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 출가는 우연이었다. 모두가 가난하던 1960년대 초, 경남 남해 바닷가가 고향인 스님은 어느 날 무작정 부산행 배에 몸을 싣는다.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은, 한창 세상에 뜻 모를 항거를 하던 혈기 왕성한 청소년이었다. 그날 따라 부슬부슬 봄비가 내렸다. 비에 젖은 부둣가는 부모 몰래 가출한 소년의 눈에는 어쩐지 서늘하게 비치기만 했다.
배를 타기 전 우연히 식당에서 한 스님과 겸상을 하게 된다. 가까이서 스님을 보는 건 그 때가 처음이다.
배 안, 3등칸 구석 자리에서 우연히 그 스님을 다시 보게 된다. 뚜렷한 목적지가 없던 소년은 자연스레 스님을 따라 삼천포에서 내린다. 금세 날이 어두워져 부둣가 근처에서 스님과 하룻밤을 투숙한 뒤, 다음날 아침 그 스님이 주지로 있다는 다솔사로 따라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날이 우연히 사월 초파일이라 절집의 풍경을 고스란히 보게 된다. 스님의 행자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후 스님은 진주 연화사, 호국사, 부산 대각사, 마곡사, 관촉사, 동래 포교당 등 수많은 사찰을 돌며 3년에 걸친 긴 행자 생활을 하게 된다. 그 사이, 안에서 들끓기만 하던 혼돈과 광기가 차츰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우연히 시작한 행자생활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처음 머물게 된 다솔사에서 그는 철저한 수행자로서의 기본 교육을 받았다. 절 마당 쓰는 법부터 고추농사, 밭농사, 차잎 말리는 법, 숯 굽는 방법까지. 심지어 추운 겨울날 양잿물에 빨래를 헹궈 내고 하루에도 몇 번씩 산에서 나무를 져나르는 일을 해내며 오직 석가모니불 정근에만 매달렸다. 무슨 목적이나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엔 불교가 무엇인지, 부처가 무엇인지, 절 생활이 어떤 것인지 전혀 몰랐다. 그렇다고 지금도 다 안다는 뜻은 아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알고 모름은 마찬가지다. 스님은 대중생활과 산중 생활을 구분짓지 않는다. 즉 스님과 대중들 사이의 경계가 없다는 뜻이다.
스님은 어렵게 동산스님에게서 사미계를 받았으나, 계첩을 받지는 못했다. 우연한 출가는 몸으로 실행하는 것을 먼저 가르쳤고, 잠시 소홀히 했던 교리 공부에서 보기 좋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스님은 “그것 참 민망한 일이더군”하며 소탈하게 웃어 넘긴다
그 후 스님은 체계적인 학문 수업에 들어간다. 1971년 해인 강원을 졸업하고, 이어 1976년 동국대 불교대 승가학과를 졸업한다. 그리고 도원스님을 은사로 해인사에서 득도한다.
따라 놓은 찻물이 식어갈 즈음 스님의 이야기는 슬며시 거창 포교당 시절로 거슬러올라갔다. 스님의 평생 숙원인 어린이, 청소년 포교 사업이 그 곳에서 출발하여 열매 맺기에 이른다. 불교계가 어린이 포교에 가졌던 관심이 다소 미약하던 1980년대.
스님은 심중으로 깊은 발원을 하고 어린이 포교 사업에 뛰어든다.
조계종 총무원의 소임까지 겸하고 있던 스님은 서울과 거창을 오가며 청소년 법회와 어린이법회를 조직한다.
스님이 거창에 포교당을 짓고 처음으로 초하루 법회를 열었을 때, 참석한 신도는 고작 세 명이었다고 한다.
그것도 초로의 노인분 들만. 그러나 스님은 실망하지 않았다. 더욱 열심히 정진하고 기도하였다. 그는 무엇보다 기도의 힘을 굳게 믿었다. 신도 수는 차츰차츰 늘기 시작했다.
노인들에게도 기초 교리를 설명했다.
자칫 기복불교에 그치지 않기 위해, 그리고 다음 번에 올 때는 꼭 손자들의 손을 잡고 오시라고 당부했다. 그렇게 할머니들의 손을 잡고 삼삼오오 어린이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어린이들이 모이는 곳에는 자연히 어머니들도 따르게 된다. 젊은 신도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며 그 힘을 빌어 사회 봉사단체인 ‘금강반야회’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이어 거사림회가 조직되고 이른바 거창포교당은 그 고장에서는 제일 가는 불교 포교의 장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어린이들에게 탁구나 배드민턴같은 가벼운 스포츠를 가르치고 만화방을 만들어 자유롭게 드나들게 만들었다.
해마다 봄과 가을이면 어린이들과 함께 서울 나들이 길에 올라 다양한 도시의 문화 공간을 보여 주고 여름과 겨울엔 수련 대회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양력설과 추석에는 어린이회와 청소년회에서 직접 군부대를 방문하여 위로하고, 설날에는 ‘금강반야회’나 거사림회에서 거창 교도소와 경노당 등을 방문해 떡국 공양 등을 하며 보시의 가르침을 직접 실천해 나갔다.
