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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천년의 서원誓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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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정병조 2000년 02월 216호
한국불교를 폄하하여 칭하는 악의적인 언사 가운데 치마불교니, 기복불교니 하는 표현들이 있다. 사실 입시철마다 아낙네들이 허공을 향해 원을 그리면서 부처님께 절하는 모습들이 아름답게만 보이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복 빌지 않고 복 받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종교가 어디 있는가. 포장은 그럴듯하지만 뒤집어 보면 온통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기도요, 믿음 투성이가 아닐까. 그런데 유독 불교만 기복주의의 누명을 꼬리표처럼 달고 다니는 것이 퍽 못마땅하다. 그렇다면 비판의 초점은 ‘어떤 기복’이냐 하는 데에 두어야 한다. 남이야 어찌 되건 저 혼자만의 안일과 행복을 탐한다면 그것은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남을 위한 정성, 상대방에 대한 따스한 배려와 기도는 아름답고 거룩한 종교적 실천행위일 수 있다.
가끔 부처님을 그리워한다. 피부 색깔 다르고, 문화와 정서도 다른 그 이방인에게 이토록 사모의 정이 느껴지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 분은 인간이 결코 그 야수적 본능을 정당화시켜서는 안 되리라는 것을 가르쳤다. 또 자비의 여로가 암시하듯이, 남을 사랑하고 이웃을 돌보는 것이 인생의 목표여야 한다고 생각한 분이다.
그 분의 삶은 바로 타인을 위한 행보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중생들은 스스로의 이익 챙기기에 급급하다. 선인들의 예지 가운데 소탐대실小貪大失이라는 말이 있다. 눈앞의 이익에만 몰두했을 때, 큰 것을 잃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경구이다. 신의 대신 돈을 얻고, 정의 대신 명성을 얻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허공을 가르는 새에게도 저마다의 길이 있고, 물살을 가르는 물고기에게도 길이 있는 법이다. 사람 사는 길이 다 길이 아니오, 정의롭고 올바르게 사는 것이 진정한 길이다. 부처님은 바로 그 길을 지시하고 그 길에서 살았던 분이다. 온통 길이 무너지고 파헤쳐진 이 난국 속에서 우리가 부처님을 그리워하는 것도 바로 그 까닭 때문이다.
보조국사 지눌知訥은 「염불요문念佛要門」에서 “장애 많은 중생은 염불을 닦아야 한다”(多障衆生 念佛觀)고 말했다. 한평생 살다보면 예기치 못한 어려움이 닥칠 경우가 있다.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성취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그 때마다 어디엔가 매달리고 싶은 것 또한 인지상정이다. 결국 중생이기 때문에 기도할 수밖에 없고, 아이러니칼하게도 기도를 해야 이 중생의 지위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중생으로서 겪어야 만할 장애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 애욕의 노예가 되어 끊임없는 소유욕으로 일생을 망가뜨리는 일이다(煩惱障). 둘째, 거룩한 것에만 매달려서 세속의 일을 등한시하고 멀리하는 일이다(所知障). 셋째, 제 몸뚱아리, 제 가족만을 위하면서 사는 소시민적 태도이다(報障). 넷째, 고요한 것만을 추구하여 모든 번거러움에서 떠나는 일을 능사로 삼는 행위이다(理障). 다섯째, 편협하여 어디에나 두루 통하지 못하는 고집쟁이의 삶이다(事障). 번뇌는 집착을 낳고 집착은 대립과 투쟁으로 이어진다. 이 끝없는 인과의 멍에가 바로 사바세계이다. 기도하는 마음이란 그 모든 고통의 원인이 바로 나 자신에게서 비롯된다는 소박한 참회의 의지이다. 따라서 이기적 욕락을 채우는 일보다, 더욱 중요한 일은 타인에 대한 배려라는 진정한 자각을 갖는 일이다.
새 천 년이라고 해서 지구촌이 난리법석이다. 그러나 불교적 입장에서 보면 시간의 구획이나 단절은 별 의미가 없다. 시간은 무시무종無始無終이기 때문이다. 영겁을 흐르는 이 시간의 수레바퀴 속에서 우리는 하루를 긋고, 일 년, 십 년, 백 년을 나누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리그·베다의 찬가에도 “ 시간(kala)은 일곱 필의 말을 가진 수레처럼 늘 달린다”고 노래하였다. 일곱이란 숫자는 일 주일이라는 인위적 단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용수보살도 「중론」에서 시간의 무상성을 논증한 바 있다. 인간은 편의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말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현재란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현재”라고 외치는 순간, 이미 시간은 과거로 흘러 갔기 때문이다. 또 흘러간 시간(과거)은 다시 돌이킬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다. 곧 과거라는 개념은 관념일 뿐, 실재는 아니다. 미래 역시 마찬가지이다. 오지 않는 장래를 미래라고 말하지만, 그 미래는 붙잡을 수도 없고 확인할 수도 없다.
아마 이와 같은 용수의 사고思考 속에는 현세의 실존철학이 말하는 현존現存(Da Sein)이라는 상념이 있었음 직하다. 실존철학에서 말하는 인간의 문제는 바로 현재, 이 삶의 한복판에 고독하게 버려진 실존 그 자체였다. 그것을 떠나서 인간을 논하고, 관념적 허구 속에서 형이상학적 태도로 일관하는 것은 결코 철학의 본령일 수 없다. 따라서 실존철학은 가장 불교의 철학성에 유사하게 접근해 온 학문이기도 하다.
새 천 년은 전혀 새로운 시작일 수는 없다. 당연히 과거의 업보를 계승할 수밖에 없고, 영원히 흐르는 시간의 한 고비일 따름이다. 이제 우리의 서원은 좀더 많은 중생들의 행복이어야 한다. 지나온 천 년을 인류는 살육과 약탈로 지새워 왔다. 서양인들의 동양에 대한 강점强占, 두 차례의 세계대전, 그리고 동서냉전 종식 뒤에 빚어지는 경제적 수탈 행위 등은 모두 ‘힘의 논리’를 정당화해 온 결과였다. 힘으로 상대방을 굴복시킨 것을 승리라고 착각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의 환경문제, 빈부격차 등은 이 힘의 논리가 끝내 양자를 공멸共滅하게 한다는 평범한 인식으로 귀결된다. 이 진실을 깨닫는데 우리는 무려 이천 년의 세월을 허비해 왔다. 불교가 외쳐온 상대적 가치관과 연기緣起의 지혜는 이제 인류에게 남겨진 마지막 희망일 수 있다. 네가 있어야 내가 있다. 내가 행복해지려면 상대방이 아프지 말아야 한다. 건강한 사회란 바로 서로의 인격이 존중되는 사회, 그 존재 당위를 확신하는 실천사회이다.
여태까지 우리나라 불자들의 기도는 양적 팽창에만 머문 느낌이 있다. 우리 아이 건강하게 해 주십시오. 우리 남편 사업 잘 되게 해 주세요. 남북통일 이루어 주소서. 이 모든 절실한 기원은 행복의 추구가 양적이고 물질적으로만 유도되게끔 이루어졌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는 이제 질적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 행복을 물질로서만 판단하는 행위는 또 다른 탐욕일 따름이다. 부처님을 통해 내 인생의 내면이 따뜻해지고, 또 그 따사로움이 저절로 우러나오게끔 우리의 서원을 가다듬어야 한다. 새해에는 사홍서원이 입 안에서만 맴도는 구호가 아니기를 바란다. 반야심경이 단순한 의례가 아니기를 기원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온전히 부처님답게 되기를 서원하는 새 아침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