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과학의 공존
현대는 과학 시대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 과학의 주류는 삼백여 년 전 르네 데카르트(1596~1650)가 주장한 물질과 정신은 완전히 별개의 것, 곧 ‘물심이원론’에서 비롯됐다. 이 생각은 오늘날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상식처럼 여겨져 왔으나 데카르트의 시대만 해도 물질과 정신은 구별하지 않았다.
기독교는 필사적으로 근대 과학을 탄압했다. 마음을 대상으로 하는 종교와 물질을 다루는 과학이 나누어져 있지 않음으로써 ‘근대 과학은 기독교 교리에 관한 심각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데카르트의 철학이 침투됨으로써 ‘하늘 나라의 일’은 목사님이, 그리고 물질 세계에 관한 일은 과학자가 나누어 담당하게 되고 학문에 분업 체계가 형성된 셈이다. 표면적인 관찰에 있어서는 물질과 정신, 또는 육신과 정신을 완전히 별개의 세계로 생각한다.
한편 불교에서의 ‘물질이원론’은 분별지分別知를 뜻하며 출발에서부터 그 한계를 강조해 왔다. 그러나 과학세계에서도 깊은 수준에서 본다면 육신과 정신은 구별할 수 없음이 알려져 있다. 새 과학은 이 관점에서 근대 과학의 한계에 돌파구를 구상하게 되었다.
앞으로는 인간의 문제와 물질 세계의 얽힘에 관한 여러 가설이 과학적 검증을 받을 것이고, 그 동안 과학이 외면해 온 우주와 인간에 관련되는 수수께끼를 풀어갈 것이다. 과학은 종교에서 배울 것이 많아지고 종교가 과학의 엄밀한 논리와 실험에 실증되는 시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 특히 불교에는 첨단 과학의 내용을 많이 지니고 있다.
복잡계
어느 문화권에서도 고대 신화는 혼돈(카오스)에서 질서(코스모스)가 형성되었음을 시사하고 있으며, 그 동안 코스모스의 세계를 밝혀 내는 무기가 데카르트적인 사상이다.
20세기 이래 서양 과학의 기본 주류는 이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에는 기본적인 실체─법칙 또는 물질─이 있으며, 노력만 한다면 인간의 지혜로 발견할 수 있다는 본체론의 입장이었다. 가령 근대 과학의 선구자인 뉴튼은 자신이 발견한 역학 법칙으로 이전에는 신비스럽게만 생각했던 행성과 혜성의 궤도를 포함하여 여러 천체 운동을 정연한 이론으로 설명했다. 그는 겸손하게 “나는 진리의 모래밭에서 모래알 하나를 주었다” 고 말했다. 그 말에는 자신은 해변의 모래처럼 많은 진리 가운데에서 겨우 그 가운데 한 알을 찾았을 뿐이지만 언젠가는 같은 방법으로 사람들이 모든 진리를 찾아낼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어떤 대상에 대해서 기존의 과학적인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는 자연현상은 지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했음이 밝혀진 것이다. 오늘날 과학은 사람을 우주 공간으로 보내고 생물 복제도 가능한 단계에 도달했으나 바람에 날리는 나뭇잎의 행방조차도 제대로 맞출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왜 이토록 발달한 과학에 한계가 나타나는 것인가! 인간과 과학 사이의 갈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기존의 과학 체계에 모순이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곧 현상에 본질이 있다는 믿음이 잘못되었으며 현상은 여러 개의 요인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야기된다는 불교적인 상의상관相依相關─서로 의존, 관련되어 있다─임이 분명해진 것이다. 현상에는 기본 요소가 있다. 또는 하나의 원인에 대해서는 반드시 하나의 결과가 나온다는 인과율, 또는 결정론의 유효 범위는 지극히 제한적인 것이다. 복잡계의 과학과 불교의 기본 철학은 모든 것은 변한다, 곧 제행무상諸行無常이며, 여러 개의 요인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나타나는 ‘연기’이다.
