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는 한학자 문하에서 한문을 익히고 있었다. 곧 정씨 성을 가진 왕이 나와 나라를 다스릴 거라는 할아버님의 확고한 믿음으로 과거시험에 대비하기 위한 공부였다.
해방 다음 해로 내 나이 열여섯일 때였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께 무조건 복종하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이유 없이 따르던 시절이었다.
고창의 대학자 밑에서 착실히 공부하는 나를 부추긴 건 중학교를 다니던 친구들이었다. 이미 과거를 치루는 시대는 지나갔으니 학교를 다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말에 일리가 있어 나는 출가 아닌 가출을 하여, 서울로 가서 고학을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고향인 고창을 떠나 정읍에 다다르자 벌써 노자는 떨어지고 말았다. 집안 살림이 넉넉하여 비둘기장롱 밑바닥에 깔려 있던 돈을 한 장 집어가지고 나와도 되었으려만, 어른의 허락 없이 돈을 쓰면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고 자랐던 터라 주머니에 있던 몇 푼이 금방 바닥이 났다. 새벽에 집을 빠져 나왔으니 아침과 점심을 굶어서 배는 고프고 노자는 떨어져 난감하던 차에 비구니 스님 한 분을 만났다. 큰절로 안내를 좀 해달라고 하자 스님께서 데려 간 곳이 정읍 내장사였다. 큰절에서 밥 먹고 심부름이라도 하여 용돈을 마련해서 다시 서울로 갈 생각으로 짐을 내려놓았는데 다시 짐을 싸지 않아도 되었으니, 그것은 순전히 새벽 도량석의 구슬픈 가락 때문이었다.
새벽 세 시, 도량을 돌며 토해내던 한 스님의 장엄염불이 내 마음을 휘어잡고 말았다. 그 한없이 가라앉아 청아하고 구슬프게 들리던 ‘화엄경 약찬게’, 그리고 쑥국새는 그 신새벽에 왜 그리 울어대던지, 열여섯 어린 소년의 가슴을 훑으며 뒤흔들던 그 염불송을 들은 그 새벽에 출가를 결심했다. 그렇게 절집 사람이 되었으니, 그날이 마침 부처님 출가일인 음력 이월 여드렛날이었다. 내 할아버님은 과거시험의 부활을 믿을 만큼 뿌리 깊은 유생이셨으나 부모님은 돈독한 불자였다. ‘금강경’을 지극 정성으로 외우고 ‘옴마니반메훔’을 늘 염하던 아버님을 따라 자주 절에 다니던 불연이 그렇게 문득 출가를 하는 데 깊은 역할을 했을 것이다.
행자시절을 보내고 계를 받은 내장사는 엄격하기 이를 데 없는 도량이었다. 그 무렵 출가에 뜻을 두고 들어온 행자는 공양주 한 해, 채공 육 개월, 차를 만들어 올리는 다각 육 개월, 모두 두 해를 보내야 계를 받고 정식 사문이 될 수 있었다. 절에 들어갔다 다시 나온다는 것은 곧 인생의 파멸을 의미했으니, 죽는 한이 있더라도 끝을 내야 했던 시절이었다. 행자는 두 해 동안 일체 ‘묵언’을 하되, 어른 스님이 하는 말씀에 ‘예’ 하고 그대로 실천하면 되었고, 어른의 꾸지람에는 ‘참회하겠습니다’ 외에는 어떤 변명이 있을 수 없을 만큼 엄격한 생활이었다. 글 그대로 온전히 ‘방하착方下着’을 하며 일체 딴 생각을 하지 않고, 그렇게 두 해를 보내고 나면 불공을 드리는 법에서부터 예불, 시식까지 완벽하게 익히고 신실한 사문이 될 수 있었다.
내장사의 법도가 그렇듯 엄중했으나 나는 행자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묵언을 지키지 못했다. 처음에 주지 스님과 삼직 스님의 말씀을 잘 듣지 않아 애를 태웠으니, 거기에는 까닭이 있었다. 할머님이 돌아가신 지 채 이레가 안 되어 집을 나왔던 터라 상복인 ‘중단의’를 입고 절에 들어온 게 출가에 문제가 되었다. 상복을 보니 예삿집 자식이 아님을 눈치 채고 스님들께서 집에 가서 부모님 허락을 받고 오라고 하였다. 유생 집안의 종손인 내가 집안의 허락을 맡고 출가를 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해서 그냥 출가를 하게 해달라커니 안 된다커니 실랑이를 하고 있는 것을 노스님께서 보시고 당신의 시자로 삼겠다고 나서 일이 쉽게 마무리되었다. 노스님은 다름 아닌 그 당시 교종의 대가이던 박한영 스님이었다.
