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불교 행사의 의례적 구조와 의의
불사라 함은 불보살님께 공양하고 재를 열어 식사를 베풀어 물품을 보시하고, 강경講經은 설법하며 부처님을 칭송하는 개인적인 신앙 행위 또는 집단적인 모임을 말하는데, 이 불사에는 대개 의식이 따르게 된다. 일반적으로 신앙심이 행위적으로 표현되는 것을 “의례“라 하며, 신앙 행위인 의례를 일정한 절차에 따라 행할 때 그것을 “의식”이라고 한다. 불교 의식은 불교라는 관념 체계 또는 교리가 공간적 시간적 행위를 포함하는 의례 의식을 행함에 의해서 형상화되는 것이다. 관념체계인 종교교의와 실천체계인 종교의례와는 서로 영향을 주고 또 서로 규정하는 것이어서 이 두 가지는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종교의례의 일반적인 특징은 성격적으로는 종교의식의 외적 표현인 것이며, 기능적으로는 종교적 대상과의 합일의 상징 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종교 의례 행위는 그 종교의 관념의 이전移轉과 더불어 변화한다. 종교 관념과 종교 의례와의 관련해서는 선후의 문제에서 그 견해가 다양하다. 즉 의례선행론儀禮先行論에서는 하등의 선재적先在的 관념을 필요치 않고 의례가 발생하여, 관념은 이미 성립된 의례를 반성하는 경우에 부여되는 설명이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교리의 관념에 기반을 두고 실리의 목적으로 의례가 발생한다는 의지설意志說도 있다. 그렇지만 교의적 뒷받침이 없는 행위는 단순한 육체적 동작에 지나지 않으며, 인간의 문화 활동으로서의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이며, 반면에 실천 행위를 수반하지 않는 순수 관념은 비실재적이며 현실구체적인 것이 되지 못한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각종 불교 행사에서 의례가 지니는 종교적인 의의는 첫째 종교의 대상에 대한 실재감을 고양시키고, 둘째 집단적, 사회적인 확인성을 갖는다는 점이다. 여기서 의례는 집단의 공통 감정의 상징화라 할 수 있고, 실천으로 옮겨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은 공통 감정을 깊게 하여 집단의 결합력을 강하게 한다. 이는 나아가 사회의 관습이 되고 사회 구성원의 의식, 무의식까지 침투하여 집단 전체의 방향성을 부여하고 안정감을 갖게 한다. 의례의 사회적 기능이 갖는 특성은 전통성 보수성 권위성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문화적인 의미를 갖는 종교 의례는 신앙 생활에서 필수 요건이 되는 것이고, 고려시대에 국가가 신앙행위의 주체가 되어 설행되었던 불교 행사도 이러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고려 불교 행사의 사회적 역사적 의의
종래 고려시대에 수없이 개설된 국가적인 불교 행사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여러 관점에서 시도 되었다. 호국불교로서의 사명을 다했다는 긍정적인 입장의 평가가 있는가 하면, 대승불교 본연의 기능을 상실한 주술적, 기복적인 저급한 신앙의 수준이었다는 평도 있고, 특정 계층만을 위한 사원私願에서 비롯되어 국가 재정의 낭비만 초래했다는 비판적 관점의 평가도 있다. 비록 고려시대의 불교 행사가 정치적인 색채가 짙고, 타력 신앙적인 기복 신앙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 하여 특정 계층만을 위한 저급한 수준의 신앙 행위로 봄은 옳지 않다. 각종 불교 행사의 설행 목적과 발원문의 내용을 분석해 볼 때 이들 행사는 국가 차원의 신앙 행사로서 국가 구성원 모두를 위한 발원으로 설행되고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당시에 불교는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이자 종교 신념이었기 때문에 어떤 인위적인 목적성이나 정치성보다는 우위에 있었다. 또 국가적인 불교 행사가 타력 신앙적인 성격의 기복 행사로 일관하고 있다고 하여 저급한 수준으로 보아, 고려 왕실의 기복적인 미신의 폐풍이며, 부패 타락한 귀족 불교로 불교의 근본 정신과는 거리가 멀어져 갔다고 보기도 하였으나, 이는 국가 불교 행사의 밀교적인 성격에 주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밀교 신앙은 정토, 선, 화엄에 의한 신앙과는 달리 감성의 처리에 따른 안심安心이고, 불가항력적인 국가사회적인 문제에서부터 안심을 얻기에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더욱이 밀교는 철저히 긍정적인 입장에서 출발하여 그것이 갖는 관용성과 서민성은 사회 발전에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고, 문화의 다양성을 지향하는 데에도 상당한 공헌을 하였다. 고려 불교는 기본적으로 대승불교의 사상적 전통에 뿌리박고 있었다. 