 나의 은사 스님이 되셨으니, 지금도 스님을 뵐 때면 왠지 슬그머니 눈길이 콧등으로 가곤 한다.
추운 겨울 강바람을 맞으며 절집에 들어왔는데, 이제 절 마당에 봄기운이 완연하다. 바로 겨울에서 봄으로 온 듯 한순간이었던 것 같은데 사문이 된 지 어언 수십 년이 지났다. 이제 곧 인연 따라 잠시 맡았던 주지직을 놓게 된다. 무거운 짐을 부려놓은 것 같아 이렇듯 홀가분할 수가 없다. 내 이제, 저 순수했던 행자 때의 초발심 시절로 돌아가리라. 볕 잘 드는 곳에 황토 벽돌로 벽을 쌓아 움막 하나 지어 놓고 내 사는 방식으로 자연인 그대로 살 것이다. 그리고 조용히, 행자 시절 그 이후 늘 한결같은 마음으로 꾸준하게 수행해 왔는지 점검해 볼 것이다. 수행 게으르게 하여 얻은 바 없으면 사문으로서 당당할 수 없는 법, 그리하여 오늘 나는 사문으로서 얼마나 당당한지 되물어 보고 그리고 끊임없이 정진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