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수행의 안목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열어 주는 것’이 선의 존재 이유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해인리포트 - 편집실 2000년 02월 216호
교통과 정보, 통신의 발달은 공간과 시간의 개념을 바꾸어 놓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의 반대편에서 일어난 시시콜콜한 사건도 같은 시간에 안방에서 듣고 볼 수 있다. 한 세대 전에 상상으로만 그리던 일들이 현실이 되었다.
거대기업과 자본의 지구적인 지배는 보편화되어 있다. 신자유주의의 기치에 따라 기업의 상품과 자본의 이동은 국경을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무한경쟁과 경쟁에서의 승리가 최고의 가치가 되었다. 무한경쟁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웃’으로만 여기지 않는다. 경쟁의 대상이며, 상품을 소비해 부를 늘려 주는 고객일 뿐이다.
상생相生의 원리가 존재한다면, 그 전제는 상품이며, 소비이며, 교환이다.
거대기업과 자본이라는 우산 밑의 조직은 대체가능한 자원으로서의 인간만이 대접받는다.
기업과 자본조직의 구성원은 언제든지 대체 가능하다. 산업예비군은 줄을 서서 조직 내의 구성원이 어서 대체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조직 내의 구성원은 창밖에 줄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며 딴 생각 품지 않고 모니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기에 골몰하고 있다.
과학기술의 발달이 인간을 질병으로부터 구해내고, 산업현장의 위험으로부터 구해내고, 쾌적한 환경을 보장하고, 공간과 시간의 단축으로 더욱 편안한 삶을 보장한다는 광고 전단의 카피 같은 낙관적인 미래관의 일부는 사실이 될 것이다. 특히 인간을 질병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에게 더 없는 축복의 메시지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그 혜택이 누구에게나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혜택이라는 것이 언제나 그랬듯이 사회적 약자에게는 늘 비껴 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산업현장으로부터의 안전은 인간을 산업현장에서 멀찍이 떨어뜨리는 결과와 함께 진행된다는 점에서 누구에게나 반가운 소식은 소식은 아니다. 공간과 시간이 단축된 만큼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사람들 또한 대다수의 것과는 거리가 멀다. 미래의 어두움과 밝음은 동시적이다. 인간의 행복도와 과학기술의 발달은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
몸 밖의 몸인, 우리의 생존의 터전인 자연도 더 이상 자연, 말 그대로 ‘스스로 그렇게’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익을 부풀려주는 도구가 된 지 이미 오래다. 구멍 뚫린 오존층이 보내는 경고에 대해 과학기술의 신봉자들은 그들의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때가 도래했다고 노래하고 있다.
드리마일 핵방사능 유출 사고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핵발전소 자체가 위험은 것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만에 하나 사고가 발생할 경우, 핵발전으로 인해 얻는 편안함을 송두리째 돌려줘야 하는, 아니 되로 받고 말로 주는 격으로 우리의 목숨을 내어줘야 한다.
최근 보도에 따르면, 화학공장이 많은 울산에서는 시 당국이 주민들에게 방독마스크를 지급할 계획이라고 한다. 어느 날,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면 급히 가방을 열고 마스크를 꺼내 쓰고, 휴대폰으로 가족의 안부를 묻는 끔직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아니면, 몇 년 전 전남 광양의 한 마을처럼 정들었던 이웃들과 헤어지고, 삶의 일부였던 산과 나무들과 헤어져 새로운 삶터를 찾아나설지도 모른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는 정보 통신 교통의 발달이 상징하듯 ‘빠름’이다. 빠름은 나와 나를 조건 짓는 세상과의 조화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다. 행복은 나와 나를 둘러싼 온갖 것과의 조화로운 관계이다.
교통 정보 통신의 발달이 우리를 행복하게 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과학기술에 있지 않다.
현대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기를 문제 삼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대체 가능한 존재인 현대인은 자기를 문제 삼을 정신적 시간적 여유를 이미 빼앗겼다. 격렬한 변화의 속도와 대체품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나’를 빼앗긴 것이다. ‘나는 행복한가’ ‘나는 누구인가’ 라고 묻는 나와 대면하지 않고 있다.
