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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화엄사 종걸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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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계삼소 - 김희균 2000년 02월 216호
서울의 천 년 세월은 직각의 바람 사이로 오고 갔다.
남은 건 가고 오는 상징의 수數가 있을 따름. 보신각 종성이 아니고서는 어디서 육백 년 남짓이나마 눈맞춤 하리.
그래도 꿈과 희망은 어디서나 피어나는 법. 사이버의 낯선 몸짓 속에서도 따스한 손길 부여잡는 사람 사람이 새삼 갸륵하고 어여쁘다. 천 년이여. 늘 이 아침같이만 한마음이소서, 절로 기도 올려진다.
서울을 뒤로 할수록 차창 밖 나목들은 여전히 침착하여 객마저 차분하게 한다. 시공을 나누고 공연히 분주한 건 사람뿐이다. 새마음이라 옷깃을 여미고 화엄사 일주문을 천천히 들어선다.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지리산 남쪽 자락의 화엄사. 금강문 천왕문 보제루를 거쳐 대웅전에 무릎 꿇고 각황전 앞에 서니 아하! 천 년, 또 그 앞 세월들이 고스란히 여기 고여 있구나. 지리산의 꽃이 되어, 실한 연밥처럼 점 박혀 들어앉아 법등 밝혀 온 전각들과 석물들. 「대화엄사 사적기」에 544년(진흥왕5)인도 스님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최근의 건물까지 시간의 띠 잇대어 천사백오십육 년 역사와문화를 이렇게 보전하고 있다. 유수한 시간의 조화로운 실체, 법의 내력이 장엄하다.
“좋은 말은 다른 사람들이 다 해서 나는 할 이야기가 없다”는 종걸스님을 뵌 것은 한 시간여나 기다린 뒤였다. 종무에 바쁘신 스님을 찾으려고 휴대전화를 서너 번이나 걸고 나서였다. 산중 절과 휴대전화라는 게 현장감을 더하면서 묘하게 어설픈 느낌이 스쳤으나, 생각해보면 정작 휴대전화가 필요한 곳은 이런 너르디 넓은 공간의 산중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큰절 일이라는 게 한량이 없어요. 벌여 놓은 불사가 진척되고 있고, 또 이것 저것 둘러봐야 될 게 많습니다.”
종걸스님이 화엄사 주지로 부임해 온 지, 일 년 칠 개월 남짓 되었다.
오자마자 벌인 불사는 광학당과 강원학사이다. 광학당은 어른 스님, 선배 스님들이 수행정진에 전념하시면서 편안하게 여생을 마치실 수 있는 열다섯 칸짜리 당사로 스님들 노후대책의 일환이기도 하다. 월산스님께서 불국사에 마련한 선원 말고는 선배 스님들 머무실 곳이 마땅찮아 늘 마음에 걸려 왔던 터였다.
더구나 화엄사 문중 스님 백 오십여 분의 뒷날을 바라보고 시작한 불사이니, 문중에서 어른 스님들 수행공간을 챙기는 첫번째 경우라서 더 반가이 눈여겨 볼 일이다. “도량 좋고 터 너른 절도량에 어른스님들 함께 모시면 훈짐도 나고 좋지 않아요” 하시는 말씀이 훈훈하다.
광학당과 함께 지난해 연말에 마무리 되어 입주를 기다리고 있는 강원학사는 예전 건물이 협소하기도 하고 명도 다하여 다시 지은 것이다.
사오십 명 학인이 공부할 수 있는 공간이니 그만 하면 되지 싶고, 불교를 빛낼 참신한 인물들이 속속 찾아들 일만 남았다.
이번에는 “화엄사는 저 신라 도선국사 때부터 선교禪敎가 갖춰진 곳인데, 임란 뒤로 선방이 없어진 것
같아요.” 그 전통이 다시 서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이번에는 선방불사를 시작했다.
산내 암자인 구충암과 봉천암에 정진하는 스님 열한 분이 계시지만 본사에서 선방이라 내놓기는 어렵다는 생각이다. 선방불사는 적어도 이 년여가 걸릴 예정이며 마음먹고 단장해 내놓고 싶은 게 스님의 마음이다. 그러면 화엄사 도량을 일신하고, 명실공히 정진 수행도량을 마련해야 한다는 스님의 원력이 일단락 되는 셈이다.
여천 용문사, 순천 정혜사, 곡성 태안사의 ‘시험대?’를 거쳐 대찰 화엄사까지 주지 소임 전체 팔 년여에 대한 소감은 “밥먹고 사는 게 중점”이라니, 화두인 듯도 하고 선문답 같기도 하다. 주지 하기 전에야
이십 년을 걸망지고 전국 선원에 방부를 드렸으니 지금도 수좌 냄새 폴폴 날 수밖에.
