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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와 가출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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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원철 2000년 03월 217호
지난 겨울에는 갓 출가한 행자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여름에 ‘실상사의 두 행자’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방영된 뒤 ‘스타 행자’는 결국 둘 다 가버렸다. 그래도 관람객들 중 심심찮게 그 행자들의 근황을 묻고 또 관광(?)하기를 원하는 이가 더러 있었다.
남아 있는 행자 몇 명과 파적破寂 삼아 한마디 던졌다.
“출가와 가출의 차이가 무엇일까?”
“출가는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집을 나오는 것이고, 가출은 집을 나오는 것 자체가 목적입니다.”“출가는 허락을 받은 것이고, 가출은 허락 없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면 부처님은 허락받고 나오셨나? 정주영은 현대가現代家를 이루었지만 자서전에는 어릴 때 소 한
마리 몰고 가출했다고 나와 있는데요.”
“시집 가는 것은 왜 출가라고 합니까?”
뒤죽박죽 그야말로 중구난방衆口難防이다.
스님네들이 모인 지대방에서 누군가가 ‘출가와 가출’을 화두로 던졌다.
순간 느슨하던 방 분위기에 갑자기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응! 그거 간단해. 가출한 사람은 입산할 때 국립공원 입장료를 내야 하고 출가한 사람은 그냥 들어와도 돼.”그만 폭소가 터지고 왁자지껄 야단이 났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해인사로 출가할 때 일이다. 매표소 거사님이 버스에 올라 차 안을 한번 훑어보고는 첫 자리부터 입장료를 순서대로 거두기 시작했다. 내 앞에 와서는 힐끗 보더니 그냥 다음 자리로 건너갔다. 하긴 ‘한식구 되려고 온 사람’ 정도는 알아 볼 수 있어야 수문장으로서 자격이 있는 게지. 그 비장하고 심각한 순간에 입장료 몇 푼에 ‘출가하려고 왔는데요.’라고 했다면 나의 출가본사와의 첫 인연이 얼마나 폼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보니 그만 피시익 웃음이 나왔다.
출가나 가출이나 집을 나오는 것은 똑같다. 하지만 부처님께서 집을 나온 3월 13일(음력 2월 8일)을 ‘가출일家出日’이라고 하지 않고 ‘출가일出家日’이라고 하여 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져 보면 절집에서 ‘출가냐? 가출이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절 집안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더 관건이 되기 때문이다. 설사 시작이 가출일지라도 다시 발심發心한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출가로 바뀌는 것이다. 일주문 밖에서 발심을 하든지 일주문 안에서 발심을 하든지 간에 시간상으로 전후前後가 있을 뿐이지 그 가치에 있어서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결국 ‘다시 발심했는가?’의 여부에 따라서 가출과 출가가 결정되는 것이다. 설사 일주문 밖에서 발심하여 출가를 했더라도 일주문 안에서 ‘재발심再發心’ 하지 못하면 그것은 불가佛家에서 다시 가출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발심이란 순간적인 ‘말뚝 신심’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한 상태인 ‘현재진행형’을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루에도 수십 번 ‘가출했다’가 ‘출가했다’가 하는 것이다.
일주문 안에서도 출가와 가출 사이에서 늘 자기와의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부처님의 가출이 출가가 된 것은 ‘출삼계가出三界家’ ‘출윤회가出輪廻家’ 했기 때문이다. 결국 궁극적인 출가는 삼계가三界家에서 벗어나는 것이요, 윤회가輪廻家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출은 출가로 불리는 것이다. 영원히.
우리의 출가가 참으로 영원한 출가되려면 끊임없이 자기를 돌아보고 점검해서 날로날로 발심해야 할 것이다.
