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 세존께서 태자 시절 4문을 유관하고 정반왕의 왕위를 물려받을 자신은 영원히 죽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회의를 갖기 시작하였다. “나도 과연 죽어야 하나?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범천이 사문으로 나투어 도를 닦아 생사해탈법을 성취하면 영원히 살 수 있음을 보여주므로써, 적어도 자신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을 택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만승천자의 지위도 헌신짝처럼 버리고 출가 수행을 해야만 가능함을 알고, 어느 날 밤중에 백마를 타고 가비라 성을 넘어 설산 수도의 길로 접어든다.
이는 삼세 제불께서 중생을 위해서 보여준 만세의 궤범이다.
우리 범부 중생의 자성은 모든 부처님·성인의 자성과 그 바탕에 있어서 하나도 다름이 없다. 본래로 청정무구한 우리의 자성이 언제부터인가 번뇌 망상의 구름에 가리워서 자성의 대광명체를 보지 못하고 미혹에 휩싸여서 생사윤회를 거듭한다. 범부중생이 자성을 깨쳐서 본래의 지혜광명을 회복하면 그 순간 바로 부처이고 성인이다. 그러므로 『범망경』에 말씀하기를 “나는 이미 깨달은 부처요 너희는 아직 깨닫지 못한 부처다”고 한 것이다.
육조 혜능대사는 『단경』에서 “무념법을 깨친 이는 만법에 다 통달하며, 무념법을 깨친 이는 모든 부처님의 경계를 보며, 무념의 돈법을 깨친 이는 부처님의 지위에 다다른다.(悟無念法者 萬法盡通 悟無念法者 見諸佛境界 悟無念頓法者 至佛位地)”고 말씀하였다. 이는 『단경』 가운데 가장 핵심이며 골수 법문이다. ‘무념법’이란 생각 없는 법이라고 하여 아주 단멸된 법이 아니라 분멸 망상과 집착이 없는 것을 말한다. 세간을 여의치 않으면서 세간에 집착하지 않고 물들지 않은 법이다. 선종은 이 무념을 종취로 삼는다(無念爲宗). 이러한 무념법을 깨친 이는 세간법 출세간법 할 것 없이 오만 가지 법에 모두 다 통달하여 걸림이 없다. 선 자리 앉은 자리 그대로가 극락이요 대해탈장으로서 일체에 자유자재하다. 무념법을 깨친 이는 삼세 모든 부처님의 세계를 봄과 동시에 저절로 구품연화대에 올라 모든 불보살들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여 무위진법락無爲眞法樂을 누리는 것이다. 무념의 돈법을 깨친 이는 바로 묘각을 성취하여 모든 부처님과 동등한 지위에 오른다. 깨치면 곧 부처요 깨치지 못하면 그대로 중생이다. 그러므로 중생과 부처의 차이는 깨침과 깨치지 못함의 차이일 따름이다. ‘무념의 돈법’이란 돈오견성법頓悟見性法으로서 단박에 깨친 법을 말한다. 사실 선종은 이 돈오견성법 위에서 성립한다. 깨침은 한순간으로서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마다 한순간에 단박 깨치지 못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순간에 단박에 깨쳐서 단박에 해 마쳐 버리는 것(頓悟頓修)은 최상상 근기만이 할 수 있는 것이어서 선종 사상 그리 흔치 않은 일이다. 그러면 나머지 일반 근기의 사람들은 선종 문하생들이 아니라는 말인가? 깨침에는 시절 인연이 있어서 금생에 해 마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근기도 있으므로써, 한결같지는 않다. 다만 과거에 얼마만큼 닦았느냐에 따라 더디고 빠름이 있을 뿐이다. 설사 금생에 깨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숨 넘어가는 순간까지 자기의 본참공안本參公案을 놓지 않고 간절히 참구한다면, 다음 생에는 반드시 사람 몸 다시 받아서 이 공부를 계속하여 시절 인연이 다다르면 홀연히 깨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명연수 선사는 말하기를 “설사 금생에 깨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생에는 하나를 듣고 천을 깨달아서 대총지를 얻는다.(一聞千悟 得大總持)”고 하였다. 공부인은 장구한 신심과 대원력을 가져야 한다. 금생에 깨치지 못하면 내생을 기약하고, 그래도 안 될 때는 3생, 5생, 10생, 백생이라도 오로지 이 공부 아래서 이 도리를 해 마쳐서 영원한 생사해탈법을 성취하겠다는 서원을 세워야 한다.
