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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田耕作심전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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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찾지말라 - 보광 2000년 02월 216호
새 천년이라 해서 지난 과거가 모두 없어지고 새로운 미래가 도래하는 양 온 나라가 떠들썩하지만 지나간 천 년의 업보 위에 이천년이 이어지는 것임을 우리 불자들은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중생외과衆生畏果. 보살외인菩薩畏因이라. 중생들은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를 걱정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무엇을 심을지에 관심을 두고 전력을 기울이는 자세로 생활해야 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어깨를 짓누르는 한 짐을 지고 나오기 마련이고, 그 짐으로 인해서 인생살이는 고달프고 근심 걱정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다름아닌 업이라는 짐입니다. 중생들에게 이 업보의 짐은 마치 그림자가 언제나 우리를 뒤따르는 것처럼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모든 범부 중생들이 이 업보에서 벗어나 보름달처럼 밝은 얼굴로 즐겁게 살아 갈 수 있도록 해탈의 법문을 열어 주셨습니다.
염염상속念念相續으로 끊임없이 부처님을 생각하고, 화두가 밤낮으로 성성적적惺惺寂寂해지면 공부하는 이외의 다른 것은 모두 아무런 재미도 없어지게 마련입니다. 마산에 사시는 어느 노보살님께서 걱정 없이 편안하게 가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시기에 이제부터는 108염주를 손에서 놓지 말고 돌리면서 부처님 명호를 외우되 “외우는 입과 마음이 하나 되도록 하라”고 일러 주었더니 죽음에 다다른 노보살님은 얼마나 간절히 염불을 하셨던지걖? 경노당에 가면 화투 치는 대신 염주를 돌리고, 집에서도 며느리나 자식들을 성가시게 간섭하는 일 없이 오로지 부처님 명호를 외우는 것에 모든 지성을 기울이셨다고 합니다. 그리하였더니 나중에는 중생들이 좋아하는 놀이는 싫어지고 마음 닦는 일만이 그렇게 좋고 환희심이 가득해 지셨답니다. 이처럼 누구든지 간절한 마음으로 지금 바로 실천한다면 불법은 마치 안개에 옷 젖듯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변화시켜 머지않은 때에 숙세에 익힌 습을 벗어 버린 자신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실재로 그 노보살님은 아들 곁에서 염불하시다가 평소에 염원하시던 것처럼 잠자는 결에 살며시 눈을 감았습니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자신의 머리가 나쁜 것이나 집안 환경이 좋지 않은 것을 모두 부모님 탓으로 돌리고 원망하지만, 모르는 소리예요. 자신의 업식에 따라 자신이 부모를 선택한 것이므로 주원인은 바로 자기자신이지 다른 데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윤회를 거듭해 온 자신의 업보에서 기인한 것이므로 현실에 나타난 중생들의 모습이 차별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인과는 분명해서 누가 더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는 것이지요. 늙고 싶지 않고, 병 들고 싶지 않고 특히 나이 든 사람들은 자는 결에 아무런 고통없이 조용히 죽기를 소원하지만 그 모든 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바로 인간이 업식으로 굳게 뭉쳐 있기 때문이지요. 비유하자면 저기 앞뜰에 있는 큰 나무에 가지와 솔잎이 많은 것은 분명 여러 수백 년을 두고 자란 뿌리가 깊고 많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여러 겁 동안 생사윤회를 거듭하면서 깊게 박힌 삼독三毒의 뿌리에서 애욕의 둥치가 올라오고, 이 애욕의 줄기에서 다시 팔만사천의 번뇌 가지가 뻗어나고, 여기에 우화憂花(근심의 꽃)가 피고 고과苦果(괴로움의 열매)가 열리는 것이지요. 어쩌다 줄기가 잘라져 없어진 듯하지만 질기고 깊은 뿌리가 있는 한 이내 다시 돋아나게 마련입니다. 공부를 해본 사람들은 이 삼독의 뿌리가 얼마나 질기고 모진지 다 경험했을 것입니다.

