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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 결사도량에서 보낸 세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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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행자시절 - 박원자 2000년 03월 217호
혜거/금강선원장

내 나이 열여섯이던 어느 날, 나는 삼척 영은사 뜨락에서 스님들의 글 읽는 소리에 온 마음을 빼앗기고 서 있었다. 새소리 바람소리조차 숨을 죽인 듯 온 도량이 글 읽는 소리로 가득했으니, 그것은 선경에서들려오는 소리였다. ‘내 어찌 이런 곳을 이제서야 찾아왔을까’ 하는 아쉬움마저 자아냈던 그 청아하고도 장엄했던 글 읽는 소리는 출가의 길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꼭 그 길을 가고야 말리라 다짐하고 찾아온 나를 환희로 가득차게 하기에 충분했다. 경 읽는 소리만 경내를 오갈뿐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는 가운데 경 읽는 소리에 빠져 얼마를 그렇게 서 있었을까, 이윽고 한 스님이 방문을 열고 나왔으니, 마흔해 전 그 날 그렇게 사문이 되는 첫걸음을 내딛었다.
‘혹여라도 받아 주지 않으면 부엌이나 마루에서 자더라도 쫓겨 나오지 말라’고 당부하던 속가의 외삼촌 김지견 박사의 말씀은 기우였다. 대중 스님이 사오십 명이 되는 곳에 행자가 몇 안 되었던 터라 대중 스님 모두가 새로 온 행자를 반겼기 때문이었다. 공부 복이 있으려고 그랬는지 처음부터 시집살이 시키는 분 없이 ‘화엄경’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니 행복하게 행자 시절을 출발하였다.
내가 영은사를 처음 찾았을 때는 탄허스님께서 ‘화엄경 삼년결사’를 막 시작하여 화엄경을 강의하시며 역경을 하고 있을 때였다. 스님께서는 결사대중에게 철저히 공부를 시켰을 뿐만 아니라 공양주와 채공, 부목까지도 본인이 원하면 강의를 들을 수 있게 했다. 일단 강의를 듣는 사람은 그 시간은 다른 일을 하지 않게 하는 방침을 두셨는데, 도량에 왔으면 공부가 위주이지 일이 위주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제 막 출가한 행자가 화엄경 강의를 듣는다는 것은 다른 절 같으면 언감생심 엄두도 못 낼 일이었으나, ‘못 알아 들으면 어떠냐. 다 그것이 문원文原이 되어서 전부 자기의 살림살이가 되느니라’는 것이 노장의 생각이었다. 그러므로 1959년에서 1961년까지 세 해 동안 화엄경 여든 권을 마칠 때까지 영은사
도량에선 대중 스님 속에 공양주에서 부목까지 끼여 강의를 들을 수 있는 이례적인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예비 사문으로서 참으로 환희로운 나날이었다. 화엄경 특강은 서당에서 한문을 꽤 익히고 들어왔다 해도 열여섯 어린 행자가 알아듣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해서 반은 졸기도 한 시간이었으나 재미 또한 쏠쏠하기 그지없었다. 때론 강의중 노장 스님과 대중 스님들 사이에 담론이 벌어지곤 했는데, 나는 숨을 죽이며 스승과 제자 사이를 뛰어넘으며 오갔던 그 불꽃 튀는 격론을 흥미롭게 바라보았고 ‘도’ 공부가 이렇게 멋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며 초발심을 내고 있었다.
세 해 동안의 행자 기간에 ‘사집’과 ‘영가집’을 보았지만, 이 ‘화엄경 특강’ 시간만큼 내 마음을 끌어당기고 환희를 일으키지는 못했던 것 같다.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글 읽는 소리가 하루 종일 그치지 않았던 그 도량이며 일상의 대화가 모두 경전 배운 것으로 이뤄졌던 그 시절을. 물론 대중 스님 사오십 명에 행자가 서넛이었으니 할 일도 많았다. 세 해 동안 공양주, 채공, 다각을 각각 한 해씩 하며 일 또한 많이 했다. 그 가운데 한 달에 세 번 황토를 파다가 물에 개어서 부엌의 벽이며 부뚜막에 칠했던 기억이 난다. 장작을 지펴서 군불을 때고 공양 준비를 했으니, 열흘만 지나면 부엌이 검게 그을리게 마련이었다. 지금은 웬만한 절에는 모두 가스불에 밥을 짓고 있는 것을 보면 격세지감이 든다.
