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율을 지키는 일(持戒生活)은 자신의 마음을 깨끗이 하고 싶다는 자각에 의해 일어난다. 그런데 우리가 그러한 마음을 가진다 하더라도 계율을 지키는 일은 쉽지가 않다. 계율을 지키려고 생각을 해도 우리의 생활에서는 그대로 할 수가 없고, 계율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깨뜨리지 않을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예를 들면, 파리나 모기를 전혀 죽이지 않고 생활할 수도 없지만, 그러나 어떤 벌레라도 죽는 것을 바라지는 않는다. 또 우리의 각박한 삶의 현장에서는 다른 사람을 짓누르고라도 좋은 지위를 얻으려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는 반드시 계율을 지켜야 한다고 하는 하나의 원칙을 철저하게 세우면 그런 가운데 우리 인생의 모순과 생존 경쟁을 피할 수 없다고 하는 인생의 진실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세속의 삶에서도 계율을 무시해서는 인생의 진실이나 생활의 참모습을 파악할 수 없다.
우리가 참다운 생활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더라도 어떻게든 그런 모순에 직면하게 되는데, 거기서 계율을 지키는 생활은 반면에 참회하는 생활로도 되는 것이다. 계율을 실행하려고 생각해도 그대로 될 수 없는 데에서 참회가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계율에 대한 철저한 자각을 가지고 있으면, 범계犯戒를 하면서도 동시에 그 범계가 불도 수행의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계율에 대한 철저한 자각이 없는 행위에는 참회라고 하는 것이 없다. 예를 들면, ‘인간은 어떻게든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든지, ‘거짓말도 방편이다’ 하면서 거짓말을 긍정하면 참회라는 것은 나오지 않는다. 반면에 거짓말은 절대로 안 된다고 하는 원칙을 확실히 세워 두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지켜지지 않는 데서 참회라고 하는 문제가 나오는 것이다. 그 때는 계율을 깨뜨리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맑히는 하나의 수행의 의미를 가지게 된다. 그런데 진정한 참회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단지 사회·윤리적으로 또는 법적이나 도덕적으로 잘못한 행위에 대하여 반성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세속의 삿된 가치 속에 휩싸여 정신 없이 쓸려 다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삼보에 귀의하여 불자가 되는 삼귀의례는 먼저 자신의 지난날에 대한 참회에서 시작된다, 아만과 아집에 가득 찼던 자신을 겸허하게 돌아보고 자신의 잘못된 삶과 어리석음에 대한 반성, 앞으로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올바로 살아가겠다는 다짐, 이것은 불교 신행의 첫걸음이며, 신행 생활의 핵심이다. 우리는 몸과 입과 마음으로 온갖 업을 짓고 있거니와, 우리의 삶에 고통의 과보를 가져올 업을 죄업이라고 한다. 이 죄에 대한 응보는 누군가 심판자가 있어서 벌을 주는 것이 아니다. 다만 자신이 지은 업의 힘에 따라 자기 스스로 받은 것일 뿐이다. 죄업은 누구도 대신하여 받을 수 없는 것이며, 오직 자기 자신만이 받게 되어 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많은 죄업을 짓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이 잘못인지 모르고 사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므로 우선 잘잘못을 부처님의 계율의 말씀(율장)에 비추어 확실히 알아야 하며, 뿐만 아니라 자신이 모르고 지어 왔던 죄업과 무지에 대해서도 참회를 해야 한다. 인생을 살다 보면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스스로 잘못을 짓지 않기란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범계를 했거나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스스로 잘못을 반성하고 다시는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겠다고 결심해야 한다. 문제는 간혹 우리가 잘못을 범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합리화하는 데 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참회하지 않은 채 도리어 그것을 합리화하려는 자세는 진실 되고 맑은 삶을 향한 전진이 아니라, 현실에 안주하는 자세로 퇴보할 뿐이다. 이것은 진실한 신행인의 자세가 아니다.
세속을 떠나 출가해서 사는 수행자들은 계를 범할 기회가 적겠지만, 세속에서의 생활은 계를 범할 기회가 훨씬 더 많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청정한 계행도 중요하지만, 범계에 대한 뉘우침을 통해 세속 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올바르게 살려는 자세가 불자들에게는 더욱 중요한 것이다. 참회의 참다운 정신은 잘못의 뉘우침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참회가 잘못을 시인하는 것에서만 끝난다면 이 또한 잘못의 합리화에 불과할 것이다. 날마다 같은 행동에 대해 같은 반성과 뉘우침을 하면서도 실제 생활 속에서의 행동에는 변화가 없다면, 이것은 또 하나의 기만적인 신행일 뿐이다. 진정한 참회의 힘은 다시는 그런 잘못이 없도록 행동의 변화를 일으키며, 진정한 참회는 사람을 새롭게 태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참회를 해야 자신의 행동에 변화가 일어나 다시는 잘못이 없게 할 수 있는가? 먼저 우리는 왜 그것이 잘못인지를 부처님의 계율에 근거하여 눈에 보이게 규명해야 한다. 그리고 잘못을 저지르게 된 원인까지 확연히 깨닫게 될 때에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자신이 범계를 했을 때 받게 되는 고통과, 계행을 청정히 했을 때 얻어지는 커다란 기쁨이 명확히 밝혀져서 가슴에 깊이 와 닿게 될 때, 다시 범하기 쉬운 잘못조차도 미리 깨닫고 조심해서 다시는 짓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끊임없이 반성하는 생활까지도 반성하여 올바른 삶에 대한 확신이 설 때만이 비로소 진정한 참회가 된다.
물론 참회를 한다고 해서 자신이 과거에 지은 죄과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참회를 하면 죄업으로 인해 생기는 과보의 고통을 막을 수가 있다. 과거의 죄업은 끊임없이 새로운 죄업을 요구하고 수렁으로 빠져들게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죄업의 무서움은 육체적인 고통이나 정신적인 고난을 주는 과보로써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죄업을 짓게 하려는 어두운 업력이 소멸되는 것이며, 나아가 선업을 지음으로써 과거에 지은 업보들을 막아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잘못을 저지르고 나서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심하면 ‘나는 가망 없는 무능력한 존재다’는 식으로 자포자기에 빠지거나, 인생이란 어차피 실수의 연속이 아니냐며 자신의 잘못을 가볍게 흘려 덮어두려 한다. 이것은 자기 주체성을 회복해 참된 행복을 찾아 나가는 불자들의 올바른 삶의 자세라 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잘못이 많고 적음이 아니라, 잘못을 발견하는 즉시 스스로 그것을 인정하고 고치기 위해서 노력하느냐 하지 않느냐이다. 자신의 허물을 살펴보고, 발견하는 즉시 그것을 개선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바로 수행이다. 또한 그렇게 잘못을 하나하나 고쳐 나가는 과정에서 우리의 삶은 더 행복해지고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노래가 전해진다. 처음에는 악한 짓을 했지만/그러나 뒤에 가서 선행으로/그 악행을 극복하는 사람/그는 이 세상을 비춘다/구름을 헤치고 나오는 저 달처럼. □
석혜능 스님은 동국대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해인율원과 영산율원에서 율학을 연찬하였다. 지금은 행자교육원 교수사와 해인총림 율원에서 율원장으로 있다. 역서로 「사미학처」「교계신학비구행호율의」「대비구삼천위의」「재가자를 위한 계율과 수행」「반야이취경 강해」「바른 가르침의 흰 연꽃-범화경」. 논문「포살건도」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