불교는 처음부터 연기론의 기반에서 출발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복잡성이란 곧 불교적인 표현으로는 “연기”로 야기되는 현상이다. 과학은 본체론의 가파른 고갯길에서 복잡계(카오스)를 본 것이다. 과학자는 복잡계는 카오스의 창을 통해서 볼 수 있었다고 말한다. 카오스에 내포하는 더 넓은 복잡한 현상을 파헤치는 것이 복잡계의 과학인데 불교는 이미 2500년부터 그런 사고를 해온 것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
지금까지의 물리학에서는 힘과 열 같은 에너지가 인간과 물질에 영향을 준다고 믿어 왔다.
그러나 인간은 에너지와같이 개량할 수 있는 것 이외의 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가령 가끔 일상 생활에서 누군가 뒤에서 나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서 뒤돌아봤을 때 나를 응시하고 있는 사람과 시선이 부딪치는 일이 있다. 어젯밤 꿈에 본 일이 다음날 현실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험을 할 때는 무엇인가 현실 세계와는 달리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자신을 에워싸고 있음을 실감한다. 이런 일을 극단적으로 표시하면 텔레비전 화면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어린이는 텔레비전 화면만 보고 그 상자 속에 있는 구조로 인해서 화면이 나타나는 것으로 여긴다. 방송국에서 방영하고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전자파의 세계가 있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전자파가 없으면 텔레비전 화면이 없고, 텔레비전 수신기가 없다면 전자파의 세계를 감지할 수 없다. 그 관계는 보이지 않는 것(전자파)이 없으면 보이는 것(화면)이 없는 이를테면 색즉시공, 공즉시색과 같은 것이다. 이 사실은 어디까지나 하나의 비유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가족, 마을, 사회걖\" 등에서 받은 사회적 환경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인과 연에 의해 인간성이 정해져 있다.
우리는 현실의 세계만을 전부인 것으로 여기고 있으나 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현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이 있다. 내가 이 시간에 여기에 있는 것부터가 우주가 처음 발생했을 때부터 누적해 온 엄청난 연기의 결과가 쌓여진 업이다 우리는 낱낱이 그 연기와 그 업으로서의 관계에서 이 시점에 존재하고 있다.
집단무의식
심층심리학을 개척한 융은 섬뜻할 정도로 미래를 예측하는 꿈을 자주 꾸었다. 어머니, 친구, 환자의 죽음 등 뿐만 아니라 히틀러의 등장, 제1, 제2의 세계 대전이 일어날 수 있음을 이삼 년 전에 정확히 예언하고 있었다. 또한 융의 무의식의 밑뿌리에는 신에 가까운 ‘성스러운 의식’이 잠자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곧 불교적인 ‘불성佛性’과도 같다. 모든 것에 불성이 있다. 중생실유불성衆生悉有佛性’ 인간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기존의 종교, 신앙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반 환자의 내면의 존재 양식을 관찰하면서 인간의 혼은 종교적임을 감지할 수 있다’(융의 자서전에서)큰 깨우침, 또는 선의 궁극적인 경지는 내 자신이 전 우주와 일체화되는 경지이기도 하다.
‘우주는 하나’라는 사실은 곧 자自와 타他 사이에 공통의 무의식을 공유하는 일이기도 하다. 곧 자와 타, 나아가서는 전 우주와의 일체화이며, 나와 우주가 자기 닮음(fractal)적으로 하나가 되는 일이기도 하다.
‘가이아 가설’에서 유명한 러브록은 지구상의 여러 가스의 농도에 관한 증감 상태를 연구하면서 지구는 결코 무미 건조한 암석의 더어리가 아니라 의지를 지닌 하나의 생명체임을 실감했다. ‘지구는 생명체’이며 그보다 한 차원 높은 ‘전우주도 생명체’이다. 우주 속 지구, 지구 속에 있는 인류, 또 그 속에 있는 나걖\" 모두가 생명체이다. 생명체는 모두 태어나고, 증식되고, 죽는다. 생명은 모두 하나의 씨에서 나왔다. 천지동근天地同根, 만물제동萬物齊同─천지는 같은 뿌리에서 나왔고, 모든 것은 같다─불교 철학은 결코 신비스럽거나 허황한 명제는 아니다. 과학이 발달하면서 불교 철학은 과학의 힘으로 더욱 더 진가를 발휘하고 있다. 불교는 옛 스님이나 경전만을 들먹이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이며, 적극적으로 새로운 과학의 빛으로 조명되어 정보화 사회의 중생에게 빛을 더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