우리가 자성을 깨쳐서 생사해탈법을 성취하는 데는 참선법이 가장 지름길이다. 참선법 가운데서도 불조의 공안인 화두를 가지고 참구하는 것이 가장 수승하다. 불조의 공안은 구경에 도달한 대무심지에서 도출한 기연언구機緣言句들로서, 이들 공안 가운데서 종문의 대표적인 공안 하나를 결택받아서 자기의 본참 공안으로 삼아 지니고, 오로지 이 본참공안만을 깨치기까지 바꾸지 말고 악착같이 붙들고 늘어져서, 깨침으로써 법칙을 삼아야 한다(以悟爲則). 중요한 것은 이 화두 저 화두 넘보지 말고 오직 자기의 본참 공안 아래서 결판을 내야 한다. 화두를 바로 깨치면 자성을 요달하여 대해탈도인이 되는 길이며, 부처님과 조사 스님들이 도달한 구경 무심을 체달하여 배움이 끊인 하릴없는 한가로운 도인(絶學無爲閑道人)이 되는 것이니,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그 때 가서는 내가 서울에 당도한 사람인가 아닌가, 내가 밥을 먹어 배가 부른지 아닌지를 스스로 물어보라.
그러나 이치대로 말하자면 본분 도리 앞에서는 닦아 깨친다는 것도 하나의 군더더기이다.
본디 중생과 부처 깨침과 미혹의 구분이 나누어진 것이 아니어서 닦아서 깨친다는 것도 생사의 업을 짓는 것이라고 임제선사는 말하였다. 제불조사가 법문을 말하여 중생을 제도한다는 것은 병 따라 약 주는 일회적 처방으로서, 중생이란 병이 없다면 부처란 약도 필요 없을 것이다. 부처와 중생을 처음부터 둘로 나누어 놓은 일이 잘못된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래서 부처를 원수같이 보아야만 성불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바로 지금일 뿐 다른 시절이란 없다(現今卽是 更無時節). 어디서나 주인공이 되어 선 자리가 모두 참된다(隨處作主 立處皆眞). 구하는 마음을 쉬고 조작하지 않아서 평상 그대로일 뿐, 지금 작용하는 지위 없는 참된 사람은 활발발하게 살아 움직인다(無位眞人 活??). 마조로부터 계승된 이 일상선日常禪 도리는 임제 선사에 와서 그 극치를 이룬다. 이 활발발한 대자유인을 구가한 임제선 사상은 인류의 정신 사상 하나의 금자탑이 아닐 수 없다. 이 도리 앞에서 우리가 번개 빛도 뚫지 못하고 물방울도 스며들지 못할 만큼 신념이 확고하다면 선자리 그대로 성불한 것이지만, 추호라도 의심이 작용한다면 다른 생을 기약하고서라도 이 일을 꼭 요달해야만 하는 것이다. 대혜선사는 말하기를 “운문도 평소에 부득이하여 사람들에게 좌선을 가르쳐 고요한 곳에서 공부를 짓도록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병 따라 약 주는 것으로서 기실 이렇게 지시할 곳이란 없다…. 오로지 한 말씀 한 구절 아래 털끝만큼도 간격이 없다. 부득이하여 ‘직절直截’이란 말도 하지만 이것도 벌써 우회하여 굽은 것이며,’알아차린다(承當)’고 한 말도 벌써 빗나가 버린 것인데, 장차 다시 가지와 덩굴을 이끌어서 경을 들먹이고 교를
들먹이며 이치를 말하고 일을 말하여 구경을 삼고자 하겠는가”고 하였다.
이 일은 우리 각인覺人의 본분사이다. 우리 일생일대에서 절체절명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학문이야 어느 때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고 하겠으나, 금생에 불법을 만나서 이 문중에서 자성 깨치는 참선법으로써 공부한다는 것은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니다.
이 좋은 시절을 되는대로 헛 보내지 말고 열심히 각인의 본분사를 반드시 해 마쳐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