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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경게송산책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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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회해 - 반산 2000년 03월 217호
설을 지내고 난 이맘때쯤이면 제방諸方의 산중에서는 정초기도가 한창이다. 나도 지난해에는 오대산 중대보궁에서 기도를 하였는데, 올해는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향수해례香水海禮와 사성례四聖禮로 정초기도를 드리고 있다. 모두 화엄과는 인연 깊은 도량인지라 우연이 아닌 듯싶다.
지난 호에서는 부처님 발바닥에서 광명이 나와서 온 누리를 비추자 문수보살이 환희로 찬탄하였고, 이번 호에서는 ‘열 분의 수자首字보살’이 좌장座長격인 문수보살과 문답형식으로 설법하고 있다. 마치 수업하던 선생님이 학생에게 질문을 던지듯이….

부처님의 깨달음은 하나이건만문수文殊보살이 가장 먼저 각수覺首보살에게 질문을 한다. “불자여, 심성은 하나인데 어째서 갖가지 차별이 있어서 좋은 세상 나쁜 세상, 잘나고 못난 사람, 부자와 가난뱅이가 왜 생겨납니까?”
모든 법은 작용이 없는 것이며 그 자체의 성품도 또한 없는 것 그러므로 저러한 온갖 것들이 각각 서로 알지 못한다네(諸法無作用이며 亦無有體性이라 是故彼一切가 各各不相知니라)
다음 덕수장德首章에서는, “불자여 부처님의 깨달음은 하나인데 어째서 여러 법문으로 중생을 제도하십니까?”
또 마치 큰 구름의 우뢰소리로 온 누리에 두루두루 비내리지만 빗방울은 차별이 없나니 부처님의 모든 법도 그러하니라(亦如大雲雷가 普雨一切地호대 雨滴無差別인달하야 諸佛法如是니라)또 마치 허공 중에 떠 있는 달을 세간에서 못 보는 데가 없지만 밝은 달은 그 곳에 가지 않나니 부처님의 모든 법도 그러하니라(亦如空中月을 世間靡不見이나 非月往其處인달하야 諸佛法如是니라)

수영하는 사람이 목마르다 하듯이 다음 근수장勤首章에서는, “불법은 하나인데 중생은 갖가지 번뇌를 어떻게 끊습니까? 어떤 중생은 이익을 얻고 어떤 중생은 얻지 못합니까?”
만일에 한량없는 모든 허물을 끊어서 없애기를 구하려거든 마땅히 부처님의 법 가운데서 언제나 용맹하게 정진하시오(若欲求除滅 無量諸過惡인댄 當於佛法中에 勇猛常精進이니라)또 마치 밝은 해가 비치울 때에 어린애들 제 눈을 가리고서 보이지 않는다고 장난하듯이 게으른 사람들도 그러하니라(譬如赫日照에 孩稚閉其目하고 怪言何不覩인달하야 懈怠者亦然이니라)

