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보와 인간의 의지
업보의 지중함과 불가피함을 설명하느라 옛 스님들이 들려주시던 살생에 관한 업보의 이야기다. 업보의 법칙은 엄격하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업보는 예외가 없어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살생의 업業을 지었으면 반드시 살생의 보報를 받는다.
그렇다면 살생의 순환고리는 도대체 끊어질 수 없는 것 아닌가. 만일 업보가 엄격한 물리적인 인과관계라면 살생뿐만 아니라 모든 업보의 순환고리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다. 영원히 반복하는 순환만이 있을 뿐이다. 어떻게 이 업보의 굴레를 멈출 것인가? 업과 과보의 관계는 기계적 인과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선악의 행위와 선악의 결과로 연결되는 윤리적 인과관계다. 윤리적 행위의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의 의지가 놓여 있다. 인간은 의지로 윤리적 행위를 한다. 업보의 순환고리를 바꿀 수 있는 힘은 바로 인간의 의지다. 달리 말하자면 원력願力이다. 원력, 즉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겠다는 인간의 의지만이 업보의 순환고리를 끊을 수 있다.
불교의 우주관에 의하면 온갖 생명들, 즉 중생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천상, 인간, 축생, 수라, 아귀, 지옥의 여섯 가지 세계다. 이 여섯 가지 세계는 고통과 즐거움이라는 기준으로 보면 세 가지 차원으로 나뉜다. 첫째 차원은 아무런 고통도 없고 온갖 즐거움만 가득한 천상세계이고, 둘째 차원은 고통과 즐거움이 혼재混在하는 인간세계이며, 셋째 차원은 오로지 고통만 가득한 축생, 수라, 아귀, 지옥의 세계다. 이 가운데서 첫번째와 세번째 차원의 세계에서는 업을 짓지 못한다. 그곳은 보를 받기만 하는 세계다. 그곳은 업을 생산할 수 없고 소비하기만 하는 곳이다. 왜냐하면 그곳의 존재들은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천상세계의 중생들은 즐거움을 누리느라고 더 향상된 업을 지을 의지를 세우지 못한다. 축생, 수라, 아귀, 지옥의 존재들은 고통을 받느라고 새로운 선업을 생산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이들은 락보樂報든 고보苦報든 받아야 할 보를 전부 받고 나면 다시 인간세계로 환생한다.
오로지 두번째 차원, 즉 고통과 즐거움이 동시에 존재하는 인간세계에서만 업의 생산이 가능하다.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선한 의지로 선업을 짓고 악한 의지로 악업을 짓는다. 심지어 인간세계보다 환경이 더 나은 천상세계에서는 붓다가 될 수 없다. 오로지 인간세상에서만 붓다가 될 수 있다. 붓다가 되는 업이든 무슨 업이든 인간세상에서 인간의 의지로만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교의敎義에 따른다면, 까마귀와 뱀의 이야기는 붓다의 업설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곳은 이야기에 내포된 논리적 결함이 아니라 원력만이 업보의 순환고리를 끊을 수 있다는 대목, 즉 인간의 의지에 관한 이야기다. 업설에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모든 중생들의 행복과 불행이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창조와 인간의 의지
기독자들은 하느님을 창조주로 체험한다. 전능한 창조주 하느님은 우주와 인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가 우주와 인간을 만들고자 한 동인動因은 사랑이었다. 그래서 기독자들은 하느님을 사랑 그 자체로 체험한다. 그는 사랑이기에 인간이 사는 세상을 낙원으로 만들었다. 그곳엔 오로지 즐거움뿐이었다. 심지어 그곳에는 죽음마저도 없어 영원히 살 수 있는 그런 곳이었다. 그야말로 완벽하게 즐거운 곳이었다.
그러나 그 즐거움은 인간 자신의 의지로 획득한 즐거움이 아니었다. 그래서 하느님은 인간에게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의지를 준다. 물론 그 의지는 자신의 행복을 선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불행까지도 초래할 수 있는 그런 것이다. 인간은 결국 그 의지로 자신의 불행을 초래했다. 인간은 곧 그곳에서 쫓겨난다. 따 먹어서는 안 된다는 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자신의 의지 때문에 불행의 길을 걷게 되었다. 낙원으로부터 추방된 결과는 죽음이다.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한 결과 인간은 죽음이라는 궁극적 고통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창세기의 이 대목에서 몹시 당혹해 한다. 전능하신 하느님이 어찌 예상되는 인간의 불행을 막지 못했느냐고. 또한 사랑의 하느님이 어째서 뻔히 보이는 인간의 불행을 막지 않았느냐고. 하느님의 전능함과 인간의 고통, 하느님의 사랑과 인간의 고통은 서로 모순되는 관계가 아니냐고 묻는다. 그래서 기독교의 교리는 설득력이 없다고 하고 심지어 기독교는 틀린 가르침이라고 생각한다. 충분히 그럴만하다. 그러나 여기서도 나의 눈길을 끄는 곳은 이야기에 내포된 논리적 결함이 아니라,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하느님이 아닌 인간의 의지라는 대목이다.
셈족이 믿는 야훼 하느님은 창조를 마치고 물러앉아 관망만 하는 하느님이 아니다. 야훼는 섭리하는 하느님, 역사하는 하느님, 즉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하느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인간의 의지다. 물론 하느님의 섭리와 인간의 의지 가운데서 어느 쪽에 무게를 더 두느냐 하는 판단은 교파에 따라 신학자들에 따라 견해가 다르다. 그러나 어떤 교파든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있고 인간은 이 자유의지로 선악과 스스로의 운명을 선택한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기독자들이 ‘내 탓이오’를 반성적 신앙운동의 기치로 내걸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기독자도 인간의 운명을 하느님 탓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다른 내용 같은 문법
불자들이 생각하기에 의지는 인간의 본성이다. 그것은 인간의 생래적生來的 요소다. 기독자들이 믿기에 인간의 의지는 하느님이 부여한 것이다. 불교와 기독교가 인간의 의지를 설명하는 내용은 이렇게 전혀 다르다.
그러나 인간과 세계의 운명과 역사를 결정하는 궁극적 요소를 인간의 의지로 보는 점에서는 서로 같다. 인간을 바라보는 눈, 인간의 문제를 해석하는 틀에서 두 종교는 서로 같은 문법을 사용한다. 불자들이 자기 운명의 결과를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 것처럼, 기독자들도 인간의 운명을 인간의지로 본다.
혹자는 기독교 신학의 토대를 놓은 바울이나 그를 계승한 캘빈을 예로 들어 인간의 모든 것은 하느님에 의해 이미 예정되어 있다고 말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하느님은 모든 인간을 이미 다 구원해 놓았다고 할지도 모른다. 백 번 양보하여 그렇다손 치더라도 결국 그러한 사실을 받아들이느냐 않느냐는 인간의 의지에 달렸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필자는 언제나 불교와 기독교가 다른 내용을 말하되 같은 문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