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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님 만수무강 하옵소서”-네팔의 민주화운동 현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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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통신 - 정문태 1990년 07월 101호
백성이 주인되는
억천만겁 뜨거운 바램을
이 탓 저 탓 둘러대며
거부하는 무리들과
더 이상 한 하늘 아래
더불어 살 수 없음을 깨닫던 날

민중을 향한 총질은
반도에서도 산악에서도
빼닮은 모습으로 피를 부르고
임금님의 만수무강
빌고 있는 걸게 밑에
불발(佛鉢)을 받쳐 든 사미는
소리없이 쓰러져 가고

억장 무너지는 떨리는 가슴 가슴
낫으로 몽둥이로 바뀌어
‘더러운 이름을
오늘은 지우리라’

이 시는 자유로운 정당(政黨) 결성과 사람다운 삶을 외치며 카투만두로부터 시작된 민주주의회복운동(M.R.D)에 바친 나의 졸시이다.
지난 2월 18일 비렌드라 국왕이 민중들의 애타는 민주화의 바램을 뿌리치고 이름뿐인 일당의회 ‘판차야트’(모두 1백40개 의석 가운데 5분의 1은 국왕이 지명하고, 나머지 선거를 통해 뽑힌 후보마저도 국왕의 인준을 거쳐야 하는, 형식만 갖춘 의회)를 계속 고집함으로써 마침내 네팔 전역으로 확산되고, 뜻밖의 거센 저항에 부딪친 정부의 발포(發抱)로 숱한 희생자가 생기면서 시민들의 분노는 마침내 낫과 몽둥이를 든 무장투쟁으로 이어진다.

내가 일본을 떠나 동남아시아의 여러곳을 방문한 후 부처님의 탄생지 카빌라가 있는 네팔을 방문한 것은 네팔의 민주화운동의 불길이 한층 뜨겁던 지난 4월이었다.
네팔 당국에 의해 공항폐쇄령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들은 지 약 보름 뒤인 4월 25일, 서둘러 카투만두로 들어서니 번개와 짝 이룬 큰 비가 네팔 민중들의 눈물인 양 온 천지를 삼킬 듯이 기승을 부려 가뜩이나 긴장한 마음을 더욱 을씨년스럽게 만들었고, 언제나 많은 관광객들로 들끓던 공항에는 10여명 안팎의 여행자들만 굳은 얼굴로 서성댈 뿐 곳곳의 중무장한 군인들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게 부딪쳐와, 마치 죄인 꼴로 흠 잡힐까 두려워하며 총총히 공항문을 나섰다.
그러나 약 1시간 이상을 공항 앞에서 기다렸지만 모든 교통수단이 끊어져 버린듯, 뒤늦게 경비원으로부터 통행금지령이 저녁 8시부터 다음날 아침 6시까지 내려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시각이 이미 저녁 7시 30분이 가까워져 30분이면 통행금지 시간이었다.
거기다가 그때 네팔의 상황은 외국인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증거로 며칠전 진압경찰이 영국·네덜란드 여행자를 사살했다는 소식을 들어 익히 알고 있는 터라 마음이 몹시 어수선해질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경비원의 도움으로 공무중인 벤츠 승용차를 허겁지겁 얻어 타고(사실은 보통 때 택시요금의 6배 가량의 돈을 지불하고) 시내로 접어드니, 드문드문 경적을 울리며 달리는 경찰차만 보일 뿐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린 유령의 도시, 죽음의 도시를 연상시키는 기분나쁜 적막함이 시가지를 뒤덮고 있었다.
8시가 조금 지나 숙소를 찾아드니 여관의 종업원들이 크게 놀라며 뜻밖의 손님이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들에게서 그 동안의 네팔 상황들에 대해 설명을 듣고, 10시경 긴장으로 쪼들린 마음을 풀고 자리에 들었으나 천둥소리 사이로 들려오는 호루라기 소리, 사이렌 소리에 깜짝깜짝 놀라 일어나는 바람에, 깊은 잠은커녕 겨우 밤을 보내고 몇 차례나 창 밖의 상황을 불안하게 내려다 보면서 새벽을 맞았다.

아직도 비교적 히말라야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어 비교적 서구적인 문명의 피해를 적게 입은 나라의 하나인 네팔은 위로는 중국, 아래로는 인도와 같은 큰 나라의 틈바구니 속에서 예민한 정치적 조건과 험난한 지형으로 둘러싸인 고산(高山) 국가로, 인종은 아리안계와 몽고리안이 뒤섞인 약 천 8백만명의 국민 가운데 80%는 힌두교를, 40%는 부처님을 믿으며, 특히 지구 위에 하나뿐인 힌두왕조임에도 불구하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지가 네팔 안에 있음을 큰 자량으로 여기며 종교간의 갈등없이 조화롭게 살아오고 있어, 이웃한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가 끊임없는 인종·종교분쟁을 일으키고 있는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는 평화로운 민족이다.

