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사자산獅子山 흥녕선원興寧禪院 옛터에는 현재 법흥사法興寺가 자리잡고 있다. 이 곳은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남쪽 기슭이 되는데 법흥리하고 하는 동네 이름은 이 곳에 예부터 큰절이 있었기에 후세에도 그 여운이 남아 있어 붙여진 것 같다.
나는 아버지의 직업상 여러 번 학교를 옮기어 영월군 주천면의 주천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당시에는 소풍을 원족이라 하였는데 학교에서 법흥리까지 40리 길을 걸어서 다녀오기도 하였다. 하기야 어느 해 봄철에 제천의 의림지義林地까지 50리 길을 다녀오기도 하였으니 그 무렵의 소풍은 글자 그대로 원족遠足이었다.
이후 십여 년이 흐른 1955년 8월초, 당시 신라·구산선문九山禪門에 대한 연구차 영월의 법흥리를 답사하게 되었는데 오래간만에 주천에서 초등학교 시절의 옛 친구들도 만나고 특히 법흥리의 법흥사가 내가 찾고 있는 신라 사자산문인 흥녕사 옛터임을 이야기하면서 감회 깊은 하룻밤을 보냈다. 이 때의 첫 조사에서 옛 절터와 여러 석조물의 소재를 확인하고 현지에서 출토된 금동여래 한 구를 수습하였는데 이 불상은 내가 단국대학교 교수, 박물관장으로 봉직할 때 학교에 기증하여 전시하였으나 몇 년 뒤에 도난 당하였다.
그로부터 십여 년이 흐른 1967년 4월 초순에 신라5악학술조사단의 일원으로 이 곳을 다시 찾게 되어 현지의 유적 유물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이렇듯 두 차례에 걸친 답사를 실시해도 조직적으로 계속 실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지 파악에 불과하였으며 본격적인 조사는 새로운 기회가 필요했다.
그러던 가운데 1968년 12월초에 세번째로 조사할 기회를 얻었는데 이 때는 계획대로 진행하여 여러 유적 유물의 실측, 탑영榻影, 사진 촬영 등으로 개별적인 검토가 가능하였다. 특히, 옛 절터의 평면 실측으로 대략이나마 윤곽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표조사로써 지상의 노출물만이 대상이었고 지하의 유구는 시굴조차 하지 못하여 전혀 파악할 수 없었으므로 흥녕사 당초의 사관寺觀 추정은 불가능하였다. 앞으로 이 일대의 발굴조사가 행해진다면 지하의 유구와 출토된 유물에 의하여 흥녕사 사적과 가람의 규모가 좀더 밝혀지리라 믿는다.
현재 신라시대의 흥녕선원 옛터는 모두가 경작지로 변하여 지상의 유구마저 농경으로 파괴되고 광활한 신라 절터에는 주초석 몇 점만이 남아 있으며 여기서는 청자편과 기와편들이 산재해 있음을 볼 뿐이다. 유물은 현 법흥사의 부속 건물을 제외하고는 모두 석조물인데 고려시대 초기에 건립된 징효대사보인탑비(보물 제612호)를 비롯하여 석조부도 2기와 석실, 석관, 석조불대좌 등이 오래 된 것이고 근세의 조성으로는 조선시대 후기의 석종형부도 2기와 사자산법흥사중건비를 비롯한 최근의 법흥사 여러 유물이 전해지고 있다.
이 곳은 신라 선문구산의 한 선문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곳인데 실제 이 곳 유적 조사에서 느낀 것은 다른 선문의 사찰처럼 넓고 또한 깊은 산중인데도 당시의 유물은 의외로 적으며 관계 기록도 전혀 없다. 삼국유사나 동국여지승람에는 물론 없고 다른 사료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조선 후기의 범우고梵宇攷에서 약간의 자료를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다행히 이 곳 산문山門의 개산인開山人이라 일컫는 징효대사의 보인탑비가 제자리에 남아 있어 이 비문에 의하여 전혀 모르던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고 여기에 세 차례에 걸쳐 조사된 유적 유물의 모든 내용이 종합되어서 대략이나마 흥녕사 사적을 정리할 수 있다.
통일신라시대 불교의 특징으로 오교구산五敎九山의 성립을 들 수 있다. 오교란 삼국 말기부터 통일시대인 경덕왕 때까지 일어난 열반, 계율, 법성, 법상, 화엄종의 5교종을 말하며 구산이란 당나라에서 돌아온 신행神行과 도의국사道義國師에 의하여 선종이 들어와 견성오도見性悟道를 표방하면서 대도량을 이룩하게 되었으니 9세기에 들면서 나타나기 시작하여 이후 두드러진 종파 아홉이 생겨서 이른바 구산선문을 이루었다. 이 가운데서 사자산문은 그 개조開祖를 도윤화상道允和尙이라고 하나 실제 개산인은 징효대사이다. 즉 도윤의 제자인 징효대사 때에 이르러 그의 문풍門風이 크게 떨쳤던 것이니 현재 사자산 기슭의 옛 절터에 남아 있는 보인탑비문에 의하여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석비는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데 거북돌 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정상에 이수를 장식한 신라 이래의 전형적인 석비 형태이다. 지대석과 거북돌은 한 돌로 조성하였으며 머리는 용의 형태로서 부리부리한 두 눈과 코, 큼직한 여의보주가 인상적이다. 비문에 의하여 고려 제2대 혜종 원년(944)에 이 석비를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보인탑비의 서북쪽 산기슭 낮으막한 언덕 밑에 석조부도 한 기가 있다. 이 부도는 신라 이래의 8각 원당형을 기본으로 삼았으며 정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건립되었는데 각부가 완전하고 보존 상태도 좋은 편이다. 팔각하대석 위에 연화대석이 놓였는데 하대의 각 측면에는 안상 한 구씩이 음각 되었으며 연화대석에는 여덟 판의 복련이 돌려졌다. 중대는 1석으로 조성하여 팔각의 탑신형인데 각 측면에는 양 우주가 정연하다. 상대석에는 앙련이 조각되었는데 상·하 열여섯 판씩으로 도합 서른두 판이 장식되어 화사한 연화대라 하겠다. 탑신은 상·하단이 좁게 곡선을 이루고 배가 부른 8각의 고복형鼓復形으로 앞·뒷면에 문짝이 모각되었다. 팔각옥개석은 여덟 귀퉁이 전각에 귀꽃문이 조각되었으며 상륜부의 보개석 여덟 귀
퉁이에도 귀꽃문이 장식되었다. 이 부도는 기단부와 탑신석, 옥개석 등에서 신라 하대의 양식을 볼 수 있어 바로 앞에서 있는 보인탑비와 연관지어 징효대사의 보인탑으로 추정하게 된다. (사진참조)보인탑비에서 동북쪽 산중턱으로 올라가면 적멸보궁이 있고 이 곳에는 석조부도 1기와 석관 1좌, 석실이 있어 주목된다. 적멸보궁의 건립은 조선 후기이나 이 곳의 석조부도는 각 부의 양식과 조각 수법으로 보아 11세기를 전·후한 때로 추측된다. 석관은 본디 석실 안에 있었던 것을 밖으로 내어 보존하고 있는 바 그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이 곳의 석실은 고승대덕의 수도처로 전하고 있으며 석종형부도 또한 고승의 사리탑이라 한다. 이 곳 신라 사자단 흥녕선원의 조사 연구 내용은 백산학보白山學報 제7호(1969. 12)에 “신라사자산흥녕사지연구新羅獅子山興寧寺址硏究”라는 제목으로 소상하게 발표한 적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