가을마다 열리는 거창축제(아림제)를 통해 일일찻집을 열어 그 수익금으로 불우이웃을 돕고 3층 높이의 포교당을 새로 신축하는 등 스님의 발원과 신심은 지역 포교에도 큰 일익을 담당한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어울마당은 연극을 비롯한 다양한 무료 공연으로 지역 주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은 문화축제다.
스님은 포교당의 운영권을 신도들의 자율에 맡겼다. 더욱 깊은 믿음과 책임감을 건네 주기 위해서였다. 거창 포교당은 서서히 청소년들을 위한 창작 공간으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해내게 된다. 청소년들의 탈선을 막기 위해 50석 규모의 야간 공부방을 마련하고, 사진이나 그림, 시 등 본인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불교문화전시회도 개최한다. 불교 용품과 큰스님의 글씨를 전시 판매하여 남은 수익금은 지역 포교를 위해 소중한 자금으로 쓰였다.
스님은 그렇게 거창에서 1980년부터 1997년까지 17년이란 세월을 지내온다. 십칠 년 동안 그가 이룩해 놓은 불사는 지금까지도 교계에 매우 귀한 발자취로 남아 있다.
지금 스님은 해인사의 총무 소임을 맡아 큰절 살림살이를 돌보고 있다.
물론 이전이나 지금이나 총무원의 소임도 겸임을 해오고 있다. 여전히 스님은 지금의 상황을 언급하는 것은 가급적 삼가신다. 지금 해 나가는 일들은 나중에 평가받아도 결코 늦지 않기에. 다만 할 일을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에 간혹 낮은 한숨을 뱉는다.
해인사도 하루빨리 수행도량과 포교도량으로서의 제 역할을 해내기를 바라는 것이 그나마 읽을 수 있었던 스님의 생각이다.
몇 번을 우려낸 찻물을 다시 다기에 따른다. 시간 반이 지났음에도 스님의 목소리에는 별반 변화가 없다. 어느덧 오십을 훌쩍 넘긴 나이임에도 아직 스님의 얼굴엔 미소년의 기운이 남아 있다. 제 뜻도 모르고 열심히 경을 읽던 10대 후반 시절, 「금강경」의 한 구절에 이르러 그 찰나의 깨침을 당한다.
………(전략)
若是微塵衆이 實有者인댄
佛卽不說是微塵衆이니 所以者何오
佛說微塵衆은 卽非微塵衆일세.
약시미진중이 실유자인댄
불즉불설시미진중이니 소이자하오
불설미진중은 즉비미진중일세.
(후략)………
\"진리와 현상은 둘이 아니다…\"
스님은 이 구절을 조금 색다르게 해석하신다. 삼천대천세계를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영원의 세계에 비유하며, 우리가 살고 있는 점도 안 되는 이 지구는 언젠가는 없어질 먼지일 뿐일진데, 하물며 그 안에 갇혀 사는 인간이 가야 할 길은 어디이겠는가.
“불교는 바로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입으로 하는 것이 불교가 아니지요. 보고 배운 것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수행하고 공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님은 고요한 절을 원하지 않는다.
살아 숨쉬는 절, 어린 불자들이 뛰놀고 젊은 불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노보살들의 편안한 휴식처가 될 수 있는 살아 숨쉬는 공간, 바로 그 곳이 절이어야 한다. 지난 몇 해 동안 되풀이되던 조계종단의 불미스러웠던 일들을 떠올리며 스님의표정이 잠시 굳어진다.
“그러나 대부분의 스님들은 자신의 자리에서 제 갈 길을 열심히 가고 있어요. 왜 옥석玉石이란 말이 있잖아요. 수많은 돌 가운데서 옥 하나 순금 하나를 소중히 캐내듯 스님들의 어두운 한 부분만을 바라보지 말고 전체를 살필 수 있는 지혜로운 불자들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러나 당신 또한 제대로 스님의 길을 가고 있지 못한 것 같아 늘 마음 한 구석은 부처님께 진 빚으로 무겁기만 하단다.
선용스님. 그는 아직 멀고 험한 길을 걷고 있다. 아직 못 다한 일, 해야 할 일들이 그가 가는 길 중간 중간에 놓여 마치 징검다리처럼 그를 기다리고 있다. 머잖아 이 큰살림에서 놓여 나면 그 동안 눈여겨 보아둔 거창의 조그만 허름한 집을 인수하여 노인선방과 어린이집을 지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미약하나마 고단한 시절을 살아온 어른들과 미래를 이끌어갈 어린이들을 진정한 불제자로 만들고 싶은 뜻깊은 회향을 품고 있다.
스님은 이 땅의 불교가 이제는 청소년 포교에 더 많은 뜻을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젊고 유능한 스님들이 어린이와 청소년 포교에 더 많은 고민을 해 줄 것을 당부하기도 한다.
이대로 가다간 나라의 모든 분야에서 중심 인물이 기독교 일색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 대단하시다. 청소년은 이 나라의 희망이며 다음 세대를 이끌어갈 동력이기 때문이다.
스님은 언제나 대중과 함께 하는 진지한 출가자가 되고 싶다. 부처님의 토양에 아이들의 눈높이로 아이들의 세상(순수하고 정직한 세상)을 만들고 싶다. 그래서 스님은 아직도 꿈을 꾼다. 그리고 어서 그 꿈이 현실로 깨어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