26일 아침 일찍 조심스럽고 불안한 마음으로 카투만두 중심지의 박물관과 불어 있는 시장을 둘러 보았지만 시장 특유의 활기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고, 대신 건물 벽마다 사망자, 실종자의 처참한 사진과 분노에 찬 격문들이 어지럽게 나붙어 있고, 모퉁이마다 지난 밤의 어지럽던 상황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는 듯 삼삼오오 무리 지은 사람들의 심상치 않은 긴장된 모습들이 눈에 띄었다.
시장의 한산함과는 대조적으로 시내 곳곳의 병원은 오히려 제철을 맞은 시장터처럼 분주하고, 마당 한쪽에는 자식 잃은 어머니의 울음소리와 친구 잃은 사람들의 넋나간 얼굴들이 군인들의 삼엄한 감시 아래 흐느끼고 있어 사태의 심각함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왕궁 쪽으로 가는 길목에는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 있었는데, 그 군중을 헤치고 들어가 보니 담벼락에는 어제 사태로 희생된 사망자의 사진들이 나붙어 있었다.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나의 뇌리에는 광주사태의 아픈 상처들이 한꺼번에 몰려나왔다.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채 사무치는 한이 되어버린 5월의 영령들과 이철규 군을 비롯한 여러 얼굴들이 겹쳐져 묘한 아픔과 씻어내지 못한 민중의 한(恨), 아픈 역사의 핏빛 되새김질을 남의 땅, 깊은 산골에서 똑같이 느끼면서 새삼 감회에 젖어 있었다.
왕궁은 곁보기에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양 평온해 보이지만, 중무장한 경비군들의 눈에는 이미 민중들의 분노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를 깨달은 듯, 두려움에 떨고 있어, 결코 이들이 임금님의 느긋한 웃음을 그리 오래는 지켜주지 못하겠구나 하는 확신을 느끼게 하였다.

대체적으로 이곳 네팔의 지나간 민주화의 자취를 살펴보면, 1940년대의 민주화운동을 주도하여 51년 라나왕조를 뒤엎고 입헌군주제를 만들어낸 의회당이 59년 총선을 통해 집권을 하게 되나, 60년말 마헨드라 국왕에 의해 의회제도는 폐지되고 정당의 참여가 금지된 채 이름뿐인 관선의회, 즉 판차야트가 도입되면서 힌두왕정체제가 자리를 굳히게 된다.
이번의 민주화 회복운동은 야당인 의회당(N. C. P, 중도우익)과 국내활동이 전면 금지된 7개 정당연합(U. L. F, 좌익전선 연합)이 중심이 되어 대학생은 물론 중·고등학교까지 파급되어 국가평회의 비정당(非政黨) 정치체제와 30년간의 절대왕정체제 종식, 더불어 인권회복을 요구하는 투쟁으로 이어졌다.
지난 2월의 평화로운 집회를 무력으로 진압해 시민들의 분노를 사더니 급기야 3월 이후에는 군인들의 발포로 수많은 사망자가 생기면서 시민들도 투쟁으로 맞섰고, 다시 4월로 접어들며 수천의 공무원들이 파업에 가담하면서 학교는 무기한 휴교령이 내려진 가운데 20여만 명의 민중들이 다당제 도입과 헌법개정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에 이른 것이다.
바로 지난 4월 25일에는 비렌드라 국왕의 해외망명을 요구하는 시위대를 향해 또 다시 발포함으로써 18명의 추가 사망자가 발생한 것이다.
아름다운 네팔, 조화로운 네팔, 오랜 전통과 특이한 문화를 가진 네팔의 아픔이 남의 일 같지 않고, 아직도 민주화로 가고 있는 바로 우리들의 모습임을 생각하며 우두커니 서 있는 내 등 뒤로, 겁에 질린 군인들의 무겁게만 느껴지는 걸음소리가 들려오고, 시민들의 큰 함성과 매서운 눈망울이 총구보다도 더 무서운 열기를 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절대왕권보다도 총구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민주화를 향한 민중들의 의지(意志)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소리내어 을 수도 없는
자식 잃은 어미의 한서린 눈물과
까닭도 모른 채
아비 잃은 어린아이의
넋나간 얼굴이
뼛속 깊이 사무쳐 오는 살육의 현장
반역의 되새김질
1980년 5월처럼
1990년 4월의 카투만두

아직도
꿰뚫지 못하는 앞잡이들이
피웃음을 훌리고 있는
엇갈린 하늘 아래
이 깨물고 되갚음을 다짐하는
사람들 사람들 사람들
이윽고
무서운 역사되어 보여주리라
가르쳐주리라
역사적 진실만이 이긴다는 사실을.

1990년 4월
카투만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