법수장法首章에서는 법문 듣기만 좋아하고(多聞) 수행하지 않는 이(不修行)들을 위하여 기막힌 비유를 들고 있다.
어떤 사람이 물 속에서 표류하면서 빠질까 겁이 나서 목말라 죽듯이 불법을 수행하지 아니하면은 많이 들은 것도 아무 소용없네(如人水所漂에 懼溺而渴死인달하야 於法不修行이면 多聞亦如是니라)
어떤 사람 맛난 음식 차려 놓고도 스스로 굶으면서 먹지 않나니 불법을 수행하지 아니하면은 많이 들은 것도 아무 소용없네(如人設美饍호대 自餓而不食인달하야 於法不修行이면 多聞亦如是니라)
어떤 사람 남의 재물 많이 세어도 자기 몫은 한 푼 없는 것처럼 불법을 수행하지 아니하면은 많이 들은 것도 아무 소용없네(如人數他寶호대 自無半錢分인달하야 於法不修行이면 多聞亦如是니라)
이런 게송을 보는 불자들 중에서 수영선수나 음식점, 은행에 근무하는 분들이 혹시 출가를 감행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옛 스님들은 심한 충격을 받고 발심發心한 선례가 많기 때문이다. 내 노사老師이신 경봉鏡峰 선사가 그러하였고, 판사로 사형선고를 내리던 효봉曉峯선사가 출가하신 인연도 비슷한 경우라 하겠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떠오른 새해 일출은 변함없이 온누리를 비추고 있지만, 중생이 새 천년의 시작이니 어쩌니 하니까 수줍은 듯이, 동해안에 모인 그 많은 인파를 피해서 지리산 꼭대기에서 비로소 그 장엄한 자태를 내보였다 한다. 아마도 의미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일체에 무애인은 일도로 출생사하신다
다음 현수장賢首章에서는, “제불께서 오직 한 가지 일로 생사에서 해탈하셨는데 어찌하여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일이 같지 않습니까? 설법이나 의식도 다르며…”
문수여, 모든 법이 항상 그러해 법왕께선 호올로 한 법뿐이니 일체에 장애함이 없는 사람들 한 길로 생사에서 뛰어나리라(文殊法常爾하야 法王唯一法이니 一切無 人이 一道出生死니라)
수없는 부처님들 가지신 몸도 오직 다만 하나의 법신뿐이며 마음도 하나이고 지혜도 하나 두려움이 없음과 십력十力도 그러해(一切諸佛身이 唯是一法身이며 一心一智慧니 力無畏亦然이니라)
이 게송은 옛 어른들이 애송하던 명구名句들이다. 신라대 원효성사元曉聖師가 그러하셨고, 표원대덕表員大德(8세기 중반 신라고승), 균여均如스님─고려대 스님─이 그러하였다. 여기서 일도一道는 곧 일승一乘의 뜻이니 곧 「법화경」의 ‘일불승一佛乘’사상을 말한다. 또 일도一道는 ‘모든 성인이 다니는 길이니 따로 갈래길이 없다’는 말이다(표원대덕의 「문의요결문답」). 청량소에서는 윗 게송은 수행단계가 한결같은 길(因一)이라야 하며, 뒷 게송은 성불의 단계가 한결같다(果一)는 말이라고 해석하였다. 실제로 원효스님은 이 게송으로 일생 동안 수행의 좌표를 삼으셨으니, 일도一道가 무애도無碍道임을 보이시고 방방곡곡에서 ‘나무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을 외치며 어리석은 중생을 성불의 길로 인도하셨다(遺事권4·元曉不).

분별심으로는 여래의 경계를 알 수 없나니
다음은 거꾸로 열 분 보살이 함께, “어떤 것이 부처님의 경계이옵니까?” 하고 질문하자 총평하듯이 문수보살의 게송이 펼쳐진다.
여래의 깊고 깊은 저런 경계는 그 분량이 허공과 평등하여서 일체의 중생이 들어가지만 실로는 들어갈 데 없는 것이라(如來深境界여 其量等虛空하시니 一切衆生入호대 而實無所入이니라)
인식으로 알 수 있는 것도 아니오 믿음으로 알 경계도 또한 아니니 그 성품 본디부터 청정하여서 이런 것을 중생에게 열어보이네(非識所能識이며 亦非心境界라 其性本淸淨을 開示諸群生이시니라)윗 게송은 「불지론佛地論」이란 책에서, “부처님의 경계는 허공 외에는 비유할 만한 것이 없다”라 하였고, 이어서 “들어가도 흔적이 없으니 비로소 진여라 할 수 있다. 진여는 본래 넓으면서 깊으니 언사를 초월하고, 깊으면서 넓으니 어찌 끝을 알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래서 아래 게송에서, “분별심으로 아는 것은 진실로 아는 것이 아니다(了別卽非眞知), 언뜻 알았다 하더라도 또한 진실로 아는 것은 아니다(瞥起亦非眞知)” 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이 게송은 지리산 쌍계사雙磎寺 도량에 주련柱聯 글씨로 장엄되어 있는데 그 곳에 살 적에는 늘 지나치면서도 잘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래서 앞에 소개한 대로 ‘물 속에서 목말라하고 눈을 감고서 안 보인다’고 비유한 것일까? 불법 속에 들어와서도 제대로 수행하지 않고 말세末世타령만 해서야 안 될 일이다.
이제 3월이면 지리산 골짜기마다 매화겣예 벙글어지고 뜰 한 쪽에서 산수유도 웃고 있을 터인데, 어디로 새삼 부처님을 만나러 가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