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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뭣고(是甚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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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하고 청정한 수행을 위한 법문 - 법전 1999년 02월 204호
미죽번상美竹緊露에 상투청相關淸하고
장강원랑長江遠浪이 감풍성據風聲이로다
오경기간중정월五更起看中庭月하니
상유규창일척명尙有窺窓一尺明이로다
아름다운 대나무 짙은 서리 서로 맑음을 시샘하고
긴 강 먼 물결이 바람소리 흔든다
오경五更에 일어나서 뜰 안의 달을 보니
아직도 창을 엿보는 한 자의 광명이 있도다.

설봉의존 스님이 암자에 머무를 때 두 납자가 절을 하고자 오거늘 선사가 이를 멀리서 보고는 암자의 문을 열고 나가서는 큰소리로 한마디 내던졌습니다.
“시삼사是甚麽? 이뭣고?”
그러자 어리둥절한 그 납자들도 이에 되물었습니다.
“시삼사是甚麽? 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설봉스님은 고개를 푹 숙이고 뒤도 안 돌아보고 암자로 되돌아와 버렸습니다.두 납자는 할 수 없이 다시 길을 떠나 암두스님의 처소에 이르렀습니다. 암두스님이 물었습니다.
“어디에서 오는가?”
“영남지방에서 왔습니다.”
“설봉스님한테는 갔다 왔느냐?”
“갔다 왔습니다.”
두 납자는 그 동안의 일을 사실대로 이야기하였습니다. 암두스님이 물었습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더냐?”
“설봉스님은 아무런 말씀도 없이 고개를 숙이고 암자로 돌아가 버렸습니다.”이에 암두스님이 탄식하면서 말하였습니다.
“아! 그 때 그에게 말후구末後句를 해 주었어야 할 것을. 그렇게 했더라면 천하에 어느 누구도 설봉을 감당하기 못했을 것인데.”
그 납자들이 안거가 끝날 무렵이 되자 다시 이전 이야기를 꺼내면서 법문을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암두스님이 나무라듯 말했습니다.
“왜 진작 묻지 않았느냐?”
“아무리 해도 알 수 있는 공안이어서 늦었습니다.”
“설봉은 수여아동조생雖與我同條生이나 불여아동조사不與我同條死로다. 설봉과 나는 같은 가지에서 태어났지만 나와 같은 가지에서 죽지는 않을 것이다. 요식말후구要識末後句인가? 말후일구를 알고 싶은? 지저시只這是니라. 그게 바로 이거야.”

설봉스님과 암두스님은 모두 덕산스님 밑에서 동참수학 하였습니다. 그 두 객승 납자는 설봉스님을 참방하고서도 그 느낀 바가 그저 그랬고 암두스님을 뵙고서도 눈꼽만큼도 깨치지 못하였습니다.
부질없이 두 노스님을 번거롭게 하면서도 묻고 답하고 사로잡고 놓아주었으니 예나 지금이나 천하인에게 까다롭고 배배꼬이게 하여 이를 밝히려 해도 밝힐 수 없게 만든 것입니다. 설봉스님은 총림을 두루 편력하긴 했으나 별다른 공부의 진전이 없었습니다. 어느 땐가 암두스님 그리고 홈산스님과 함께 행각을 하다가 호남성 풍주 오산에 이르렀을 때 내리는 눈 속에 파묻혀 오로지 죄선을 하다가 암두스님에게 일착一着을 받고는 안목이 열리면서 마침내 덕산스님의 법을 잇게 되어 서로 사형사제간의 인연을 맺게 됩니다.
암두스념은 그 뒤 회창법란을 만나 악저호에서 뱃사공이 되었는데 강의 양쪽언덕에 판자를 하나씩 걸어 놓고 사람이 와서 판자를 두드라면 암두스님은 “그대는 어느쪽으로 가려느냐?”고 묻고는 갈대숲 사이에서 노를 흔들면서 나오곤 했습니다.
설봉스님은 영남으로 돌아가서 어느 조그마한 암자에 머물게 되는데 그 두·객승 납자도 오랫동안 참구하던 선객들이었습니다. 설봉스님은 그가 오는 것을 보고는 미리 나가·서 “시삼사是甚麽오?” 하니 이 스님 또한 괴짜였는지라 도리어 “시삼사是甚麽오?”라고 해버리자 설봉스님은 고개를 숙이고는 암자로 되돌아가 버렸던 것입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설봉스님에게 목숨을 노리는 날카로운 곳이 있음을 두 객승이 몰랐기 때문입니다. 설봉스님은 적절하게 몸을 숨겼지만 그림자까지 숨기지 못한 것을 어찌 하겠습니까?”

