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판 정대신앙의 유래
불교신앙은 흔히 삼보三寶에 대한 신앙으로 설명되며 이 가운데 법보신앙은 곧 경전신앙과 연계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또한 불보신앙이 탑과 불상의 조성 등으로 전개되어 왔다면, 법보신앙은 경전의 성립과 유통에 의해 전개되어 왔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대장경의 성립은 이 같은 법보신앙의 최대 결정체라고 하겠다.
경전을 수지 독송하는 것은 불자들의 의무적인 수행 형태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경전의 수지 독송을 통한 공덕은 불자들에게 불보신앙 못지 않게 중시된 바 있다. 현대 이후 해인사에서 봉행해 오고 있는 경판 정대불사는 이러한 경전신앙의 대표적인 의례에 해당할 것이다. 그러면 현행 정대불사는 어떠한 역사적인 근거를 지니고 있을까? 나의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역사 자료 속에서 이에 걸맞는 의례 형태는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했다. 이와 유사한 성격을 지닌 불사는 더러 나타나고 있지만 경판 정대불사라는 동일한 이름의 의례는 발견하지 못했다.
머리에 경전이나 경판을 얹고 도량을 도는 현행 정대불사의 신앙적인 의의를 살펴보기 위해 먼저 정대신앙의 유래부터 검토해 보도록 하자. 정대頂戴는 글자 그대로 ‘머리에 이는, 또는 머리에 받드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것을 불교적인 의례로 부연한다면 ‘불상이나 경전 등을 머리에 받드는 행위’로, 가장 지극한 존경의 뜻을 표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대신앙의 유래는 관세음보살에서 비롯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관세음보살이 본사本師인 아미타불을 예경하기 위하여 머리의 보관寶冠에 불상을 모시고 있는데 여기서 정대신앙이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머리를 중시하는 습속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것이겠지만, 불교에서도 가장 극진한 존경과 예경을 표현하기 위해 이러한 정대신앙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경판 정대불사는 경전신앙을 가장 극진하게 표현하는 의례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하지만 앞서도 언급한 것처럼 경판 정대불사가 언제부터 누구에 의해 시작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중국의 대표적인 호불護佛 군주로 평가되는 양무제梁武帝와 관련한 다음 기록에서 그 유래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원하옵건대 여러 불보살께서 반야의 인연으로 동시에 모이셨으니, 만품萬品을 불쌍히 여기고 군생群生을 보살피셔서 은혜로운 흐름에 들게 하여 부처님의 바다로 다 함께 돌아갈 수 있도록 하여 주시옵고, 금강의 묘한 보배를 얻고 금첩金牒의 깊은 경전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것을) 머리에 이고 받들어 모시면서 죽을 때까지 떼지 않겠나이다.”이 인용문은 양무제가 지은 [금강파야참문金剛波若懺文]의 일부이다. 광홍명집廣弘明集 권 28에 실려 있는 이 글에서 경판 정대신앙과 관련한 내용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위에서 표현한 것처럼 양무제는 경전을 머리에 이고 받들어 모시면서 평생토록 떼지 않겠다고 부처님께 다짐하고 있다. 그만큼 경전의 가르침을 중시하면서 그대로 살아가겠노라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자료만 가지고 그 때부터 경판 정대불사가 행해졌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양무제의 신앙과 사회의 영향력을 고려해 볼 때, 이 같은 경전 정대신앙이 널리 확산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다만 이것이 불사 차원에서 널리 행해졌는지, 아니면 단지 경전신앙의 확산에 기여하는 정도에서 그치고 만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좀더 심층적인 연구가 필요한 실정이다.