우바리존자가 당부한 ‘해야 할 것(應作)과 하지 말아야 할 것(不應作)을 똑똑히 구별하면서 가야만 할 길을 가는’ 그런 일상이 될 때 출삼계가出三界家 출윤회가出輪廻家의 출가로 먼훗날 우리에게도 이름 붙여질 것이다. □
이 달의 이야기/새벽을 여는 이에게
우리도 부처님같이, 그 불심의 표현 양식
홍윤식/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장

「해인」 편집자에게서 “우리도 부처님같이, 출가에서 열반까지”란 제목으로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나는 고민한 끝에 우선 부처님의 출가에서 열반까지의 생애가 지니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였다. 그 결과 먼저 부처님의 팔상八相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부처님의 출가에서 열반까지의 생애는 팔상의 전체적인 의미에서 파악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을 팔상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을 팔상도八相圖라고 하는데, 이는 위魏나라의 길가야吉迦夜와 담요曇曜 두 사람에 의해 번역된 부법장인연전付法藏因緣傳 제1에 아사세 왕의 신하 우사雨舍가 국왕을 위하여 여래본행지도如來本行之圖를 그렸다고 하는 데서 전해진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회전繪傳이며, 마명馬鳴의 불소행찬佛所行讚보다 빠른 것이 되어 주목을 끌게 된다.
여래의 팔상은 명칭상으로는 경론상經論上에 다소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강도솔降兜率, 탁태託胎, 강탄降誕, 출가出家, 항마降魔, 성도成道, 설법說法, 열반涅槃으로 구분한다.
여기서 보면 석가모니 부처님은 처음부터 부처님이 아니었음을 잘 밝혀 놓고 있다. 즉 부처님의 일생은 하늘(天)과 사람(人)과 불佛의 3상三相에 의하여 성립되고 있는 것임을 팔상도는 잘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제 부처로서의 석가모니 부처님의 일생은 성도成道 이후의 3상이다. 이를 실수實壽에서 말한다면 불상佛相은 30성도설을 취하여 서른살에서 여든살까지의 오십 년 동안이 된다. 그리하여 부처님으로서의 석존은 서른살에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하고, 여든살에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실 때까지이다. 그리고 그 가운데 오십 년 동안이 설법 시대로서 이를 제자들이 결집해 놓은 것이 오늘에 전하는 불교 경전들이다.
예부터 불교 경전은 화엄경·아함경·방등경·반야경·법화경·열반경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경전을 부처님 팔상의 입장에서 보면 화엄경과 열반경은 부처님으로서의 생애에서 처음과 끝을 잘 나타낸 불심佛心의 현현顯現이라 할 수 있다. 즉 불심의 심화心畵인 셈이다. 한편 이들 양경전을 일체경전의 머리와 꼬리로 본다면 법화경은 참으로 불경의 복부腹部가 된다. 그리하여 이들 3대 경전은 불교 예술에서 중요한 소재가 되기도 한다. 즉 화엄경은 석존 성도의 불심을 나타내고 법화경은 전법륜轉法輪을, 열반경은 석존이 열반에 드신 불심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다.
한편 불교는 불佛을 나누어 법신불·보신불·화신불의 3신불 체계를 확립하고 있음을 본다.
여기 최후의 화신불은 진실의 불신인 법신·보신이 표현된 불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화신불이 가상假相의 불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불심佛心 표현의 시초가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물에는 처음이 있으면 반드시 끝이 있는 법이다. 따라서 형체를 지닌 가상은 기필코 마지막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하여 가상으로서의 화신불인 석가모니 부처님은 이윽고 80세를 일기로 열반에 드시게 되는 것이다.
그 때 석가모니 부처님은 스스로 자신의 입멸이 불심의 입멸은 아님을 나타내어 법신장불멸法身長不滅이라 하셨다. 이를 법화경에서는 상재영산常在靈山이라 하고 있음도 모두가 법신의 불멸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물은 그릇에 담아 타인에게 전해지고 타인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형상이 없으나 가상의 문자상에 이를 표현할 수 있게 되는 것과 같이, 불멸 후 곧바로 불심은 마하가섭과 아난 등에 의하여 경전상에 표현되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일찍이 이를 회화상에 그 상주常住를 나타낸 것이 앞에서 말한 여래본행지도如來本行之圖
곧 팔상도이다.
이상에서 부처님의 일생을 팔상으로 나누고 그 가운데 참된 불상佛相이라 할 수 있는 성도·설법·열반의 3상이 갖는 의미를 살펴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부처님의 생애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우리는 가상의 존재라는 깊은 인식이 필요하다. 그렇지 못하면 영원한 진리를 터득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출가의 참뜻은 유한성을 극복하고 영원성을 획득하는 데 있음을 깊이 성찰해야 한다. 이상은 모두가 출가 수행을 통하여 도달할 수 있는 고귀한 생명체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