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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줌 햇살을 남기는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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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성전 2000년 04월 218호
성근 눈발이 날린다. 봄인 줄 알았더니 아직 봄은 아니었다. 어느날 라디오에서 봄을 믿지 말라는 방송 진행자의 말을 들었다. 봄인 줄 알고 겨울의 두꺼운 옷을 벗고 나섰다가 감기가 들려 며칠을 고생했다는 그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봄인 줄 알았다가…. 봄인 줄 알았다
가…. 그래, 봄은 그렇게 쉽게 오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쉽게 오는 봄이라면 봄날의 꽃과 햇살이 그렇게 투명하게 다가올 수는 없으리라. 또한 겨울이라고 그렇게 쉽게 밀리어 가겠는가. 초봄의 아릿한 날들이 좋은 것은 맞음과 보냄의 감정이 하나의 색깔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눈이 내리는 날, 나는 산사를 떠올렸다. 오랜 시간을 떠나 살아온 산사가 그 날은 그리움처럼 살아났다. 가고 싶었다. 눈길을 사부작 사부작 밟으며 온통 고요로 가득찬 산사의 적요 속에서 번뇌의 이 육신을 그냥 한없이 씻어 내고만 싶었다. 도심은 많은 사람이 있지만 따뜻한 체온은 느껴지지 않는다. 단지 뜨거움만이 물결치는 도시에서 삭발염의한 수행자가 발디딜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더 깊게 깨달아 가고 있다. 우리 수행자에게 왜 깊은 산이 필요한지, 사랑을 찾는 사람에게 왜 고요한 삶의 자리가 필요한지, 이 도시에 살다 보면 스스로 그 대답을 발견하게 된다.
밤이 와도 깊은 어둠이 없고, 새벽이 찾아와도 맑은 고요가 없는 자리에서 나는 산사에서 보았던 그 초롱한 별들과, 투명한 물소리와, 가슴을 열고 아득한 저 추억의 끝으로 달려가는 바람의 소리를 떠올린다.
행복이란 무엇일까. 많은 사람이 ‘소유’의 산맥을 더듬으며 행복을 찾는다. 그러나 지혜가 있는 사람은 행복을 찾아 ‘소유의 산’에 땀 흘려 오르지 않는다. 그냥 이 자리에서 가슴 전체로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행복했다. 별들의 반짝임과 바람의 그 웅- 웅 거림만으로도 가슴이 설레이던 산사의 날들 속에서.
눈이 오는 날은 기도를 해도 아주 큰소리로 하게 된다. 그것은 어쩌면 산사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더 깊게 밀려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목이 터지도록 자비와 지혜의 그 이름을 부른다. 그 더이상 목소리가 올라갈 수 없는 극점에 달했을 때 나는 내 목이 터져 저 흩날리는 눈발처럼 사방으로 흩어졌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름다운 이름 하나를 부르다 터져 버린 목이라면 저 눈발처럼 희고 고우리라는 생각이 사무치게 든다.
강원에 있을 때였다. 그 때는 언제나 정초가 되면 일 주일 동안 기도를 했다. 사집반 때였던가. 그 때도 오늘처럼 눈이 내렸다. 합장하고 서서 기도를 하는 동안 나는 목이 터져라 기도를 했다. 그러다가 끝내 출가하고는 처음으로 폭포처럼 쏟아지는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울부짖음이었다. 왜 그랬을까. 문 밖에 내리는 눈이 너무 고와서였을까, 아니면 부처님을 향한 내 사랑의 크기가 그만큼 컸기 때문일까. 지금도 나는 눈이 내리는 날 기도를 하면 아주 큰소리로 한다. 그리고 목젖까지 차오르는 울음을 느낀다. 그러나 눈물은 흘리지 않는다. 기도를 하면서 한없이, 한없이 울고만 싶은데 눈물은 내 눈가에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목젖에서 그냥 사라져갈 뿐이다.
끝내 눈물을 만나지 못하고 기도를 마칠 때 가슴에는 뭔가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남는다. 중은 뒤를 돌아보아 허전함이 없어야 한다고 했는데 나는 아직 중으로서는 가야 할 길이 멀은 것은 아닐까.
산사에서 나는 이따금씩 보았다. 야윈 노구를 이끌고 도량을 걸어가는 노스님들의 뒷모습을.
그 뒷모습은 허전함이 아니라 한줌 햇살처럼 따뜻하고 반짝이는 것이었다. 세상의 시간 속에서 멀어질수록 부처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노스님들의 모습은 때로 내가 수행해야 하는 이유로 다가서고는 했다. 이 세상에서 어느 늙음의 모습이 그토록 따뜻하고 투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빛을 찾아 일생을 순례해 온 수행자가 아니면 그려낼 수 없는 소중한 것이다.