우리나라의 경우에서도 경전신앙은 매우 이른 시기부터 찾아볼 수 있다. 일연 스님도 삼국유사 “전후소장사리조”를 통해 경전의 전래와 유통 과정을 자세히 서술한 바 있다. 특히 고려 현종대의 초조대장경 판각 이후 경전신앙은 더욱 중시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지만, 경전이나 경판을 머리에 이는 형태의 직접적인 의례 행위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고려시대에는 많은 수의 국가의 불교행사가 개최되었으며, 이 가운데 경전신앙과 관련한 불사도 적지 않았다. 고려사에 수시로 등장하는 강경講經법회뿐만 아니라 경찬회慶讚會, 장경도량藏經道場, 경행經行, 전경轉經 등은 모두 경전신앙에 근거한 국가의 행사였을 것이다. 다만 현존하는 기록이 모두 단편적인 것들이어서 이들 행사의 의식이 어떠한 형태로 진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이들 행사는 대부분 왕이 직접 참가한 상태에서 진행되었고 따라서 그 행사규모 또한 매우 성대하였을 것이다. 혹시 이들 행사 가운데 경판 정대 의례가 일부 행해졌을 것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억측일까?경판 정대불사의 취지비록 뚜렷한 근거는 살필 수 없지만 이제 경전(경판) 정대불사는 우리 불교계의 중요한 불사 가운데 하나로 정착되어 가고 있다. 아울러 해인사를 중심으로 하여 정대불사의 의례도 어느 정도 정형화되어 가는 추세이다. 정대불사에 참가한 사부대중은 금강경, 화엄경 등의 주요 경전을 머리에 이고 독경을 하면서 탑이나 도량을 돌거나 법계도法界圖의 동선을 따라 일렬로 늘어서서 도량을 선회하는 형식이 일반적이다. 물론 각종 정대불사에 참가한 불자들은 나름대로 경전의 수지 독송을 통한 무한한 공덕을 얻고자 하는 마음으로 도량을 돌게 될 것이다. 그러한 마음이 정대불사를 행하는 근본 취지와 부합하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과 가정의 복락에 앞서 국가의 안위를 먼저 기원했던 선조들의 신앙 자세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특히 팔만대장경판이 봉안되어 있는 해인사의 정대불사는 무엇보다 국가의 흥륭을 기원하는 호국 취지가 중시되어야 한다.
몽고군의 침입으로 전 국토가 유린당하고 있을 때 고려의 불교인들은 대장경 판각 불사를 시작하였다. 일부에서는 전란의 와중에 막대한 인력과 재물을 쏟아 부으면서 진행했던 이 불사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를 내세우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당시 고려인들의 간절한 신앙이었다. 한편에서는 몽고군과 맞서 싸우는 무력 저항을 계속하면서, 한편으로 이렇게 부처님의 신통력에 의지하고 싶었던 것이 그 무렵 사부대중의 염원이었다. 이규보李奎報는 팔만대장경 판각에 앞서 다음과 같은 기원문을 작성하였다.
“(생략) 옛적 현종 2년에 거란의 임금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와서 우리를 정벌하자 현종은 남쪽으로 피난하였고, 거란군은 송악성에 머물며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현종은 여러 신하들과 함께 더할 수 없는 큰 서원을 발하여 대장경 판본을 판각하였으며 이것이 이루어지자 거란군이 스스로 물러갔습니다. 그렇다면 대장경도 한 가지이고 군신이 함께 서원한 것도 한 가지인데, 어찌 그 때에만 거란군이 스스로 물러가고 지금의 달단(몽고)은 그렇지 않겠습니까? 다만 제불다천諸佛多天이 어느 정도 보살펴 주시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국가의 안위를 보존하기 위해 고려인들은 이렇게 부처님의 가피력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신앙의 힘이 바로 팔만대장경판 성립으로 회향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올해 해인사에서 봉행하는 대장경 정대불사에도 역시 많은 사부대중이 동참할 것이다. 부디 이 불사에 동참하는 사부대중 모든 분의 마음 속에서, 경판을 머리 위로 떠받치고 있는 모든 분의 두 손끝에서 이러한 호국불교의 드높은 서원이 면면히 계승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