“수좌 망상은 화두하는 게 망상, 주지 망상은 일하는 게 망상이라는 말이 있어요. 승려의 목적은, 수행자라 하면 장판 한 장에 앉아 이 뭣고 하다가 시절인연 다하면 홀가분하게 가는 것이죠. 사판이라는 것도 수행의 한 방법, 한 가지인데 무심코 그냥 사는 거, 지게질 그냥 하는 거, 시절인연 다하면 그냥 떠나는 거라고 생각해요.”
수좌 스님의 오래된 훈습 덕에 사판 소임도 그렇게 보리라 하고 있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라는 것도 경험한다. 작은 절 주지할 때는 자신의 정진도 어지간히 되었지만, 큰절 소임을 맡아보니 짬이 나지 않는다. 도량 지키고 불사하고 사람 만나고 뒷바라지 하는 일에 급급하다.
주지 하면서 화두 잡고 정진한다는 건 거짓말이라고 당신의 경우를 단정 짓기에 이르렀다. 애를 써보지만 몰아치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선방의 이력이 따라붙어 당연히 수좌 주지로 인식되는 화엄사 주지이고, 정진에 대한 아쉬움이 이만저만 아니지만, 사판을 하면서 배운 것 또한 여간 크지 않다.
세상을 보는 안목이 커진다고 할까.
사물의 옳고 그름을 정확하게 판단한다고 할까. 긍정적인 측면에서 세속에 대한 이해력이 커졌다.
뿐만 아니다. 이판과 사판에 대한 역할이 꼭같이 존중되어야 함을 깨달은 것도 크나큰 소득이다.
“수행력과 일은 판단이 달라요. 수행력의 판단으로 사판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수좌들이 사판을 생각할 때는 수행논리의 단순성으로 이해하려고 해요. 그러나 일이란 실제 단순한 게 아닙니다. 여러 가지 부수적인 논리들이 많이 따라요. 포교도 그렇고 불사도 그래요. 사판은 세속과 자신이 끊임없이 부딪치고 추스리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거기서 수행력의 단순성으로는 논리를 펴지 못해요.”
대중 처소 원주 소임만 하더라도 칠지보살이 되어야 한다는 절집안 가풍이 있다. 대중을 외호한다는 게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단적인 표현이다. 팔만사천 성품을 맞이하고 다스려야 되는 일이기에 오히려 사판은 부처가 돼야 한다는 수행목적에 합당하다. 절집안 소임이라는 게 얼마나 지중한 경험이고 귀한 몫인가. 어차피 이판과 사판이 공존해야 하는 현실이고 모두가 부처 되기를 서원하였으니 서로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스님의 견해에 어긋남이 없어 보인다.

개인적으로는 철저한 수행정신을 견지하고, 밖으로는 종단과 종도의 질서가 꼭 유지돼야 하며, 스님이라면 대중의 공의적인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믿는 스님이 종단 사법부인 호계원 초심위원장을 맡고 나서
어려운 일이 더 많았다. 원칙을 많이 주장하는 만큼 강성이라 소문나 있지만 마음 아프고 어려운 일이 정말 없었으면 좋았을 지난 두 해였다.
같은 세대, 같이 만행하던 스님들, 도반들을 초심 호계위원장으로서 자신이 징계해야 한다는 건 가슴 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개인과의 인연, 개인의 생각이 전체 종도의 틀은 될 수 없기에,종단 안정을 위해 스님은 단호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실수도 할 수 있고 이해도 할 수 있지만 큰 틀을 깨는 건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대스님 총무원장 탄생과 지금의 안정된 종단 체제로 오기까지 스님 자신의 공로가 적지 않음 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하지만 전적으로 편하지 않았던 까닭들이다.
“어떤 사람은 곁에서 보면, 뭘 하고자 할 때 억지로 하려고 해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쟁취하려고 합니다. 수행자는 그래서는 안 되지요.”
모든 것은 자연스럽게, 필연적으로 올 때가 있다는 말씀이다. 그 예를 스님은 겸허히 “자신은 능력이 없고 부족하지만 호계위원장을 맡게 된 인연”에 비유한다. 이십 년 걸망 지고 선방만 전전하던 사람을, 지금도 그저 화두 챙기며 해주는 밥 먹고 정진하고 싶지만 본사 주지라는 소임까지 맡고 있는 일들이 피해갈 수 없는 시절인연이라는 것이다.
꼭 건너야 할 징검다리와 같은 것이 시절인연이듯, 소임에는 때가 있고 한계가 있는 법. 화두를 들든 사판 소임을 보든 기왕에 소임이 떨어졌으면 노력과 정성을 다해 치뤄내는 것이 부처님법에 합당하다고 여긴다. 그런 단단한 믿음으로 스님은 다른 분들에게 말씀한다. 무심코 열심히 살다보면 어떤 맞이해야 할 상황, 세월이 온다, 열심히 해라, 긍정적으로 최선을 다해 사는 게 최고라고. 달리 묘수가 있는 게 아니라고. 그러다 보면 어느날 진정 자신이 원하는 일이 문득 다가와 있을 것이라고. 모든 종도가 불보살이라 칭송 자자했던 도광스님을 은사로 모신 인연이 스님의 출가 생활의 방향을 결정 짓게 되었다.
