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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부 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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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여로 - 정찬주 1990년 07월 101호
선재는 몸살을 앓았다. 매를 맞은 것처럼 온몸이 욱신욱신 쑤셔댔다. 웬만하면 엊그제 개업한 여동생의 레코드 가게에 나가서 일을 거들어주고 싶었지만 영 일어날 수가 없었다.
사실, 어제 무리를 한 셈이었다. 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고, 약간의 오한이 있었는데도 무리해서 레코드판들을 한나절이나 정리했던 것이다. 레코드판들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그렇다고 손상을 입기 쉬운 것들이어서 함부로 다룰 수도 없었다. 말하자면 다른 물건을 정돈하는 것보다 두 배나 더 힘이 들었다.
아무튼 선재는 몸살약을 조제해서 복용한 다음 이부자리를 펴고 드러누웠다.
여동생한테서 전화가 걸려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여동생의 목소리는 무엇에 놀란 듯 떨리고 있었다.
“선재오빠, 카운터 책상 위에 놓인 악보 그거 보지 못했어.”
“글쎄…”
“잘 생각해 봐. 아주 중요한거란 말이야.”
“겉표지가 뜯겨져 나들나들하게 보이는 헌책 말이지 ?”
“그래, 그래.”
“그거, 버렸지. 쓰레기통에.”
“……”
“왜 그러니?”
“큰일났어!”
“왜 그러냐니깐?”
여동생은 대답을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선재는 자신이 몸살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잊은 채 여동생한테 달려갔다.
“무슨 일일까…”
선재는 택시 안에서 별별 생각을 다 해보았다. 그러나 여동생을 만나보기 전에는 확실하게단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 예삿일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누구든지 버림직한 헌책 한 권 때문에 울음을 터뜨리는 여동생의 태도가 그런 생각이 들게 하였다.
“혹시 책 속에 고액의 수표 같은 것을 끼워두지는 않았을까…”
갑자기 선재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잠시 잊고 있었던 몸살 기운이 온몸을 쑤셔댔다.
그날 아침 집에서 나갈 때, 어머니가 탄 곗돈 오백만원을 레크드판 구입비로 챙겼던 것이다.
백만원짜리 자기앞수표 다섯 장이었었다. 선재의 예상은 불행하게도 틀림없었다.
여동생의 얼굴은 중증환자처럼 백지장처럼 하얗게 핏기가 없었다. 선재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여동생의 일을 거들어주러 나왔다가 사업자금을 날려버린 것이다. 은행에 신고를 하려 해도 그 자기앞수표가 어느 은행에서 발행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선재는 우선 동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쓰레기를 어디다 버리는지를 알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동사무소 직원은 위로까지 해주면서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어젯밤에 버린 쓰레기라구요? 그럼 오늘 아침에 수거해 갔을 테니까 아직은 난지도까지는
안갔을 것 같고… 어쩌면 찾을지도 모르겠구만요. 어서 시장통 임시 쓰레기장으로 가보시오.”
쓰레기는 리어카로 실려가서 임시 쓰레기장에 모여졌다가 다시 대형차에 실려져 난지도로 나가는 모양이었다.
선재는 가게문을 닫고는 여동생과 함께 동네 임시 쓰레기장으로 뛰어갔다. 그러나 동사무소 직원의 말처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여기 저기서 흘러들어 온 쓰레기가 생각보다는 많았다. 그래도 난지도로 흘러들어가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선재는 바로 소매를 걷어붙이고 쓰레기 더미를 헤치기 시작하였다. 여동생도 선재 옆에서 어디서 막대기를 구해 왔는지 그것으로 쓰레기를 헤집었다. 바로 그때였다.
49대 중반의 청소부가 선재에게 다가온 것은…청소부가 물었다.
“무얼 그리 열심히 찾고 있소?”
“잘못 버린 책 한권을 찾고 있습니다. 그 속에 수표가 들었거든요.”
“어떻게 생긴 책이오?”
“곁장이 떨어지고 몇십 페이지 안되는 얄팍한 악보입니다.”
“거참, 불행중 다행이오. 새책이거나 두툼한 헌책이었다면 청소부들이 벌써 챙기고 난 뒤라 이곳에는 없을 테니까 말이오.”
선재는 순간 막대기를 쥔 손에 힘이 솟는 것을 느꼈다. 그나마 볼품없는 책이어서 이곳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것만 같았다.
“나도 도와드리지요”
중년의 청소부도 쇠스랑을 들고서 선재의 맞은 편으로 갔다. 청소부의 머리는 짧았다. 흰 머리카락이 군데군데 보이는 그것은 꼭 밤송이 같았다. 삭발한 상태에서 머리를 기른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런 머리카락이었다.
선재나 여동생이나 중년의 청소부나 모두 다 땀을 뻘뻘 흘렸다. 두 번씩이나 서로 교차해서 쓰레기를 뒤집었다. 그래도 헌책은 좀체로 나타나지 않았다.
선재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마음속에서는 벌써 절망감이 치올랐다. 그러나 청소부는 그런 표정의 선재에게 용기를 주었다.
“이번에는 내가 이쪽에서부터 뒤집어보겠소 자, 힘을 내시오. 꼭 찾아야지요.”
그래서 선재는 다시 또 방향을 바꾸어서 쓰레기를 헤쳤다.
어느새 다섯 번이나 쓰레기를 뒤집고 있었다. 그런데 일곱 번째 쓰레기를 뒤집던 순간이었다. 청소부가 번쩍 맨손을 치켜들었다.
“이거, 아니오?”
선재와 여동생은 청소부가서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맞습니다.”
여동생이 책을 가슴에 품으면서 소리쳤다. 그리고 얼른 펴보았다. 예의 그 자기앞수표도 거기에 고스란히 끼어져 있었다. 여동생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청소부는 쇠스랑을 놓은 채 합장을 하였다. 그러고 보니 청소부는 전직이 스님 같기도 하였다. 정신을 차린 여동생이 핸드백 속에서 사례비조로 기만원을 꺼네 건네려 하였지만 그는 결코 받지 않았다.
“사례금 받으러 도와준 것 아니오. 당신들 괴로움을 덜어준 것 같아 내 마음이 기쁠 뿐이요.”
“그럼, 막걸리라도 한잔 하시겠습니까?”
“그거 좋지요.”
선재는 여동생을 먼저 보내고서 그 청소부와 함께 부근에 있는 술집으로 들어갔다.
“혹시 절에 계셨던 분 아닌지요?”
“맞아요. 승려였소.”
청소부는 막걸리를 벌컥벌컥 몇 잔 들이킨 다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았다.
그는 한달 전만 해도 승려였었다. 그런데 몇 명의 형제가 있는데도 다들 노모 부양하기를 꺼려하여 환속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지금 난 참다운 삶을 살고 있소. 신도들의 깨끗한 보시를 진리를 참구한다는 핑계로 그냥 축내는 일도 없어졌고, 이제는 중생들이 버린 쓰레기를 치우면서 내 마음을 닦고 있으니 말이오.”
순간, 선재는 들었던 술잔을 탁자 위에 슬그머니 놓으면서 청소부를 다시 쳐다보았다. 청소부의 얼굴에는 그 어떤 고승의 법문보다도 더 맑고 당당한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기운은 선재의 몸살기를 어느새 싹 달아나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