개체로서의 인간의 존재와 운명에 대한 문제에서도, 그리고 공동체로서의 사회 집단의 방향성과 그들 상호간의 윤리에 대해서도 고려 불교는 철저히 대승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다만 그 때의 사회가 현세 이익적 경향이 짙은 중세 사회였기에 밀교적인 신비주의의 감흥과 신심이 더욱 높은 가치로 등장하였다. 밀교신앙의 주술적인 신행은 분명하고 단적인 목적을 지니며 그러한 신행을 통해서 현세의 이익과 안심이 가능하다는 확신에서 비롯되었다. 고려시대에 설행되었던 불교 행사의 사회적인 기능은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축제 행사를 통하여 불교적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것은 국민에게 일체감을 부여하며 국가 사회와 국민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주는 기능도 하였다.
둘째, 종교 행사를 통한 사회 불안의 제거와 안심의 획득에 기여하였다. 국민 모두의 안심 속에 국가 사회적인 안정을 도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전통문화의 계승 발전에 기여하였다. 고려 왕조 수백 년 동안 같은 의례가 지속되었다
는 것은 국민 전체의 호응을 얻은 종교 의례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아울러 밀교 신앙을 통한 불교 본연의 중생 제도의 기능도 갖고 있었다.
역사의 원동력은 대립과 갈등, 투쟁만이 아니고 타협과 순응도 역사를 이루는 데 중요한 덕목이 된다. 국가적 제도를 합리적으로 운영해 나가는 지혜와 온 국민이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 의식의 발전은 반드시 혁명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국가 사회적인 안정과 안심의 분위기 속에서도 이루어진다.
고려의 대장경 신앙
불경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공양하고 예경하는 신앙 의례에는 장경도량을 비롯하여 대장회, 윤경회, 전경 등이 있는데 특히 장경도량은 팔만대장경을 받들어 공양하는 의식이다. 화엄경 또는 반야경, 법화경 등의 각종 불교 경전에 담겨 있는 사상이나 가르침에 대한 신앙이라기보다는 법보신앙 즉 대장경 자체를 신앙하는 행사이다. 성종 10년(991년)에 한언공韓彦恭이 대장경을 송나라에서 가져오자 왕은 대장경을 내전으로 맞아들이고 스님들로 하여금 개독開讀케 하였으니, 이 때에도 대장경을 받들고 공양하는 의식이 행해졌겠지만, 장경도량이라는 이름으로 열리기 시작한 것은 현종 20년(1029) 때부터이다. 현종은 일찍이 세상을 떠난 부모를 위하여 현화사玄化寺를 창건하고 그 절에 대장경을 만들어 모시고자 하였는데, 현종 20년에 그 때까지 이루어진 대장경의 일부를 받들어 모시고 공양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인 정종 7년(1041)에는 이 장경도량이 연중행사가 되어 해마다 봄과 가을에 두차례 성대하게 열리었는데 국왕이 직접 그 장소에 나아가 행향行香하였으며, 더러는 삼보를 찬탄하는 경찬시慶讚詩를 지어 불교에 귀의하는 국왕의 뜻을 내보이기도 하였고, 공덕을 바라는 마음에서 승려들을 초대하여 음식을 대접하는 반승飯僧도 아울러 행해졌다. 정종 이후로 장경도량은 더욱 성대히 베풀어져 충선왕 3년(1311)부터는 행사하는 날을 늘려 봄 가을에 모두 열흘씩 열리게 되었다. 이것은 대장경판의 조성으로 몽고군에게서 국난을 극복하자 대장경에 대한 국가적, 신앙적 의의가 증대되었고, 아울러 그 뒤로 원불교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인사 팔만대장경 정대불사
이상과 같은 고려시대의 여러 가지 불교 행사 특히 대장경을 받들어 모시는 법보신앙을 살펴보면 지금 봄, 가을 두 차례 해인사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똑같은 형식은 아닐지라도- 경전 또는 경판 그 자체를 신앙화하는 정대불사는 그 연원이 매우 깊고 오래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조선시대에 대장경을 강화도에서 서울 지천사로 옮겨 보관하다 경북 고령 개경포를 거쳐 해인사로 대장경을 머리에 이고 옮겨오는 과정은 단순히 경판을 옮긴다는 의미를 넘어 국태민안과 안심安心 극락왕생이라는 염원을 담은 신앙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신앙적 연원에 의거해서 해인사 정대불사를 처음으로 일으키신 분은 1961년 당시 해인사 주지이던 영암 큰스님으로 알려진다. 율장에 따라 살며, 좌선하면서도, 행정에 밝으신 스님은 해인사의 주지 소임을 맡아 비구 대처의 분쟁으로 어수선한 해인사 도량과 망실 재산을 일거에 찾고 정리시켰으며 그리고 현몽을 받아 판전에 모셔진 대장경의 가르침과 가피력을 중생들에게 회향하고, 자손 만대 영원히 보존할 것을 서원하는 해인사 고려팔만대장경 수호 정대불사를 시작했다.