행자 시절만큼 긴장을 풀지 못했던 날들이 또 있을까. 공양 짓는 시간 아궁이에 장작을 지피며 쌀을 일며 전날 배운 사집을 외웠으니, 졸음 때문에 낭패를 보았던 일은 없었다.
이불을 펴고 누워 자는 일이란 생각도 못했던 시절, 긴 방석을 허리띠로 배에 묶어 얹어 놓고 자고, 행전을 차고 자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만큼 일도 많았고 긴장을 늦추지 않았던 날들이었다. 나는 점심공양 뒤 한 시간 정도 짬 나는 시간을 이용해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서 전날 배운 경전을 외웠다.
사집시간에는 전날 배운 것을 한사람씩 강사 스님 앞에서 외웠어야 했으니, 뭐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일과 공부가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대부분 처음 욀 때부터 더듬거리기 일쑤였으나, 나는 꾀를 내어 처음부터 소리를 길게 빼어 곡절을 넣었으니, 아슴하던 것도 소리를 빼는 시간에 기억이 나고는 했다. 사집 가운데 한 권을 다 읽고 나면, 한꺼번에 한 권은 다 외워 바쳐야 했는데, 한 줄이라도 빼놓거나 더듬거리는 것 없이 외웠던 걸 보면 암송하는 것에 소질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때 외웠던 것이 지금도 한 글자 한 글자 선명하게 떠오르니 그 시절 얼마나 혼신을 다해 공부에 몰입했었는지, 참으로 아름답던 시절이었다.
탄허스님께서는 출가자는 경전은 물론 불교 의식에 밝아야 함을 강조하셨던 터라 의전 공부 또한 확실히 익히게 했다. 해서 점심공양 뒤 잠깐씩 짬을 내어 범패를 배우게 했고 시식을 하는 법을 익히게 했다. 그 당시 중강 스님이었던 도원스님과 탄허스님의 맞상좌이신 보경스님께 범패를 배웠고 불교 의전에 수반되는 여러 의식도 함께 익혔다. 그리하여 세 해 행자 시절을 마치고 계를 받을 때는 염불이며 범패, 시식까지 모든 것을 익힐 수 있었다.
행자 시절 중 생각나는 한 분이 있다. 그 때 영은사 주지였던 보경스님인데, 그 분은 매를 무섭게 때리며 행자 교육을 시켰다.
설거지를 한 구정물에 밥알이 하나라도 눈에 뜨이면 공양주가 먹도록 할 만큼 엄격했다. 그러나 스님께선 행자들에게 그리 엄격했으나 온전히 대중을 위해 봉사하신 분이었다. 화엄경 특강 시간에 영은사에 살고 있는 사람 가운데 단 한 분 들어오지 않는 분이 주지 스님이었으니, 대중을 위한 헌신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알 수 있다.
온종일 논밭에서 살았던 주지 스님은 모내기를 하느라 온 대중이 나섰던 이삼 일 동안에도 새벽같이 일어나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농기구를 모두 준비해 놓고 기다리곤 했다.
공부하는 대중을 위한 헌신을 온몸으로 보여준 분이었다.
출가자로 익혀야 할 모든 것을 환희심과 함께 짬지게 배웠던 행자 시절이었으나, 못내 아쉬운 게 하나 있으니 그것은 도반을 형성하지 못한 점이다. 마음을 열어 한 평생 한 길을 함께 갈 수 있는 도반을 갖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나는 요즘 경전 번역 십 년 결사를 준비하고 있다. 곧 결사 도량을 마련해 결사 대중과 함께 전반적인 경전을 강의하고 역경할 생각인데, 이는 생전에 은사 스님께서 하시고자 했던 일이기도 하다. 나는 불교가 살아남는 길은 원전에 충실히 공부하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참선을 떠난 경전은 하나도 없다.
부처님께서 삼매에 계시다가 나와 삼매를 설한 것이 경전이다.
그러므로 경전을 떠나서는 올바른 불교가 될 수 없다. 사람은 익힌 대로 풀리게 마련이며 제자는 스승을 닮게 마련, 그러므로 나는 남은 생에 스승께서 하고자 하셨던 십 년 결사를 마칠 원을 세웠고, 사전 없이 번역하시던 스승에 가까워지고자 정진 또 정진하고 있다. □

정리/박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