노스님은 나이 어린 당신의 시자를 친손자처럼, 그리고 친구처럼 대하며 정을 듬뿍 주셨다. 스님께선 ‘초발심자경문’을 말씀으로 가르쳐 주었고 나는 노스님 곁에서 경전을 한문으로 읽곤 했다. 노스님께선 이런 저런 당신 얘기를 많이 해 주었고, 나 또한 옛날 마실에서 어른들께 들은 얘기나 마실에서 지내던 얘기를 많이 해 드렸는데, 내 얘기가 들을 만했던지 여든에 가까운 연세에도 어린아이처럼 파안대소를 하곤 하셨다. 노스님의 공양상을 세심히 챙기는 일에서부터 측간에 모시고 가는 일, 목욕을 시켜 드리는 일이 내가 하는 일이었다. 저녁에 주무실 때도 나를 꼭 품고 주무셨는데, 그 시간에 누가 시킬 일이라도 있어 나를 부르기라도 하면 혼짝이 나곤 했다.
노스님의 나에 대한 사랑이 이러했으니 내가 다른 행자들에 비해 겁이 없었을 것은 당연지사였다. 내 하는 양을 보려고 했던지 하루는 주지 스님께서 불러서 풀을 좀 뽑으라고 했다. 뿌리가 깊고 질겨서 뽑히지 않는 ‘독사기’라는 풀이었다. 감히 행자로서 주지 스님 말씀에 무슨 이유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겁 없던 행자는 대꾸하지 않았던가?
“주지 스님은 겁나게 미련해요. 이것을 어떻게 뽑아요. 삽으로 떠서 엎어야지.” 허허, 기막혀 하던 주지 스님 얼굴이 지금도 또렷하다.
가 없는 사랑을 주시면서도 노스님께선 내게 일상의 자잘한 법도까지 일일이 가르쳐 주심을 잊지 않으셨으니 사문의 본분사는 물론 반듯한 인간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셨던 것이다. ‘남의 말 절대 하지 말 것, 금전을 속이는 일 없을 것, 양반 상놈 가림 없이 평등하게 대할 것, 길을 갈 때는 옆을 보지 말고 앞만 보고 갈 것 등이었다. 심지어는 목욕탕에 가서는 비누로 먼저 몸을 닦고 탕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씀까지 했다.
노스님을 정성껏 시봉한 탓인지 나는 남들이 두 해를 꼬박 채워야 했던 행자 생활을 육칠 개월 만에 마치고 계를 받았다. 그 당시로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은 셈이었다.
무엇보다도 당신의 어린 시자를 ‘진리인’으로 키우고 싶어 하셨던 은사 스님은 아주 오래 전 열반하셨고, 이젠 나도 나이 이른의 문턱에 다다랐으니 참으로 오랜 세월이 흘렀다. 돌이켜보면 부처님 법을 만나 수행정진의 기쁨으로 일생을 산 복된 날들이었다. 또 미력한 힘이나마 세상에 회향하려고 힘썼던 세월이었다.
아엠에프가 시작되고 이 곳 향림사에 부쩍 식구가 늘었다. 아이들을 버리는 부모가 많아진 것인데, 내가 아이들을 맡아 키우고 있으나 이렇듯 가정이 무너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아프기 그지없다. 가정은 사회의 중심이다. 가정이 파괴되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가만 보면 우리 사회는 국가도 사회도 병들어 죽어 가고 있다. 가정만이 유일한 희망이니 가정을 살려 사회와 국가를 일으켜 세워야 한다. 해서 나는 향림사 신도들에게 말하곤 한다. ‘부부지간’ 금슬 좋게 지내고, 부모님을 잘 모시며, 자식 교육 잘 시켜라. 그러러면 끊임없이 염불하라.’사실은 밖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 법대로 살지 않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님 법 바로 알려고 애쓰고 쉼 없이 염불할 일이다. □
정리/박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