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은 출가절이다. 부처님께서 삶과 죽음의 한가운데를 읽고, 그 너머를 찾아 왕국의 부와 권세를 홀홀히 떨치고 사문이 된 날이다. 출가란 버릴 줄을 안다는 말이다. 얻고자 하기는 쉬워도 버리려고 마음 먹기는 쉽지 않다.
길거리에서 이삿짐 트럭을 볼 때면 쓸쓸해진다. 직접 이삿짐을 꾸릴 때는 더하다. 어디선가 꾸역꾸역 쏟아져 나오는 그 잡동사니에 놀랍고 처량하며 화가 치민다. 사바에 목숨 하나 붙이고 사는데 이토록 많은 물건을 매달고 다녀야 하는 싶어서 말이다. 그 가운데 정작 필요한 물건은 반도 되지 않다. 언젠가는 쓰려니 하고 챙겨 가지만 결국 공간만 차지하는 천덕꾸러긴데 말이다. 이 출가절에 생활 주변을 정리하는 훈련을 해 보면 어떨까. 거창한 구호보다 주변의 짐부터 정리하는 작은 출가라도 해보자.
거실에 들어찬 어지러운 가구며 장식을 들어내고 밋밋한 벽면에 자세를 바로 하면 거친 숨이 잦아들며 등줄기를 타고 오르내린다. 코 끝에 호흡의 향기가 수줍은 듯 조용히 피어나는 것을 볼 것이다. 이런저런 물건이 어지러우면 실내의 공기가 흐려져 이 귀한 청향을 망치고 만다. 가장 잘하는 인테리어는 아무 장식도 들이지 않는데 있다. 꼭 있어야 하는 물건은 정성을 들여 가꾸고 길들여야 한다.
이즈음 재미 있는 소식 하나가 들린다. 현란하고 화려한 장식에 싫증난 사람들이 선의 이름을 달고 무채색과 단순미에 눈뜨고 있다. 이름이야 선이면 어떻고 젠이면 어떤가.
어째서 정신이 아니고 물질 쪽에서 상업화시키느냐고 화를 내지도 말자. 편안한 단색의 환경이 들뜬 심신을 식은 재처럼 불꺼진 향로처럼 가라앉히는 것을 도와줄 것이다. 문화는 다양한 코드를 함께 몰고 다닌다. 정신은 정신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그 신체를 갖고 있다. 풍류가 아닌 곳에 풍류가 있듯, 문화야말로 정신의 정직한 표현이다.
안팎은 구분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현란하고 신기한 물건들에 연연해 하는 것은 곧 그의 마음이 탁해져 있다는 표시이다. 마음이 탁해져 있으면 육근六根이 닿는 모든 것이 부패하고 변질된다. 마음과 몸이 어디 따로이겠는가. 행동은 매음굴을 드나들어도 마음은 청정하다고
도통한 흉내를 내서는 안 된다. 몸이 청정해야 마음이 청정할 수 있다. 마음을 닦는 길은 밥 먹고 잠 자는 일상의 거지擧止를 불에 덴 듯 삼가고 경계하는데서 출발한다. 선도, 정토도, 교학도, 의식儀式도 다 그 다음 이야기이다. 절간 마당까지 차를 타고 흙먼지를 날리며 다니는 스님을 나는 경멸한다. 그 흙먼지는 경건한 마음으로 산사를 찾아 간절한 희구와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에게 끼얹는 무참한 오물이다. 시대가 이토록 변했으니 차를 타지 말고 걸어다니라는 말은 지나친 주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심신의 안락과 편리를 스스로 사양하는 용기와 자제력이 없고서야 어찌 출가수행자라 할 수 있겠는가. 출가자든 재가자든, 혹은 산을 찾은 산행객이든 산문밖에 차를 세우고 계단을 걸어오르는 기본 예는 지켜야 한다.
부처님은 육신이란 가죽푸대에 싸인 부정不淨의 덩어리라고 하셨다. 지나친 말씀같지만 이 말에는 깊은 지혜가 스며 있다. 그토록 경계해야 한다는 말일 것이다. 마음이 몸을 다스리면 열반이지만, 몸이 마음을 다스리면 사바가 된다. 부처님께서는 마음 속에 미동하는 작은 욕망과 안일을 고양이가 쥐를 채듯 주시하라 하셨다. 인드리야 구티. 감관의 기미를 주의하지 않고 마음을 가는 대로 내버려 두라는 것은 외도外道의 사설邪說입니다. 태만과 안일이 방선이나 만행의 이름으로 호도되고, 도덕적 무감각이 무애나 해탈로 감각되어서는 천만불가하다.
