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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원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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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이야기 - 보각 2000년 02월 216호
새해가 되면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하는 인사를 가장 많이 받는다. 부처님 말씀 가운데 누구나 복 받는 과보는 즐겨 하지만 복 짓는 인연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씀을 하셨다. 복이란 받고 싶다고 받아지는 것이 아니라 복을 지어서 스스로 수확하는 것이다.
얼마 전 서울에 있는 청량사에 계신 스님께서 봉투를 하나 건네 주셨다. 봉투 안에는 현금 이십만 원이 들어 있었다. 그 봉투는 암에 걸려 사경을 헤메는 보살님이 취로사업을 해서 번 돈을 우리에게 보내 주신 것이다. 너무나 감격스럽고 기뻐서 봉투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더니 전화를 직접 받으셨다. “얼마나 힘드십니까?” 하고 위로의 말씀을 드렸더니 “처음에는 진통제 한 알로 고통이 가셨으나 이제는 세 알을 먹어도 고통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금강경을 읽으면 고통이 가십니다” 하셨다. 그 보살님은 장기 기증도 하고 싶어 하셨으나 암에 걸린 장기는 장기 기증이 안 된다고 하니 그 또한 안타까운 일이었다. 이런 일에 부딪혔을 때 가장 막막한 것이 아마 성직자들일 것이다.
과연 기도란 무엇인가? 경전에는 발원과 참회를 기도라고 하셨다. 반야경에서는 또한 원력이 없는 삶은 마구니 삶이라 하셨다. 언제부터인가 불자들 사이에도 기도가 자기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참된 기도란 ‘무엇 무엇을 이루어 주십시오’ 하는 부탁이 아니라 ‘무엇 무엇을 실천하고 이루겠다’는 발원이 곧 기도의 출발이다. 원력이 있는 곳에 성취가 있다는 말처럼 불자들은 날마다 원력을 세우고 원력을 실천하는 하루하루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옛 스님들에게 기도를 열심히 해서 신기한 영험을 세 번은 보아야 일생을 어려움이 없이 공부를 하든 불사를 하든 성취할 수 있다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나 자신도 소쩍새마을을 맡고 나서 부처님의 가피를 입은 적이 있다.
1995년 9월 18일 학교 교무회의에서 소쩍새마을 원장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본인이 아니고서는 마을 일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중의 뜻에 따라서 원장직을 승낙하면서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나도 거절할 수 있겠지만 지금은 오직 나밖에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믿어 주니 내가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를 십 년 동안만 아무 잡음
없이 밀어 주면 그 곳을 멋진 곳으로 만들어 교단과 학교에 회향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원장을 맡고 삼 일 뒤, 소쩍새마을에 도착해보니 황당함 그 자체였다. 비닐하우스에 연탄보일러를 설치해서 식구들이 살고, 식당은 맨 흙땅에 판자로 식탁을 만들어서 밥을 먹고, 그 추운 겨울에 장작 몇 개피를 피워서 추위에 떨면서 퉁퉁 불은 라면을 먹고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가니 과일을 먹으라고 내 놓는데 파리가 너무 많아서 먹을 수가 없었다. 서울에 올라와 과연 어디서부터 일을 시작할까 궁리를 하다가 주위 환경부터 바꾸기로 하였다.
원주시청을 찾아가 건물을 신축하려고 하니 건축허가를 해달라고 했다. 그러나 시청의 대답은 건축을 허가할 수 없다고 했다. 민원이 많이 제기되고 혐오시설이 들어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마을에 돌아와서 식구들을 보자 측은한 마음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비닐하우스라도 있으면 집을 신축하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밤에 포크레인을 불러 집을 철거해 버렸다. 원주시장을 만나 이제 살집이 없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해서 건축허가를 해 주겠다는 약속을 얻어냈다. 문제는 그것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국립공원 지역에 마을이 있어서 국립공원관리공단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치악산 관리사무소에 허가신청을 하자 서울에 있는 본부에서 허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울 관리공단 본부에 가자 원주에서 허가할 일을 서울까지 왔느냐고 짜증을 냈다.
다시 원주에 내려가 관리사무소에 서류를 내밀자 허가를 할 수가 없단다. 할 수 없이 관리사무소에 소쩍새마을 식구들을 데려와 함께 살겠다고 하자 그제서야 백팔십 평 건물 신축허가를 내주었다. 문제는 또 있었다. 토지 소유권이 전 운영자 이름으로 있었으니 토지에 대한 인감증명을 해 주지 않는 것이다.
교도소까지 찾아가 사정을 했으나 거절 당했고 가족들도 소쩍새마을 기부한다는 사실을 번복하기 위해 기부취하소송을 준비하고 있었으니 인감증명을 해 줄 까닭이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인감증명을 가지고 건축허가를 신청, 건물을 신축할 수 있었다. 비록 조립식 건물이었지만 기름보일러를 설치하고 식당에 온풍기 달아서 식구들이 추위에 떨면서 밥을 먹지 않아도 되었고 온수에 언제나 몸을 씻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법당에 모셔진 부처님도 그 모습이 너무 초라해서 새로운 부처님을 모시기로 하고 건물신축에 박차를 가해 95년 12월 26일 건물낙성식, 부처님 점안식, 그리고 식구들이 서로 사랑하기에 장애인 부부 두 쌍의 결혼식을 함께 거행해 하객이 천 명을 넘고, 합창단 세 팀이 와서 축가를 불러 주었고, KBS-2TV에서 전국에 방송을 했다.
건물을 신축하기는 했지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하는 일이었다. 보통의 경우 일 년 내지는 이 년 걸리는 법인 설립이 석 달여 만에 나왔으니, 그것이 96년 2월 6일 부처님 계심을 증명해 주는 일이었다. 마을 원장을 맡고 나자 눈앞이 캄캄했다.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옛 스님들이 말씀하시기를 불사를 원만 성취하기 위해서는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고 하셨다. 그래서 신묘장구대다라니 주력을 시작했다. 다른 스님들처럼 기도처나 법당에서 할 처지는 못 되어서 차 속에서 거리에서 어디에서나 염불하는 곳이 법당이 되었고 장소를 가리지 않고 주력을 하였다. 처음에는 이백이십 번을 정하고 했으니 법인설립 허가는 부처님이 나의 기도에 화답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왜냐하면 그 어려운 상황에서 집을 짓고 법인이 설립된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집을 새로 짓고 소문이 나자 식구가 차츰 늘어나기 시작했다. 다시 서원을 세웠다. 우리나라에 최고의 시설을 만들어서 고려시대 불교사회복지가 융성했을 때처럼 자비의 도량을 만들자고 그래서 강원도 횡성에 이십만 평의 부지를 확보했고 삼천 평의 식구들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곳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해 오고 있다.
이제 소쩍새마을에 실망해서 후원을 끊었던 후원자도 다시 돌아오고 시장에서 장사하시는 분, 구청의 환경미화원, 여든 먹은 할머니를 비롯하여 육만여 명의 후원자가 마을 후원에 동참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올해는 횡성부지에 길을 새로 만들고 식구들이 옮겨 생활을 할 수 있는 건물 기공식을 할 것이다. 나의 기도는 소쩍새마을의 완공에 있고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기필코 이루어 나갈 것이다. 내가 노력한 만큼 부처님이 나의 기도에 화답해 주시리라 믿으면서 금생이 다하도록 열심히 기도하는 삶을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