밥상을 가운데 놓고 따뜻한 저녁을 먹으며, 편안하게 텔레비전을 보는 가족의 풍경에는 자기를 문제 삼지 않는, 마스크를 써야 하는, 대체재로의 나, 속도에 기는 우울함이 깃들어 있다. 밀쳐낼 수 없는 현실이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야 한다. 그것도 잘 살기 위해서 2000년이라는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살아내야 한다.
새해 교계신문들은 잘 사는 방법으로서 불교, 특히 선禪을 제시하고 있다. 신문마다 4면 이상을 ‘21세기 인류정신문화의 대안은 선’(현대불교신문)이라고 선언하는가 하면, ‘새 천 년 대안, 왜 불교인가’(불교신문) ‘선사 상으로 여는 21세기’(법보신문)라고 묻고 답하고 있다. 현대불교신문은 “광통신망으로 온갖 것이 오가는 초고속의 시대에 하릴없는 듯 가부좌를 하고 있음은 무엇인가. 빠름에 맞서는 최상의 방법은 정靜에 있다는 역설. 자부정이며, 세계에 대한 부정이다. 큰 바다를 건넘은 바람과 물결과의 맞섬이었다가 마침내는 바람과 물결을 타는 것이듯, 역설과 부정을 통한 대긍정에 이르는 항해를 시작한다”며 ‘선과 21세기’ 연중기획을 시작했다.
교계신문들의 선에 대한 관심은 새삼스럽지 않다. 선이 불교수행의 최상승법이니 교계신문의 관심은 당연하다. 하지만 새로운 삶의 방식과 태도를 요청하는 시기이므로 눈길이 멈추지 않을 수 없다. 외부의 변화가 격렬할수록 안을 돌아봄은 생명 있는 것들의 본능이다. 안과 밖의 긴장 그리고 안으로의 회귀, 여기에 선이 놓여 있다. 동굴 속의 어둠이 주는 팽팽한 긴장, 멀리 빛이 쏟아지듯 선이 있는 것이다.
선에 대한 관심은 교계 안에 한정된 현상이 아닌 듯하다. KBS는 선 3부작을 방영하기로 하고 막바지 작업중이다. 청규, 선지식들의 살아 있는 가르침, 오랜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우리나라 선방의 치열한 구도정신도 시청자들에게 전해준다. 제작팀은 미국과 일본 중국은 물론 멀리 동구라파의 헝가리의 선방까지 찾아 선열풍을 필름에 담았다. 숨막힐 듯한 현대의 상황을 반전시킬 방안으로 선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헝가리 출신으로 94년 미국에서 숭산스님 문하로 출가, 통도사에서 비구계를 받은 청안스님의 예측, “앞으로 사람들의 일상 속에서 명상수행의 역할은 증가될 것이다. 불교는 전세계로 퍼져나갈 것이며, 그것은 분명한 일이다”는 말이 아니어도 선이 세계적 관심인 것은 분명하다. 서양인들이 온전히 선의 세계 안으로 들어오든, 그들의 한계를 돌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선을 차용하는 것이든 상관없이 선은 하나의 물줄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서양인들이 선에 이끌린다고 해서 우리 한국불교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한국의 선불교다.
“불교사상은 대안사상이 될 가능성이 가장 많습니다. 그런데 현실의 불교도나 스님들이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다른 사람들은 불교를 대안 체계로 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는 박이문 교수(포한공대·철학, ‘불교신문’ 지관스님-박이문교수 대담)의 말은 한국 선불교에 던지는 할喝에 다름 아니다.
“21세기를 특징 짓는 정보화시대의 핵심 요소는 아이디어와 감수성. 다시 말해 창의력과 직관력이 정보화의 핵심이다. 선수행으로 바로 이를 창출해내는 문턱이자 근본”(이은윤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법보신문’ 선사상 으로 여는 21세기)이라며 선을 갈구하고 있다.
그렇다면 “수행의 안목에 기반해서 현실을 해석해내고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제시해야 한다”(‘현대 불교’ 신년좌담) 한국 선불교의 존재 이유이며, 현대인들이 선에 던지는 화두이다.
선의 근본정신이 안으로의 회귀에서 밖으로의 회향이듯, 끝내, 문제는 한국의 선불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