도야 되지 않은 정신, 거친 심신은 나 자신 빛을 덮고, 너와의 만남을 가로막는다. 그것을 우리는 무명無明이라 부른다. 그로 인한 소외가 근대의 합리와 자본이 득세하면서 더욱 깊어졌다. 우리는 이익과 계산의 프리즘을 통해서만 사람을 바라보는데 익숙하다. 물질의 페티시즘이 횡행하면서 형이상학은 버려졌고, 영성과 종교는 낯설어졌다. 긴 고통과 슬픔이 세기의 하늘 위를 떠돌고 있다. 자아의 확대를 위한 분투, 그리고 그 좌절로 인한 분노가 뒤엉켜 내뿜는 혼탁한 공기가 숨을 턱턱 막히게 한다. 조계종사태는 바로 그 징후를 집약적으로 표출한 것이다. 그것은 불교계 안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 문명의 현재적 축약도이다. 그 현상이 어찌 어제 오늘의 일이겠는가. 부처님 당시에 이미, 아니 인류가 생존을 위해 사냥감을 찾고, 이웃의 수확물을 넘볼 때부터 이미 뿌려진 씨였다. 그런 점에서 역사적 사건이라기보다
실존적 조건이라 보는 편이 더 적절할지 모르겠다.
현대 불란서의 한 철학자는 인간의 모든 욕망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타자의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것은 아주 작고 여리다. 메추리는 연못의 물 한 모금이면 되고, 쌀벌레는 쌀 몇 톨이면 족하지 않은가. 인간이 내일을 위해 저장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그리고 남의 나의 뜻에 복종시키려 했을 때 부와 권력의 게임이라는 오랜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밖을 향해 내달릴 때 거기 나는 없다. 우리는 자신이 진정 누구인지 모른다. 더구나 진정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 기이하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의 일상적 행동은 대개 밖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지나간 업의 종자가 훈습薰習되어 다음 행行을 결정한다. 이를 어찌 나의 행동, 나의 생각이라 하겠는가. 불교는 이를 넘어 진정 자기이고자 하는 노력이다. 현세의 오탁을 몰고 오는 것은 타자라는 거울을 통해서 오는 욕망인 바, 그것
은 결코 채워질 수도 성취될 수도 없으며, 결국 너와 나를 함께 패망시키는 죽음의 행진일 뿐이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오랜 고행 끝에 들여다 보신 광경이다.
이 깨달음은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니련선하의 우유죽은 자신을 둘러싼 어둠과의 목숨을 건 전투의 피날레였다. 제발이지 그 전의 고행이 의미가 없었다거나, 외도의 그릇된 수행이었다고 잘못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성불하기 위해서는 수천억겁을 돌며 인연을 쌓아야 한다. 나는 불교가 득도得度라느니 성불成佛이라느니 깨달음이라느니를 무슨 이웃집 강아지 부르듯 입에 달고 다니는 사태를 심히 우려한다. 깨달음은 독좌대웅봉獨坐大雄峰의 뼈를 깎는 영웅들에게만 예외적으로 조심스럽게 붙여지는 귀한 이름이어야 한다. 성스러운 언사는 비밀의 상자에 간수하여, 아무나 쉽게 들여다보게 해서도 안되고, 함부로 입방아를 찧게 해서도 안 된다.
그럼에도 깨달음은 그분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도 일상의 경험 속에서 크고 작은 이치를 깨달으며 삶을 이끌어 가고 있다. 깨달음은 점진적으로 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한꺼번에 오지 않는다. 세상을 보는 눈도 삶의 깊이와 더불어 오는 것이거늘 일체를 아는 위대한 지혜가 어떻게 하루 아침에 문득 올 수 있겠는가. 자동차를 운전하거나 컴퓨터를 다룰 때처럼 그 기술은 노력과 훈련을 통해 차츰 익숙해져가는 것이다. 한소식 했느냐 아니냐로 모든 것을 재단하는 흑백의 풍토를 버리자. 그 기준 대로라면 중생인 우리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부디 단박의 깨달음에 조급하지 말자. 그것은 정말 고약한 욕심일 수 있다. 일상의 삶을 돌아보고 주변의 이웃에 손을 내밀자. 삶의 영역은 다양하고 부처님의 약 상자에는 수많은 약이 들어 있다. 각각의 분야에서 한 발 앞선 선지식이 뒤쳐진 학인들을 지도하고, 필요한 것을 줄 수 있도록 격려하자. 우리 모두는 누구나 스승이면서 동시에 학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