역사적인 법보신앙의 연원에 의거하여 해마다 봄, 가을 두 번 실시되는 이 정대불사는 첫째날 오후 부처님을 모시는 시련으로 시작해서 산중 큰스님들의 법문이 밤새 이어지며 대령 관욕을 통한 영가 천도가 새벽까지 이어진다. 이어 아침 일찍 괘불을 봉안하여 불공한 뒤 산중 어른 스님을 따라 불사에 동참한 사부대중은 대장경 판전을 돌아 구광루 앞에 그려진 법계도 위에서 대장경을 머리에 이고 법고와 목탁 소리와 함께 법성게를 독송하며 요잡하여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는 해인사 정대불사는 가장 웅장하고 신심이 절로 나는 한국 최대의 불교 신앙 행사로 자리 잡아 왔다. 정대불사에서 행하는 설법과 의식 하나하나마다 옛 선조들의 진리를 사랑하는 마음과 법보를 수호하려는 정신이 면면히 이어지고,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인 지혜(수행)와 자비(교화)가 상징화되어 있다. 재앙을 없애고 만복을 기원하는 인간의 본능적이며 원초적인 갈망을 고려인은 그것이 개인적이든 사회 국가적인 문제이든 부처님의 가르침에 호소하고 의지하여 작복作福 하였듯이, 해인사 정대불사에 동참하는 모든 불자도 이와 같은 부처님을 향한 간절한 신앙으로 발원하면 안심安心으로 한없는 복덕과 지혜를 일구어 사회 국가적으로 화합과 평화의 도약을 닦는 불사가 될 것이다. 개인적인 신행이나, 사회적인 불교 행사에서 형식(자비-교화)과 본질(지혜-수행)은 수레의 양 바퀴처럼, 새의 양 날개처럼 매우 중요하다. 의례 의식 등 신앙의 행위(형식)가 없이는 대승으로 중생을 구제할 길이 없고, 본질을 담지 못하거나, 사욕私慾으로 왜곡되는 수행과 종교의식은 미신으로 강매되거나, 종교 문화적으로 전승傳承의 가치를 잃게 된다.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할 지금의 우리에게 귀중한 거울이 된다. 고려시대의 각종 불교 행사가 후에 본질을 담지 못하거나 전도顚倒되어 국민에게서 멀어지고 사라져간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이제 거의 40년 동안 똑같이 행해지고 있는 해인사 정대불사가 경판수호 의지와 법보신앙 -부처님의 가르침(경전)을 높이 받들어 모시고 배워 부처님 법대로 살겠다는 서원- 을 고양하고 안심과 국태민안이라는 원대한 뜻이 잘 담겨 있는지 검토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제 다른 사찰에서도 해인사 정대불사와 유사한 불교 행사를 추진하고 있는 만큼, 차별화를 시도하는 뜻에서도 역사성과 교리에 근거한 더욱 신명나고 신심나는 의식을 도입하고 다양한 계층에게 긴 여운이 남을 수 있는 신행의식으로 발전되도록 연구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