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가사유상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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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을 위한 동화 - 정호승
2000년 02월 216호
신라 때 금을 잘 다루기로 소문난 한 젊은 금장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석불사에 안치할 부처님을 금동으로 만들라는 왕명을 받았습니다. 여인들의 귀걸이나 팔찌 따위의 장신구를 만들던 금장이로서 부처님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은 더 없는 영광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크게 한숨부터 내쉬었습니다. 한번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부처님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자 두려움부터 앞섰습니다. 그저 지금까지 해오던 것처럼 장신구나 만들며 평범하게 살고 싶었으나 왕명이라 거절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의 한숨소리는 나날이 커져갔습니다. 하루는 그가 너무 한숨을 크게 쉬자 그의 아내가 무슨 일 때문에 그리 한숨을 쉬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사실대로 말했습니다.
“도대체 어떤 부처님을 만들어야 할지도 모르겠소. 귀걸이나 만들던 나로서는 이건 너무나 엄청난 일이오.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그의 아내는 아무 말없이 그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다가 이튿날 그에게 집을 떠나보라고 권했습니다.
“이대로 집에 계시면 아무래도 새로운 마음을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 집안 걱정은 하지 마시고 집을 떠나 부디 새로운 마음의 눈을 떠보십시오.”
그는 아내의 말대로 길을 떠났습니다. 어디든 발길 닿는대로 우리나라 방방곡곡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정처가 없다는 것은 참으로 마음이 편안한 일이었습니다. 어떤 날은 절벽 위 노송 아래에 앉아 하루종일 바다를 바라보았으며, 또 어떤 날은 산사에 들어가 풍경소리를 마음을 맡겼습니다.
그는 마음이 평온하고 고요했습니다. 햇살에 몸을 맡기고 바람에 마음을 맡겼습니다. 일찍이 그런 평화를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작 어떤 부처님을 만들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날이 갈수록 그는 점점 지쳐갔습니다. 자기가 만들어야 할 부처님을 만나지 못하면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고 굳게 마음을 다지곤 하였으나 그 마음마저 곧잘 허물어졌습니다.
그런 어느 날이었습니다. 징검다리를 건너뛰며 개울을 건너는데 한 소년이 한쪽 다리를 포개고 턱을 괸 채 바위에 앉아 물끄러미 물속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물 속에는 조그만 피라미들이 놀고 있었는데, 피라미들이 노는 게 그리 재미 있는지 소년은 거의 미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개울가에 옷을 벗어 놓고 먼지에 찌든 손발을 씻으려고 하다가 그만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것은 그 동안 그가 찾고 있었던 부처님의 모습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옳거니! 바로 저 모습이야. 바로 저런 모습으로 부처님을 만들면 되겠군!”
그는 급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새벽마다 목욕 재계하고 마음 속에 그 소년의 모습을 그리며 부처님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연화대 뒤에걸터앉아 오른쪽 다리를 왼쪽 다리 위에 포개 얹고, 가볍게 숙인 얼굴을 오른손으로 괸 채 법과 진리의 세계를 명상하는 반가사유상 부처님의 형태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곧 문제가 생겼습니다. 부처님의 그 오묘한 깨달음의 미소를 구현해야 하는데, 아무리 소년의 얼굴을 떠올려도 그 미소를 구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더욱 더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정성을 다해 부처님의 미소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만들어도 그것은 그가 생각하는 진리의 미소가 아니었습니다.그는 부처님을 만들었다가 부수고 부수었다가 다시 만드는 일을 수년 동안 되풀이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되풀이 해서 만들어도 만들고 나면 꼭 평범한 한 인간의 미소로밖에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는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자연히 몸과 마음은 야위어갔습니다. 처음부터 할 수 없는 일을 맡았다 싶어 밥은커녕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습니다. 아예 포기해 버리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수없이 들었으나 왕명을 행하지 못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 차라리 죽음을 기다리자.
그는 모든 일을 손에 놓고 자리에 드러누웠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그의 머리맡에 와서 다소곳이 말했습니다.
“다시 한번 길을 떠나보시지요. 그 어딘가에 부처님의 미소가 있을 것입니다.” 그는 다시 아내 말을 따라 길을 떠났습니다. 한없이 세상을 돌아다니다 보면 이 세상 어딘가에 부처님의 미소가 있을 것 같았습니다.
부처님의 미소를 만나지 못하면 결코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세상의 길가에서 그대로 죽으리라.
그는 그렇게 굳게 결심을 하고 온 세상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돌아다녀도 부처님의 미소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햇빛이 반짝이는 나뭇잎 사이에도,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들판 어디에도 부처님의 미소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젊고 건강하던 그의 육신은 어느새 지치고 늙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제 병든 육신을 이끌고 어디로 다니는 것조차 힘들었습니다. 석불사 부처님을 만드지 못하고 길가에 쓰러져 죽는 것도 어쩌면 부처님의 뜻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그런 어느 봄날이었습니다. 그는 소년을 만났던 마을 앞을 느릿느릿 지친 걸음으로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 들판엔 개쑥이 돋고, 멀리 산언덕엔 바람꽃이 일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날따라 유난히 목이 말랐습니다. 시원하게 찬물 한 그릇 들이켜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습니다. 그는 눈에 띄는 대로 어느 집 사립문을 밀고 마당으로 들어섰습니다. 우물가에서 한 소녀가 물을 길어 쌀을 씻고 있었고, 봄볕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널마루에 앉아 한 노인이 이를 잡고 있었습니다.
“아가야, 나 물 한 모금 다오.”
그는 소녀에게 물을 청하였습니다.
소녀는 정성스럽게 바가지에 나뭇잎을 한 잎 띄워 떠왔습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군. 아가야 고맙구나.”
그는 얼른 물을 한 모금 들이켜고는 소녀에게 고마움을 표시했습니다. 그러자 널마루 양지쪽에 앉아 이를 잡고 있넌 노인이 그를 불렀습니다.
“이 보시오 영감님, 이리 와서 이놈들 노는 걸 좀 보시오.”
그는 물바가지를 든 채 느릿느릿 노인 곁으로 다가갔습니다. 노인은 잡은 이들을 널마루에 풀어 놓고 죽이고 있었던 게 아니었구려.”
그는 이를 데리고 노는 노인의 천진한 모습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일었습니다. 순간, 그는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다시 물을 먹으려고 바가지를 쳐다 본 순간, 물 위에 잔잔히 어리는 미소, 그것은 그가 평생 찾아 헤매던 미소 바로 그것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