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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은사, 동곡당 일타 큰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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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문혜관 2000년 04월 218호
저는 1980년도 중반 가야산 해인사로 스님 인품과 수행을 좇고자 출가하여 삭발한 지 이틀만에 시봉을 시작하여 입적하실 때까지 지족암에서 스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앞으로도 여기에서 언제나 스님이 오실 날을 기다리며 수행하리라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하며 인연 앞에 숙연해질 따름이다.
집에서는 해 보지도 않은 부엌일이 하루아침에 물미가 날 일 아니겠지요. 지족암에는 공양주 보살이 없어 스님 공양을 짓는데 처음에는 죽밥 아니면 설은 밥을 되풀이하다가 은사 스님께 밥짓는 요령을 배워서 아침은 죽으로 드리고, 점심과 저녁은 밥을 해서 반찬 세 가지와 나물국을 푹 익혀 언제나 조심스레 공양해 올렸다. 은사 스님께서 공양을 드실 동안은 “밥에 돌은 없을까? 찬에 티가 들어가지 않았나? 간은 맞을까?” 늘 불안한 마음으로 옆에 앉아 있다가 스님께서 발우를 닦으시며 “음 잘 먹었다”고 하실 때까지 기다렸다. 그러면 마음속으로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면서 긴장이 풀렸다. 그리고 포행하실 때는 기쁜 마음으로 옆에서 모시면서 오르막길에서는 뒤에서 받쳐드렸고, 포행 후 목욕하실 때에는 등을 밀고 팔 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닦아 드렸다.
사실 속가 부모와는 마음과 음식이 서로 달라서 정 없이 지내고 잘 다투어 효행을 제대로 실천하지도 못하고 출가하여 늘 아쉬움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은사 스님을 부모님으로 생각하고 속가 부모님께 못해 드린 자식 노릇을 은사 스님께 하리라 마음을 굳게 먹었다. 행자 시절에 스님께서는 아침 공양 뒤에 짬을 내어 ‘초발심 자경문’과 ‘사미율의’를 직접 가르쳐 주시면서 당신의 어린 시절과 은사 스님 시봉 때의 이야기를 자상하게 들려주었다. 열세살 때 출가하여 노스님을 시봉하면서 철없는 행동으로 하루에 뺨을 몇 대씩 맞으면서 시봉을 하셨는데, 스님의 생일에 노스님께서 손수 찰밥을 지으시고 손국수를 만들어 주실 때 비로소 불만의 마음 사라지고 “나의 은사 스님이시구나” 하고 노스님의 깊은 정을 느꼈다
고 말씀하셨다. 은사 스님께서는 어린 사미승 시절에 노스님께서 꾸중하시고 때리실 때는 늘 속으로 어른이 되어 시봉을 두게 되면 궂은 일 시키지 않고 때리지 않겠다고 맹세를 했다고 하셨다. 그래서인지 상좌를 백 명 넘게 두셨지만 공부 길 외는 여간해서 꾸중하시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이부자리와 방청소, 빨래는 손수 정돈하곤 하시는데 대신하려고 하면 “이것도 큰 수행이야” 하시면서 몸저 누워 계실 때를 빼고는 손수 하셔서 안타까운 마음 마저 들었다.