세간에서는 사랑과 정 때문에 살고 또 이런 애욕 때문에 괴로워 죽기도 합니다. 자세히 생각해 보세요. 사는 것도 정 때문이요, 죽는 것도 정 때문이라니! 고려시대 고승이신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말씀에도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나야 하느니라” 했듯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그 문제 속에 이미 해답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일 때문에 “죽을 지경이다” 하지만, 바로 이 “죽을 지경” 안에 살 수 있는 경계가 분명히 있다고 역설하는 것이 바로 불법의 묘리妙理인 것입니다.
중국 당대의 큰 선승이신 황벽 희운스님은 어릴 때 홀어머니 밑에 있다가 발심하여 13세에 고향 남경에서 출가해서 불법의 깊은 도리를 깨닫아 많은 제자를 제접하며 가르침을 베풀고 있었습니다. 출가하면 자식은 어머님을 잊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자식을 결코 잊을 수 없는 법이지요. 그래서 한평생을 하루같이 질기고 모진 정 때문에 자식을 보고픈 마음 간절하게 사시다가 돌아가실 나이가 되어서는 아들 한번 만나 보고 눈을 감을 심산으로 어머니는 봄에 집을 나서서 갖은 고생 끝에 겨울에야 아들이 있는 절에 도착하였지요. 그런데 어머니가 왔노라 하면 신발도 신지 않고 뛰어나와 반가이 맞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더위도 추위도 이겨 가며 아들을 찾아 왔는데, 만나 주기는커녕 갈증을 채워 줄 물 한 모금도 얻어 먹지 못하고 문전박대를 당하고 말았으니, 하늘과 땅이 무너지는 듯한 기막힌 신세가 되었어요.
“내가 무엇 때문에 살았는데걖? 내가 누구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가!”
“정 때문에, 애착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는구나.”
이 한 생각이 앞뒤가 절벽 같은 화두가 되어 고향으로 내려가다 아차하고 발을 헛디뎌 강물에 빠지는 순간 몇 겁을 두고 쌓아온 애욕의 정을 내려 놓고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는 기연奇緣을 맞게 되었지요. 어머니가 그 날 밤에 아들 황벽 선사의 꿈에 현몽해서 삼배 올리며 스님께서 무거운 생사의 업보를 내려 놓고 열반락涅槃樂을 누릴 수 있는 가르침을 주셨으니 감사하다고 했답니다. 바로 그 애욕이 자신을 생사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게 가로막는 자물쇠였지만 또한 그것이 억겁의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열쇠가 된 것이지요. 자물쇠와 열쇠는 언제나 같이 있는 것입니다. 중생 없이 부처가 될 수 없듯, 여러분의 업식은 좋은 공부감입니다. 우리는 저만치서 자신이나 중생들이 사는 모습을 바라볼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인생이 읍내 장터와 같습니다. 아침에 왁자지껄 모였다가 저녁이면 모두 떠나가 버리는 빈 장터걖? 중생이 가는 길의 종착점은 묘비 앞 무덤이지만. 부처님께서 인도하는 길은 영원히 사는 열반의 생사해탈인 것입니다.
초발심의 말씀처럼 부처님은 의왕醫王이라 중생들의 근기에 맞는 약을 처방해 주시지만 그 약을 복용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은 누구의 허물이겠습니까? 또한 부처님은 안내자라 바른 길로 인도하시지만 그 길을 따라서 가고 안가는 것은 누구의 탓이겠습니까? 부처님의 해탈법解脫法은 머리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눕거나 앉아 있기만 해서 서울 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바로 한 걸음이라도 옮기는 자만이 서울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변화 무상한 원숭이 같은 자신의 업식에서 나오는 결과에만 신경 쓰지 말고 무궁무진한 마음 밭에 무엇을 심을 것인가에 관심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경진년 정초에는 여러분의 마음 밭에 “올바른 진리에 대한 믿음의 씨앗”과, “부지런히 정진하는 소”와, “자신을 부끄러워 할 줄 아는 멍에”를 준비해서 “말과 행동을 삼가고 뜻을 바로 세워 지혜라는 쟁기”로 마음 밭을 일구어 “진리와 평화”를 수확하여 일체 중생에게 회향하는 뜻깊은 한해가 되어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