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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불교 신행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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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의 방 - 서돈각 2000년 03월 217호
내게 딱히 불교 신행관이라든지 삶의 철학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그저 불교와 인연을 맺은 뒤로 내 나름대로 생활 속에서 작은 신행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불교와의 인연과 지금까지 살아온 내 생활을 얘기한다.

어린 시절, 그러니까 1920년대였고 일제시대였다. 나는 어느 날 우연히 신문 한 켠에 실린 조그마한 관세음보살님의 사진을 보고는 그만 무엇에 이끌린 것처럼 그 신문을 오려서 간직하게 되었다. 그 뒤 그 사진을 책상에 모셔놓고 날마다 절을 올렸다. 그 때 내 나이 아홉살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신앙생활은 집 서재에 마련한 불단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아침마다 예불과 독경 그리고 108배를 올리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금은 관절에 무리가 간다 하여 108배를 다 채우지 못하고 있다. 일찍이 어머니는 나를 잉태하신 뒤 김천에 있는 황악산 직지사를 찾아 지극 정성 기도를 드렸다고 하셨다. 이 때부터 이미 불교와의 깊은 인연은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부처님을 집안에 모시는 것은 우리 불교의 독특한 자랑이다. 나는 우리의 실생활과 가장 가까운 존재가 바로 부처님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가장 가까운 곳에 부처님을 모시고 늘 발원하고 기원하는 것이야말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상의 복덕이다. 물론 집에서 법회를 본다고 해서 절에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 동안 나는 대학에서의 법학 강연이나 직책상의 업무도 중요하게 여겼지만 때때로 짬을 내어 부처님의 성지를 답사하고 철마다 전국의 사찰을 참배하여 큰스님들을 친견하고 또 그분들의 법문을 듣는다. 이것은 내 신행생활에서 절로 환희심을 일으키게 하는 즐거운 일이다. 이 기회를 통해 많은 감화를 받게 되고 또 생활에 새로운 힘이 되곤 한다.
이렇듯 평생을 불佛, 법法, 승僧 삼보의 둘레 속에 부처님의 가호로 살고 있는 내게는 많은 스님을 친견할 기회가 있었고 그런 만큼 존경하는 스님도 많이 있다.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영향을 받은 분으로 조계종단과 태고종단의 종정을 역임하신 두 분이 계시다. 한국 불교사에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선승禪僧으로 우뚝 서 계신 성철 큰스님과 나의 서재에 사진을 모셔 놓고 늘 그리워하는 박대륜 큰스님이시다.
성철스님과의 만남은 몇 차례 있었지만 내가 특별히 기억하는 것은 대불련 학생들을 인솔하고 해인사로 찾아뵈었을 때이다. 공부하는 사람을 소중히 여기셨던 스님께서는 “부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중생이 본디 부처임을 가르쳐주기 위해서이다”라고 우리의 불성을 일깨워 주는 법문을 해주셨다. 그 말씀은 지금까지도 내 신앙 생활의 근간이 되고 있다. 대륜스님 역시 법륜사에서 처음 뵈었는데, 마치 오랜 스승과 제자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불교의 기초부터 아주 상세하고 자상하게 가르쳐 주셨다. 스님은 산간 불교에서 도시 불교로 한국 불교의 폭을 넓히며 진속眞俗이 불이不二라는 대승大乘의 가르침을 철저히 실천하고자 하신 분이셨다. 더구나 대륜스님께서는 태고종을 창건하여 초대와 2대의 종정을 역임하셨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스님 자신은 청정 비구셨다. 나는 이 점에 더욱 감명받지 않을 수 없다. 두 분 모두가 열반에 드신 지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도 날마다 아침에 예불을 올릴 때면 큰스님의 훈짐이 저절로 느껴진다.

나는 재가불자지만 무엇보다도 예불禮佛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출가자나 재가자 모두에게 예불이야말로 수행의 본보기이기 때문이다. 많은 큰스님이 수행의 기본으로 예불을 강조하고 엄격히 가르치는 까닭도 여기에 있으리라. 앞서도 언급했듯이 나도 날마다 예불을 모시고 108배를 해오고 있다. 젊은이들이라면 매일 예불과 함께 108배를 하는 것이 운동 부족을 염려하여 도장을 찾는 것 이상으로 뜻 깊은 일이 될 것이다. 반드시 108배를 채우지 않더라도 자신의 근기에 맞게 수행을 생활화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제 선禪은 멀리 있지 않다. 전 세계적인 추세를 보더라도 선은 이미 불교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일반화되어 있는 생활 속의 수행법이다. 그 동안 전통 선원에서 눈푸른 납자들의 정진으로만 여겨지던 선수행이 최근 들어 도심 포교당을 중심으로 출가자는 물론이고, 불자 및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보편화되어 가고 있다.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서 치열한 경쟁으로 몸부림치는 현대인들에게 자신을 돌아볼 수 있도록 하는 선을 통해 불교를 더욱 친숙하게 포교한다는 점에서 퍽 고무적인 일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붐을 타고 선이 불교 수행의 전부인 것같이 홍보하는 일은 삼가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근래 들어 불자들의 신행이 점점 형식화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다.
개인적인 입장에서 보면 불교를 처음 접하는 초심자들이나 연만한 분들에게는 좌선 수행보다는 염불 수행이 오히려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노약자나 환자들 중에도 선수행을 통해 심신을 단련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다. 이들에게 오래 앉아 있게 되는 좌선은 여간 고통이 아닐 수 없다. 불자가 아닌 사람들도 쉽게 불교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다양한 수행방편을 개발하는 것도 필요하다.
옛 사람들은 “학자는 학문을 닦고 농민은 농사를 짓고, 남녀귀천을 막론하고 각자의 직업에 충실하는 일이 불교를 믿는 마음이다. 이러한 참마음은 한마음으로 수행하는 데서 이룩된다. 진심이 곧 한마음이다. 한마음으로 열심히 하는 일을 비난하는 자는 없다. 어떤 직업이나 목표를 정했을 때도 한마음이 아니고는 성사되지 않는다. 불교의 신심도 마찬가지다”라고 수행에 대해 정의하고 있다. 결국 이 말은 누구나 마음이 성실하고 도리에 어긋나지 않으며 끊임없는 수행으로 자기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흔히 선과 염불이 전혀 다른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가령 염불을 몇 백 번이고 계속해서 하면 일종의 삼매경지인 염불삼매에 들게 된다. 그렇게 되면 좌선으로 몰입하여 삼매경에 드는 것과 경험상으로는 마찬가지이다. 염불삼매 역시 깨달음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생활화란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서 살고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행하는 것이다. 무엇이든지 일심으로 정진하면 불가능은 없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