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의 종교
책가방은 책을 넣기로 작정하고 만든 물건이기에 책 이외의 것은 넣기 어렵다. 때로는 학교에서 점심 뒤에 사과의 상큼한 맛을 즐기고 싶어도, 책 일 여섯 권이 쉽게 들어가는 가방이지만 사과 한 알을 허락하지 않아 즐기지 못한다. 억지로 쑤셔 넣어 보면 모든 책을 다 꺼내야 할 뿐만 아니라 가방마저 일그러져 버린다.
기독교는 바로 이런 종교다. 기독교는 교회와 예수와 하느님으로 만든 가방이다. 교회와 예수와 하느님으로 만든 가방에는 붓다든 공자든 무함마드든 결코 담을 수 없다. 물론 불자도 유자儒者도 무슬림도 담을 수 없다. 한국의 초등학생들이 가장 존경한다는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도 이 가방에는 담을 수 없다. 그들이 한국 사람들의 운명에 아무리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아무리 선량하다고 평가받더라도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 교회와 예수와 하느님과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교회와 예수와 하느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구원이 없다.
가방에 담을 수 없는 것은 버리고 갈 수밖에 없다. 기독자들은 왼 뺨을 때리는 사람에게 오른 뺨을 대주고 겉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속옷까지 내어준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가차없이 내던진다. 1618년 독일에서 일어난 가톨릭과 개신교의 싸움은 전자를 후원하는 오스트리아·스페인과 후자를 돕는 스웨덴·덴마아크·프랑스·네델란드·스위스 등으로 갈라져 삼십 년 동안 전 유럽을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이 종교전쟁에서 당시 독일 인구의 삼분의 일이 죽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이는 한 예에 불과하다. 그래서 불자들은 기독교를 끔찍한 피의 종교라고 생각한다. 순교殉敎를 위해서 자신의 피를 흘리고, 호교護敎를 위해서는 남의 피를 흘리게 한다는 것이다.
가톨릭은 하느님이라고 쓰고 개신교는 하나님이라고 표기한다. 기독교를 처음 공부하던 시절 하나님이라고 표현하다가 가톨릭 신자인 교수님께 혼쭐이 났다. 양쪽 모두 가방의 종교인 탓에 자기 가방에 맞지 않는 것은 사실 결코 포용하지 못한다.
보자기의 종교
보자기는 자기 틀을 고집하지 않는다. 됫박을 싸면 네모지고 수박을 싸면 둥글어진다. 설령 일부가 밖으로 비어질지언정 보자기는 어떤 것이든 싸서 끌어 안을 수 있다.
불교는 바로 이런 종교다. 불교는 새로이 만나는 종교와 문화를 거의 무차별적으로 수용해 왔다. 중국에 도착한 불교는 자연숭배와 함께 도교와 유교를 받아들였다. 중국의 불자들은 붓다와 함께 해와 달과 산과 물과 나무를 동시에 숭배했으며, 붓다가 전혀 근처에도 가지 않았던 조상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는 무속을, 일본에서는 신도神道를, 티벳에서는 본교Bon를, 동남아시아에서는 낫Nat 신앙을, 인도에서는 힌두교의 박티bhakti 신앙을 받아들였다.
불교에는 종교재판의 전통이 없다. 목숨을 빼앗아 가면서까지 자기 신앙을 강요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붓다의 가르침과 전혀 상반되는 신앙이라도 끝까지 수용하려 한다. 붓다가 명백하게 극구 제지했던 행위들을 붓다의 이름으로 천연덕스레 실행한다.
창시자의 가르침과 너무나 번연히 서로 모순되는 것들을 아무런 반성적 성찰 없이 한꺼번에 보자기에 쓸어 담는다. 칠성겭苑흟용왕 등 자연숭배가 그렇고, 무속숭배가 그렇고, 조상제사가 그렇다.
기독자들은 도대체 무엇이 불교이고 무엇이 불교가 아닌지 모르겠다고 비웃는다. 불교는 그저 방편이라는 이름 아래 남들이 좋다고 하면 무조건 끌어 모은다고 비판한다. 그렇게 끌어 모은 이질적인 것들은 동질성이나 조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혼돈과 모순을 이루고 있는 혼합주의일 뿐이라고 면박한다. 무속과 자연숭배와 뒤범벅이 된 불교는 뻥튀기 교환적 가피만을 기대하는 기복적 행태들과 어줍잖게 타협하고 있을 뿐이라고 질타한다.
가방과 보자기의 장단점
기독자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신앙과 불신을 분명하게 변별함으로써 기독교의 정체성을 명백히 한다고 자부한다. 세상에 진리와 진리 아닌 것이 존재하는 한, 자신의 신앙만이 유일한 진리임을 단호히 천명한다. 물론 뒤죽박죽 혼합주의의 불교는 어리석은 대중의 인기에 야합하는 기만술책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수용하고 거부하는 기준이 분명한 가방의 장점과, 모든 것을 한 데 뒤섞어 버림으로써 자신의 정체성마저 잃어버리는 보자기의 단점을 호되게 비판한다.
한편, 불자들은 의롭지 못한 인간도 신앙이 다른 인간도 모두 끌어안을 줄 아는 무한한 포용력을 지닌 불교야말로 유일하게 참다운 종교라고 자부한다. 자신의 신앙을 지킨다는 이유로 피를 부르는 가르침이 어찌 진정한 종교일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끌어 담을 수 있는 보자기의 장점과 자기 기준에 맞는 것만을 수용하고 그렇지 못한 것은 내쳐버리는 가방의 단점을 힐난한다.
그러나, 보자기의 장점만을 자랑하던 불자들은 붓다의 가르침을 변용變容시키다 못해 변질시켜 버렸다. 인도불교는 7세기에 이르러 힌두교의 박티bhakti 신앙을 턱없이 수용하다가 자기 정체성을 잃고 힌두교 속으로 함몰되고 말았다. 그것은 붓다가 명백하게 극구 제지했던 행위들을 아무런 반성적인 성찰 없이 불교의 이름으로 한꺼번에 쓸어 담았기 때문이다.
가방의 장점만을 내세우던 기독자들은 수많은 이웃에게 칼을 휘둘렀다. 기독자들은 내 앞에 선 네가 내게는 너이지만 그에게는 내가 너가 된다는 너무나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지 못했다. 그들은 사랑이 아니라 종교적 정의를 절대시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기독교는 책가방이 수박을 담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장점이 아니라 단점으로 인정해야만 한다.
교학이나 신학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장점과 상대의 단점만을 보려 한다. 자신의 단점에 침묵하고 상대의 단점에 핏대를 세운다. 그러나 종교학도는 가방과 보자기의 장점과 단점을 동시에 성찰한다. 종교학은 불자와 기독자들이 자신의 단점과 상대의 장점을 겸허히 인정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상대의 장점을 배워 서로가 향상向上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불교와 기독교는 서로 배울 점이 너무나 많다. 불교는 기독교의 가방다움을 기독교는 불교의 보자기다움을 배워야 한다. 역사가 아놀드 J. 토인비는 인류가 탐험할 가장 의미 있는 사상사적 미개척지가 남아 있다면 그 곳은 불교와 기독교가 만나는 곳이라고 예견했다.□
윤영해 님은 동국대에서 선불교를 공부한 다음 서강대에서 종교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동국대학교 불교사회문화연구원에서 Post-Doc 연구원으로 일하며 종교학을 강의하
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