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간에서는 사랑과 정 때문에 살고 또 이런 애욕 때문에 괴로워 죽기도 합니다. 자세히 생각해 보세요. 사는 것도 정 때문이요, 죽는 것도 정 때문이라니! 고려시대 고승이신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말씀에도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딛고 일어나야 하느니라” 했듯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는 그 문제 속에 이미 해답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일 때문에 “죽을 지경이다” 하지만, 바로 이 “죽을 지경” 안에 살 수 있는 경계가 분명히 있다고 역설하는 것이 바로 불법의 묘리妙理인 것입니다.
중국 당대의 큰 선승이신 황벽 희운스님은 어릴 때 홀어머니 밑에 있다가 발심하여 13세에 고향 남경에서 출가해서 불법의 깊은 도리를 깨닫아 많은 제자를 제접하며 가르침을 베풀고 있었습니다. 출가하면 자식은 어머님을 잊을 수 있지만, 어머니는 자식을 결코 잊을 수 없는 법이지요. 그래서 한평생을 하루같이 질기고 모진 정 때문에 자식을 보고픈 마음 간절하게 사시다가 돌아가실 나이가 되어서는 아들 한번 만나 보고 눈을 감을 심산으로 어머니는 봄에 집을 나서서 갖은 고생 끝에 겨울에야 아들이 있는 절에 도착하였지요. 그런데 어머니가 왔노라 하면 신발도 신지 않고 뛰어나와 반가이 맞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더위도 추위도 이겨 가며 아들을 찾아 왔는데, 만나 주기는커녕 갈증을 채워 줄 물 한 모금도 얻어 먹지 못하고 문전박대를 당하고 말았으니, 하늘과 땅이 무너지는 듯한 기막힌 신세가 되었어요.
“내가 무엇 때문에 살았는데걖? 내가 누구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가!”
“정 때문에, 애착 때문에 이런 고생을 하는구나.”
이 한 생각이 앞뒤가 절벽 같은 화두가 되어 고향으로 내려가다 아차하고 발을 헛디뎌 강물에 빠지는 순간 몇 겁을 두고 쌓아온 애욕의 정을 내려 놓고 생사의 윤회를 벗어나는 기연奇緣을 맞게 되었지요. 어머니가 그 날 밤에 아들 황벽 선사의 꿈에 현몽해서 삼배 올리며 스님께서 무거운 생사의 업보를 내려 놓고 열반락涅槃樂을 누릴 수 있는 가르침을 주셨으니 감사하다고 했답니다. 바로 그 애욕이 자신을 생사윤회를 벗어나지 못하게 가로막는 자물쇠였지만 또한 그것이 억겁의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열쇠가 된 것이지요. 자물쇠와 열쇠는 언제나 같이 있는 것입니다. 중생 없이 부처가 될 수 없듯, 여러분의 업식은 좋은 공부감입니다. 우리는 저만치서 자신이나 중생들이 사는 모습을 바라볼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인생이 읍내 장터와 같습니다. 아침에 왁자지껄 모였다가 저녁이면 모두 떠나가 버리는 빈 장터걖? 중생이 가는 길의 종착점은 묘비 앞 무덤이지만. 부처님께서 인도하는 길은 영원히 사는 열반의 생사해탈인 것입니다.
초발심의 말씀처럼 부처님은 의왕醫王이라 중생들의 근기에 맞는 약을 처방해 주시지만 그 약을 복용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은 누구의 허물이겠습니까? 또한 부처님은 안내자라 바른 길로 인도하시지만 그 길을 따라서 가고 안가는 것은 누구의 탓이겠습니까? 부처님의 해탈법解脫法은 머리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눕거나 앉아 있기만 해서 서울 가는 사람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금 바로 한 걸음이라도 옮기는 자만이 서울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변화 무상한 원숭이 같은 자신의 업식에서 나오는 결과에만 신경 쓰지 말고 무궁무진한 마음 밭에 무엇을 심을 것인가에 관심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경진년 정초에는 여러분의 마음 밭에 “올바른 진리에 대한 믿음의 씨앗”과, “부지런히 정진하는 소”와, “자신을 부끄러워 할 줄 아는 멍에”를 준비해서 “말과 행동을 삼가고 뜻을 바로 세워 지혜라는 쟁기”로 마음 밭을 일구어 “진리와 평화”를 수확하여 일체 중생에게 회향하는 뜻깊은 한해가 되어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