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과 함께하는 선
도대체 하나님은 왜 선악과를 따먹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는가? 왜 뱀의 유혹에 빠질 수 있는 여지를 남겼을까? 그저 보통 부모라도 사랑하는 아이들 옆에는 칼이나 불을 두지 않는데 말이다. 전지전능한 그분이 그런 가능성이 전혀 없는 완벽한 세상을 만들었더라면 아무런 악도 고통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전능한 그분이 어째서 선만 있는 세상을 만들지 않았을까 의아해 한다.
하나님은 네모난 원을 만들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전지전능한 하나님도 네모난 원은 만들 수 없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하나님의 전지전능함을 부정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네모난 원이란 논리적으로 있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생각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있을 수 없는 것을 만들지 못한다고 해서 전지전능함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악이 없는 선은 있을 수 없다. 선은 악에 의해서만 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선하기만 한 세상을 만들었다면 우리는 무조건 선한 행동만 할 것이다. 악행은 도대체 할 수가 없다. 그럴 경우 선의 가치는 있을 수 없다. 선행이 찬양받으려면 악행을 선택할 수도 있어야 한다. 악행에 대한 유혹이나 선행의 시련과 고통을 이겨냈을 때 비로소 찬양 받을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주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기에 진정한 선인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훗날에 받을 상찬賞讚
그러나 이러한 이론적 설명으로 고통받는 착한 사람들을 위로할 수는 없다. 가스실에서 연기로 사라진 600만 명의 유대인 속에 분명히 있었을, 꽃다운 청춘을 일본군의 욕정 아래 짓밟힌 정신대 할머니들 가운데 틀림 없이 있을, 음주운전자의 자동차에 오늘도 어처구니없이 죽어 가는 사람들 속에 있을, 그 억울한 착한 사람들이 이 논리 하나로 위로를 받을 수는 없다. 우리가 이유 없이 오해받았을 때 ‘오해 없이는 이해도 없다’는 말로 위로받을 수 있었던가!그래서 기독교인들은 믿는다. 악행에 대한 징벌이 지금 바로 가해지지 않더라도 혹은 선행에 대한 상찬賞讚이 지금 바로 주어지지 않더라도, 그것은 심판의 그 날 반드시 행해진다고. 아귀 맞는 징벌이나 상찬 없이 죽었던 모든 사람이 그 날 되살려져 모든 것을 한꺼번에 받으리라고. 그래서 고통받는 착한 사람들의 일시 억울해 보였던 선행은 하늘나라에서 몇 배로 보상받는다. 그러니 길게 보면 억울한 선인이란 없다.
물론 또 다른 유형의 대답도 있다. 신은 창조주이고 인간은 피조물이니 피조물인 인간이 어찌 초월적 창조주의 뜻을 알겠는가. 인간은 신의 뜻을 결코 헤아릴 수 없다. 억울한 선인에 관한 것도 우리는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일 뿐이다. 또 어떤 기독교인는 고통에 동참하는 하나님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야훼 하나님은 의를 위해 고통에 동참하는 하나님이다. 그러니 의를 위한 고통을 체험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사업에 동참하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내 탓
부조리한 세상과 억울한 선인에 대한 불교의 해명은 기독교와 전혀 다르다. 불자들은 한 치의 오차없는 선인선과善因善果와 악인악과惡因惡果의 업설을 믿는다. 선행이든 악행이든 자신이 짓고 자신이 받는다. 이는 자동 기계처럼 엄격하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법칙이어서 누구도 이 법칙 앞에서 예외가 없다. 따라서 불자들은 자신의 고통에 대해 그 누구도 탓할 수 없다. 징벌이든 상찬이든, 고통이든 행복이든 모든 것은 자기 탓이다.
그러나 선악의 행위에 대한 결과가 시간의 격차를 두고 찾아온다고 해명하는 점에서는 기독교와 다르지 않다. “금생에 지은 악행의 과보가 바로 오지 않는다고 좋아하지 말라, 다만 아직 그 열매가 익지 않았을 뿐이다. 이생에 지은 선행의 열매가 바로 열리지 않는다고 낙담하지 말라, 아직 그 열매가 익지 않았을 뿐이다.” 금생에 지은 행위의 결과가 금생에 나타날 수도 있고(順現報), 금생에 지었으나 그 과보가 내생에 나타날 수도 있으며(順生報), 내생 이후에 나타날 수도 있다(順後報). 그러니 길게 보면 억울한 선인은 없다.
구체적 내용은 다르지만 불교 역시 인간의 삶을 미래로 연장하여 억울한 선인을 해명한다.
불자들 역시 억울한 선인이란 없다고 믿는다.
다른 내용 같은 문법
불교와 기독교는 억울한 선인을 해명함에서 이처럼 내용은 다르지만 같은 문법을 쓴다. 인간의 의지를 중시한다는 점에서도 마찬가지다. 기독교가 선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중시하는 것처럼 불교 역시 의지를 중시한다. 붓다는 자기의지로 행하지 않는 업은 결코 과보가 초래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의지가 있어야 과보가 있다. 운전을 하다가 사람을 죽인 것은 살인의 업이 아니다. 죽일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법도 살인이 아닌 과실치사라고 한다.
내용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불교와 기독교는 전혀 다르다고 한다. 반면에 문법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두 종교가 같다고 한다. 특히 내용에만 주목하는 사람들은 상대종교의 교설을 이해하지 못한다. 기독교인들은 업설이 남기는 의문에 고개를 가로 젖고 불자들은 변신론辯神論에 담긴 의문에 쓴웃음을 짓는다.
한편, 다른 내용과 같은 문법을 동시에 바라보는 사람들은 두 종교가 보여주는 인간 이해에 대한 심오한 통찰력에 깊이 감탄한다. □
윤영해 님은 동국대에서 선불교를 공부한 다음 서강대에서 종교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동국대학교 불교사회문화연구원에서 Post-Doc 연구원으로 일하며 종교학을 강의하
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