두 객승 납자가 설봉스님을 하직하고는 암두스님에게 도착하였습니다.
“영남에서 왔다니 설봉스님을 만나 보았는가?”
“예!”
“무슨 말슴을 하시던가?”
이 또한 괜히 해보는 말이 아닌데 이 두 객승 납자들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암두스님의 말에 그만 휘둘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깜깜하여 흑백을 분별하지 못한 채 마음속 가득히 의심을 품고서 “절봉스님이 모르더군요”하고는 천연덕스럽게 말하였습니다. 암두스님도 거기서 그냥 말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더 이상 이야기해 봐야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늦었지만 그래도 결제를 제대로 하기는 제대로 한 모양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안거 마지막에 가서야 암두스님에게서 다시 묻게 된 것입니다. 이에 암두스님이 눈쌉을 아끼지 않고 자세하게 설명을해 줍니다.
“설봉은 비록 나와 같은 가지에서 태어났지만 나와 같은 가지에서 죽지는 않을 것이다. 말후일구를 알고저 하느냐. 그게 바로 이거야.”

종문의 가르침을 일으켜 세우려면 반드시 당면한 문제의 핵심을 분별하여 진퇴와 시비를 가려야 하며 죽이고 살리며 잡고 놓아줌을 밝혀야 합니다. 만일 안목을 갖추지도 못한 채 이러쿵저러쿵 묻기도 하고 대답하기도 한다면 목숨을 다른 사람의 손아귀에 밑긴 것이나 다름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운문고 스님이 상당하였을 때 어떤 중이 물었습니다.
“설봉이 암자에 사는데 어떤 객중이 찾아오니 설봉이 나가서 ‘시삼마?’ 하니 그 객중도 ‘시섬마.’라고 하였는데 여기에도 낫고 못함이 있습니까?”
“나으면 모두가 낫고 못하면 모두가 못하느니라.”
“어째서 설봉이 고개를 숙이고 암자로 들어가 버렸습니까?”
“천하 사람을 의심시키기 위해서 이다.”
“암두스님께서 내가 그때 말후일구를 말해주었더라면 천하에 어느 누구도 설봉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 이라고 하였는데 어떤 것이 말후일구입니까?”
“같은 이불에서 자지 않았으면 속옷이 찢어진 줄을 어떻게 알겠는가.”
“암두가 말하기를 ‘설봉과 나는 같은 가지에서 태어났지만 나와 같은 가지에서 죽지는 않을 것이다. 말후일구를 알고 싶은가? 그게 바로 이거야’라고 하였는데 그 뜻이 무엇입니까?”
“사람을 죽이려면 살인검을 쓰고 사람을 살리려면 활인검이라야 되느니라.”

암두스님이 고구정녕하게 말씀하신
‘같은 가지에서 태어났지만 같은 가지에서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이 말을 결제대중은 알겠는가? 어떤 것이 같이 나고 같이 죽지 않는 도리인가?

동조생同條生이라 하니
양경상조무능명 兩鏡相照無能名이요
부동조사不同條死라 하니
철수개화긍고금鐵樹開花亘古今이로다.
후구시뇌관後句始牢關이니
염각면전대안산拈却面前大按山이로다.

같은 가지에 난다 하니
두 거울 마주치매 이름 지을 수 없고
같은 가지에 죽지 않는다 하니
무쇠나무에 꽃이 피어 고금을 꿰뚫는다.
마지막 구절에 굳은 관문 시작되나
눈 앞의 큰 안산을 들어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