우리는 늙어서의 모습을 완벽하게 그려내기 위해서 일생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아온 생의 긴 여정이 늙음의 문턱에서는 하나도 숨김없이 그대로 그려진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얼마나 깨닫고 있을까. 늙어서의 모습이 추한 사람은 젊어서의 시간들을 탐, 진, 치 삼독이 이끄는 대로 살아온 이들이다. 절제하며 영원을 생각하고 꿈꾸며 살아온 사람의 늙은 모습에서는 햇살의 반짝임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은 빛을 찾아가는 긴 여정이다. 시간의 마디마디에서 우리 스스로가 빛이 되지 못하고 어둠이 되어 남는다면 우리는 영원한 삶의 길을 잃게 되고야 말 것이다.
영원을 사는 존재가 되지 못하고 순간을 사는 존재의 나락으로 추락하고 만다면 또 다시 슬픈 윤회의 길을 만날 뿐이다.
우리 인생이 소중한 것은 이 삶이 성불의 기회로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시간이, 이 공간이 전부인 줄 알고 살아간다면 그리하여 욕망의 긴 궤적을 이끌고 생의 종말에 이른다면 빛은 사라지고 영원은 어둠의 긴 혼돈 속을 표류할 뿐이다. 시간에 대한, 존재에 대한 오만을 버리고 겸손하게 자비와 사랑의 걸음을 옮길 때 그 때 비로소 영원한 삶의 빛은 우리 가슴 속에서 환하게 밝아올 것이다.
늙어서 뒷모습에 반짝이는 햇살과 같은 따뜻함을 남길 수 있는 삶을 살아왔다면 그는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존재의 빛이 되어 다시 살아오르는 것을 의미한다. 영원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에게 순간은 영원한 것이 되지만 순간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영원도 순간과 같이 허무한 것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영원한 삶의 스승인 부처를 향해 기도하고 예경을 올리는 것은 영원한 시간에 동참하려는 우리 비원의 끊임없는 실천인 것이다.
때로 수행의 도정에서 흔들릴 때 나는 한 노스님의 삶의 모습을 떠올린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칠십 평생 단 한번도 새벽예불을 거르지 않았던 그 흔들림없는 수행자의 모습이 내게는 큰 위안으로 다가선다. 배를 타면 배가 법승이 되고, 외유를 할 때면 머무는 곳마다 법당을 만들어 스스로 예경을 올리는 스님의 모습은 언제나 초심자의 신심이었다.
길을 떠날 때면 부처님 모습이 그려진 족자와 자그마한 향로 그리고 향을 한 통 걸망에 넣기를 잊지 않으시는 스님. 그리고 새벽이 오면 머무는 그 자리에서 족자를 걸고 향을 사르고 예경을 올리며 언제나 백팔배를 하는 모습은 한없이 아름다웠다.
수행이 깊을수록 초심자가 되고, 부처님과 가까워질수록 겸손해지는 노스님의 뒷모습에서 나는 햇살의 투명함과 따사로움을 발견한다.
때가 되어 스스로 떠날 줄 아는 스님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고개를 끄덕인 적인 있다. 명예를 초개와 같이 버리고 담연한 수행의 자리로 돌아서는 그의 발걸음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그 날 나는 하루 종일 그의 뒷모습만을 생각해야 했다. 사람이 늙으면 명예욕만 남는다 했는데 스님은 결코 사람으로서 일생을 살아온 모습은 아니었다. 그것은 분명 수행자로서 한 생을 살아온 노 수행자의 조용하지만 반짝이는 삶의 모습이었다. 언제나 부처님 곁에서 부처를 꿈꾸고, 조용히 인간의 시간을 모두 부처님께 바쳐온 스님의 한 생애를 늙을수록 찬연히 영원한 생명의 빛을 더해가고 있었다. 타인에게 소탈하고, 자신에게는 냉정한 그리하여 부처님께는 끝없는 사랑의 헌신을 다 바칠 수 있는 스님의 자리에는 오늘도 아름다운 그늘이 깊게 드리워져 있다.
하루 종일 눈발이 흩날린다. 산사와 노스님을 떠올리는 시간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순결한 초심자가 되고만 싶다. 눈이 파국의 상징이라면 번뇌로 요동치는 내 지난 시간의 문을 닫고 담연한 수행의 자리로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고만 싶다.
나는 늙으면 어떻게 될까. 야윈 노구의 내 뒷모습에도 오늘 스님처럼 그렇게 투명한 햇살이 소담하게 남겨질 수 있을까. 중으로 늙어 그 한 생애의 모습이 아름답지 못하다면 그 자괴감의 크기는 어떨까.
길을 떠나 봐야겠다. 아직 겨울이 채 가시지 않은 산길을 걸으며 미래의 시간을 향해 다짐해야겠다. 나 역시 노스님과 같이 그렇게 아름답게 늙어갈 것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