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대찰 감은사 옛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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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보여화 - 정영호
2000년 03월 217호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동해안에 통일신라시대의 호국사찰이었던 감은사 옛터가 있다. 감은사는 원래 삼국통일의 영주이신 문무대왕이 외적을 물리치고 왜병을 제압하기 위하여 진국사鎭國寺로 창건하기 시작하였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하세하자 그의 아들인 신문왕이 완성하였다. (원년 681)
즉 문무왕은 해변에 이 호국대찰을 세워 부처님의 힘으로 왜구를 격퇴시키고 외적의 침입을 막아 내려고 하였는데 완공을 보지 못하였다. 문무왕은 평소에 지의智義 법사에게 \"나는 죽은 뒤에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이라는 유조―임금의 유언을 말함―를 남겼는데 이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안장하였으니 바로 앞바다는 문무왕의 해중릉인 대왕암大王巖이 자리잡고 있다. 신문왕은 부왕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감은사\'라 하였는데 당시 금당金堂에 용혈을 파서 해룡으로 화신한 문무왕이 해류를 타고 법당에 출입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했던 바 지금도 금당지에는 용혈이 남아 있다.
그 뒤에 감은사는 황룡사, 사천왕사 등과 함께 호국의 사찰로 감은사 성전成典이 설치된 대국찰로 번창하였다. 이 성전은 감은사의 관리를 맡아오던 관부로 다른 호국사찰의 성전과 마찬가지로 왕실 발원에 따라서 창건된 원찰로서의, 감은사의 조영과 수리는 물론 왕실의 봉사奉祀기관으로서의 기능도 가지고 있었으니 그 무렵 감은사의 위상을 가히 알 수 있다.
감은사 옛터를 처음으로 찾은 것은 1952년 가을철 답사 때였다. 경주에는 트력을 타고 절터를 갔는데 당시의 찻길은 차들의 내왕이 별로 없어서인지 굵은 자갈이 잔뜩 깔려있고 차가 한번 지나가기만 하면 흙먼지가 온몸을 덥었다. 구비구비 아리랑 고개를 넘어 어일 마을에서 대본리 가는 남쪽 길로 4킬로미터쯤 가니 멀리 바다가 보이며 왼쪽 산기슭에 우뚝 솟은 두 기의 석탑이 보였다. 바로 이곳이 감은사 옛터였다. 논두렁 길을 걸어 언덕에 올라보니 동서로 3층 석탑이 서 있는데 탑신 정상에 길쭉한 찰주가 하나씩이 꽂혀 있어 인상적이었다. 당시 절터에는 류柳씨 집을 비롯하여 몇 채의 건물이 들어서 있었는데 이 절터에 대한 류씨의 증언은 다음과 같았다.
신라 때 세운 큰 절이었다. 탑꼭대기의 높직한 양쪽 철봉에 빨래줄처럼 쇠줄을 매고 그 중심에 큼직한 종鐘을 매달아 치고 있었는데 임진왜란때 왜구가 들어와 그 종을 훔쳐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종이 너무 커서 배船가 가라앉는 바람에 종도 물 속에 빠져 버렸는데 이러한 연유로 앞에 흐르는 강을 대종천大鐘川이라 한다는 것이다.
지금은 감은사지 앞의 개울을 대종천이라 칭하며 이러한 전설의 항간에 나돌고 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강물이 아니라 강 어구의 바닷속에 가라앉아서 지금도 파도가 일면 고요한 한밤중에 바닷물 속에서 종소리가 울려 나오는데 이것은 물결에 다라 가라앉은 종이 주변 바위에 이리저리 부딪치는 소리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해 전에 잠수부들을 동원해서 대종천 어구의 바닷속을 탐색하여 감은사의 침몰 범종을 수색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었다. 하나의 전설이 사실로 나타나기를 많은 사람이 기대하였으나 아직은 요원한 것 같다.
감은사에 얽힌 전설은 여러 가지가 전해지고 있었다. 즉 절 밑에까지 바닷물이 출렁대어 배를 타고 오지 않으면 절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리고 법당에는 큰 구멍이 있어서 바다에서 온 용龍이 이 법당에까지 드나들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몇가지 전설은 지금까지 밝혀진 유구로 고증되었으니 절터의 언덕 밑에 갯벌과 호안석 축대, 바닷물의 썰물 밀물의 흔적, 선착장 등이 확인 조사됨으로써 바닷물이 절 축대까지 들어와 배를 타고 내왕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법당에 큰 구멍이 있다는 것은 지금도 금당 밑에 구멍이 있어 용혈이라 칭하여 문무대왕의 화룡化龍전설로 인한 해룡海龍 호국의 현장을 말해 주고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내용은 「삼국유사」에 자세하게 적혀 있어 우리의 옛 기록이 정확하고도 귀중함을 새삼 느끼게 한다.
첫 답사에서 이렇듯 거대한 석탑을 대하면서 많은 전설을 듣고 보니 과연 이 석탑은 어느 정도의 크기이며 그 구조는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생겼다. 여러 사람과 의논 끝에 탑꼭대기까지 올라가 전체의 높이를 재고 각 탑신부분을 실측하기로 하였다. 류씨가 위험하다고 만류하는 것을 무릅쓰고 사다리를 몇 개 빌려서 기단부부터 차례로 사다리를 놓아 탑신부, 상륜부의 순서로 정상부까지 올라가 실측을 진행하였는데 이 석탑의 정상에 올라간 일이나 줄자로 전체의 높이를 잰 것은 우리가 처음이라고 한다. 발바닥이 근질하고 무릎이 다소 떨리기는 하였으나 그리 어렵지 않게 예정대로 해냈다. 일을 끝냈더니 모두들 억척이라고 하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로 위험한 일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때 석탑 정상부에 서서 바라보니 양쪽 찰주에 빨랫줄처럼 쇠줄을 매고 종을 달아서 타종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말임을 곧 알 수 있었고 석조의 상륜부재들이 장식되었던 찰주임을 숩게 알 수 있었다. 당시 세부의 관찰, 석탑 정상부까지의 실측 조사 등은 초보생에도 미치지 못하였던 바 아마도 이러한 의욕이 오늘날 불교 미술을 공부할 수 있게 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감은사지는 사적 제31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으며 동과 서 쌍탑은 국보 제112호이다. 절터는 그동안 두차레에 걸친 발굴조사에 의하여 유구와 규모가 밝혀졌는데 중문에 들어서면 동·서 쌍탑이 서 있고 중심 북쪽에 금당이 있으며 그 뒤로 강당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밖으로 회랑이 둘러져 사찰 경내를 보호하고 있었다.
석탑이 낙성된 지 1300성상, 풍마우세로 각 부분이 마손되어 전면해체 복원이 시급했었다. 그리하여 1959년 12월에 서쪽탑을, 1997년에는 동쪽탑을 전면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때 희귀한 사리 장치가 창건 당시의 원형대로 발견되었다. 사리 장엄구 자체의 진귀함도 주목되려니와 통일신라 초기의 사리장치법을 잘 보이고 있어 더욱 귀중하게 주목되고 있는 것이다.
석탑의 높이는 동·서탑이 13.4미터로 3층 석탑으로 우리나라 최대이다. 뿐만 아니라 이 석탑은 신라석탑의 사원양식으로써 옥개석상면 낙수면에서는 목조 건축의 양식을, 추녀 밑부분 옥개받침에서는 전탑의 양식을 모방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석탑 양식은 이후 우리나라 석탑의 전형典型으로 정립된 것이니 과연 이 석탑의 역사적인 가치가 큼을 알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