사상과 생활, 몸가짐 마음가짐이 수좌였던 은사 스님을 십오 년 동안 모시고 사는 동안 자연 수좌가 되었으니 말이다.
스무살 안짝에 절집에 왔는데,
이렇게 좋은 법을 더 빨리 알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면 있을까.
“정진이 욕심껏 안 돼서 그렇지 누구든 부처님 법을 안다면 반해 버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며, 투박한 질그릇 같던 스님의 얼굴이 소년의 미소로 가득하다.
스님의 발심에 불을 당긴 건 행자시절이었다. 어느 날 밤에 허름한 차림의 노장님 한 분이 오셨는데 밤중에 공양을 챙겨 드리면서도 그저 노스님이려니 하였다. 이튿날 아침 은사 스님께서 “큰스님 오셨다,
법문을 청해 들어야 한다”며 준비를 재촉 하셨다. 어제 밤에 공양을 준비해 드린 노스님이었다.
망월사 춘성스님을 그렇게 뵈었다.
춘성스님은 당신께서 정진하셨던 이야기, 참선하시고 경 읽던 이야기를 잠깐 하셨는데 “부처님 법은 가질 것도 버릴 것도 없다. 가져서도 안 되고 버려서도 안 된다”고 하셨다.
이것이 대체 무슨 말인고?…
뜻도 모르면서 가슴팍에 콕 박힌 그 말씀은 이십세 전 행자에게 크나큰 화두이자 발심의 단초가 되었다.
불가의 흔한 말로 인연이 지중하고 법기法器가 평범을 넘어선 모양이다.
또 “힘이 있으신” 춘성스님께서 “스님들은 참선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신 데다가, 은사 스님마저 정진하러 가라고 등을 떠미시는 바람에 신심 가득 차올라 강원講院도 모르고 참선길을 트기 시작하였다.
이십 년 선방에서 태산이 일고 꺼지기는 유有 경험이실 터, 득력이야 여쭐 처지도 쉽게 내비치실 일도 아닐 줄 안다. 스님 자신을 “강하다,
스스로 잘 다스린다” 하시는데, 따스하면서도 바위처럼 강건하고 우직스런 스님의 성품이 긴긴 시간 화두 외줄타기의 생명력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 누가 삶의 이력을 속일 수 있을지.
그 선객 스님이 선방에서 겪어보지 못한 어려움을 포교 현장에서 겪는 것은 당연한 일일 테니 “주지라 하면 재주도 많고 꾀도 많다는데 나는 그런 꾀가 없다”는 말씀으로 사판 소임의 버거움을 자주 토로 하시는데, 스님은 정말 신도 단련하는 재주가 없는지도 모른다.
“수행자의 권위의식 속에서 신도들 붙들고 조곤조곤 하는 게 어렵다”는 말씀은 아이처럼 정직하다.
서오능탑 보수할 때 사리가 나와 사리친견 삼백일법회 입제를 며칠 전에 했는데, 호남 유수의 사찰인 화엄사에 겨우 이십여 명 신도가 왔다며 낭패스러워 하시는 모습은 스님의 또 다른 면모이다. 있는 신도가 떨어져 나갈 지경이라니 대작불사가 쉽게 이뤄지지 못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덩달아 안타까워 “포교국장이라든지 해당 분야의 소임을 맡기시지 않나요?” 하고 여쭈었더니 “소임자가 자주 바뀐다”며 작은 절에 살 때는 사분정근 기도에 법문도 하고 신도도 많이 있었다는 기억을 다시 섞으신다. 전담 소임자가 자주 바뀌고 대작불사에 종단일 보시느라 서울 왕래가 잦으시어 지금의 포교 부재 현상은 당연할 것이지만 어찌해 볼 엄두도 내지 않는 듯하다.
그렇다고 장래를 위한 포교 대책에 전적으로 소홀한 건 아니다. 구례에 유치원 지을 준비를 하고 있고, 여수 순천에 사회복지원을 인수 추진중에 있는 것으로 보아 포교의 방향을 선회하고 계신지도 모르겠다.
스님 사십여 분에 종무원 삼십 명이 살고 있는 화엄사 가람에 대한 스님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도량이 웅장하고 양명하며, 천오백 년 고찰이니 모두가 문화재이다. 이 도량에 집단적으로 정진하는 체제를 갖추고 생기를 불어넣고자 방법을 모색했다. 경내 대여섯 군데 되는 각 법당에서 목탁소리만은 끊이지 않는다. 신심 나는 데는 기도가 최고이기 때문이다.
스님 자신은 화두 정진만 생각하면 마음이 든든하고 생기가 돋듯, 종단 상황도 그런 기도와 정진하는 풍토 속에서 안정과 성숙해지기를 스님은 발원한다. 새 천 년 내내.□
글/김희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