내가 사미 수계 후 해인 강원을 가려고 할 때 스님께서는 말을 잊고 있다가 나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대강백을 앞에 두고 어디 가서 배운다냐” 빙그레 미소를 지으시며 날마다 새벽 예불 뒤에 당신의 처소로 책을 들고 올라오라 하셨다. 그래서 스님의 뜻을 알고는 결국 대중 생활의 미련을 접어야만 했다. 그 뒤로도 내가 몸이 약해졌을 때 스님께서는 “신심이 없어서 병이 온다” 경책하시며 선사어록을 강의해 주시고 신信을 다지도록 이끌어 주시며 언제나 웃는 얼굴로 자상하게 대하시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하다. 스님을 시봉하고 얼마 지나 선원에 철 나러 간다 하니 스님께서 직접 송광사 선원에 전화하셔서 방부를 해 주시고는 선원 대중 생활과 입선에 대해서 당신의 경험을 자상하게 일러주면서 참선에 대한 공부 길은 막지 않았다. 그리고 지족암에서 불사나 공사를 하실 때에는 미리 구상을 해놓으시고 평면도를 보여주면서 늘 상좌들의 의견을 참고 삼아서 모든 것이 수행 아님이 없다라는 지론으로 작은 일은 손수 하심을 즐겼다. 어떤 이는 내가 큰스님을 12년 이상 모셨다니 무엇인가 많이 있을 것이라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당사자를 탓하기 전에 이런 눈으로 절집을 보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무학대사와 이성계의 일화가 생각난다. 자기 그릇만큼 보이고 익힌 습대로 생각하게 된다 했다. 은사 스님을 모시면서 사문으로서 걸어가야 할 길을 배우고 중은 명예나 재물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함을 유산으로 받았을 따름이다. 스님은 언제나 초심으로 살 것을 강조하셨다. 세상이 어지럽고 절집이 화합 못하는 것은 “개구리 올챙이 시절 잊듯이, 변소 들어갈 때와 나올 때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라” 하시면서 초심을 잃지 말라고 언제나 훈계하셨다. “정치인이나, 교사나, 의사나, 간호원이나, 자기가 처음 입문하여 선서할 때의 마음만 간직한다면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이 세상은 맑고 아름다운 향기로 가득할 게야, 안 그래”
“그리고 수행자는 삼일수심천재보 백년탐물일조진 -삼일 동안이라도 마음 닦는 공부는 천만 년의 보배가 되지만, 백 년 동안 모은 돈과 재물은 하루아침의 반짝이다 마는 이슬 신세야 ― 이 초심의 말을 잊으면 안 돼. 세상이나 절집이나 분쟁이 있는 곳에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가 명예와 돈 때문이야, 안 그래” 그리고 스님께서는 중생을 향한 끝없는 연민의 정을 내시어 내 몸이 아픈 것은 중생이 아프기 때문이며, 중생이 나으면 내 몸도 나을 것이라 하시면서 사회에서 어렵고 소외된 이를 위해서 수행자는 원력을 놓지 말아야 하며 중생을 향한 비심悲心을 공부감으로 삼아서 자신의 일대사를 해결하고 중생을 제도할 것을 강조하시며 정진하고 또 정진할 것을 당부하셨다. 은사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듣고서 그 동안 소홀하고 못해 드렸던 일들이 생각나면서 만감이 교차하여 눈물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5년 전에 말씀하시길 미국에 가서 수행하다가 거기서 이 육신을 벗어 다음 생에는 미국 사람으로 태어나 거기서 학문을 익혀 스무살이 되면 다시 해인사로 올 테니 지족암에서 기다렸다가 큰절에 스무살짜리 코쟁이가 왔다는 소식이 들리면 얼른 내려와 자세히 보고 아는 체하면 귀 붙잡고 올라와 머리를 깎여라 하시던 그 소리가 귀에 쟁쟁하여 한참 동안 괴로워했다.
은사 스님을 다시 뵐 것이라 생각하면 이십 년도 긴 세월이 아닐 것이라 여겨진다. 은사 스님을 꼭 만나뵙기를 기원하며 정진하려 한다.
요즘은 개인주의가 만연해서 그런지, 인연이 지중하지 않아서 그런지, 편하게만 살려고 그런지 어른 모시기를 꺼려한다. 자기 본분사가 바쁘다고, 나도 나의 인생을 살아야지 하면서 세상이나 절집이 많이 각박해졌다. 젊었을 때 자신의 늙은 미래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편안한 이부자리, 맛있는 음식으로 노후가 즐거울 리 없다. 나도 한때 도망가려고 했으나 스님께서는 “나도 네가 필요하고 너도 나를 의지해야 공부 길을 갈 수 있다” 하시면서 “전생에 내가 너를 시봉했으니 이번엔 네 차례야. 안 그래.” 이렇게 말하며 미소 지어시던 은사 스님을 생각하면 요즈음도 아쉽고 허전한 마음 가눌 길 없다. 이제 은사 스님이 내게 베풀어 주신 큰 은혜를 이제 부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