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삼부경(淨土三剖經)의 바른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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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이기영
1986년 06월 52호
무량수경(無量講經)과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과 아미타경(阿彌陀經) 이 세가지 경을 합해서 정토삼부경이라고 부르는 습관은 일본에서 생긴 일이지만 일단 우리는 이 세 경이 같은 성격의 경이라는 점에서 일괄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생각한다.
모두다 서방극락정토 아미타불의 나라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정토신앙에 관련된 문헌들이다.
경의 이름에 나오는 무량수불은 「아미타아유스」의 번역이며 무량한 생명이라는 뭇이지만, 원어는 때로 「아미타아브하아」라고 되어 있는 것도 있어서 무량광불(無量光佛)이라고도 번역된다.
정토사상에는 흰두교의 영향이 크다고 보고 있는데 극락정토라는 불사(不死)의 세계, 불멸의 세계를 생각한 것은 인도 최고의 경전인 리그베다에도 이미 나타난 것으로 학자들은 이 경들에 묘사된 극락정토나 아미타불의 속성과 성격을 이러한 힌두교 성전과의 비교 대조를 통해 찾아보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아미타」는 불사(不死)를 의미하는 「야프리타」에서 왔다고 해석하기도 했고 그것은 태양 또는 주신(酒神)인 「소오마」를 신격화했던 데에서부터 생겨난 것이라고도 보았다. 그것은 이 신격(神格)이 광명과 관련있는 존재로서 묘사되고 있는 때문이기도 하다.
또 극락정토의 묘사를 보면 많은 종전들이 있고 거기에는 또 화려한 왕좌(王座)들이 있는 것으로 그려지고 천녀(天女)가 아름답게 장식을 하고, 노래와 음식이 풍부한 곳이라고 적혀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쿠산 왕조시대의 부호들의 생활상 또는 그들이 이상으로 삼고 있던 세계를 그린 것이 아닌가 하여 이 경의 성립연대 자체를 이 시기로 보는 주장도 나왔다.
또 극락정토에는 한 그루의 거대한 보리수가 있다고 했는데 그 높이는 천육백유순이라고 하는등 매우 현란한 묘사를 했다. 이것은 카우시타키 ·우파니살에 범천(楚天)세계에는「이리야」라는 거목이 있다는 표현과도 일치하는 사고방식이며 또 푸라아나 경전에도 비슷한 서술이 있어서 무언가 이들 사이에는 연관이 있는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불교의 우주론은 힌두교의 것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 많은데 특히 천(天)의 개념은 분명히 그 영향하에 성립한 것이다. 극락에 태어난 사람들은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과 같다. 이러한 표현등이 있는 것은 극락과 타화자재천의 개념사이에 밀접한 연관을 부정치 못하게 한다.
또 극락정토를 서방에 있다고 보는 것은 인도에서는 일찍부터 전래된 사상이다.
베에다 중에도 특히 중시(重規)된 사이비트리이 송(題)을 공부하고 외울 때에는 서방을 향해 서방에서 보고 있는 스승을 향해 동쪽에서 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 베에다에서는 서방의 신을 물을 관장하는 「봐루나」신이라고 지척해 왔다.
그러므로 아미타불과 「봐루나」 신과의 사이에는 무수한 관련이 있으리라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빛은 어느 나라 사람들이나 다 신성한 것의 상징으로 생각했다. 옛날 우파니샤드의 성인은 이렇게 읊었다. 「이 하늘보다도 높이 모든 것의 뒷면, 거기에서 더할 나위없이 높은 세계에서 빛나는 광명은 실로 이 사람의 내부에 있는 이 광명이다」 여기에는 객관으로서의 광명과 더불어 내심으로서의 광명이 교묘하게 일치하는 존재로서 묘사되었다. 표현이 극적이고 상징적이 되어서 그렇지 그 상징의 모습과 극적인 요소를 제외한다면 진짜 알맹이는 어지간히 대승불교의 정신에 접근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무명수가 과연 장수(長壽)냐 하면 그것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을 것이다. 생명이 단순한 수명이 아닌 것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아미타불에는 원광(圓光)이 있는데 그것을 서양의 영향이라고 웃지 못할 넌센스까지 저질렀다. 이것은 오히려 그 서양 것보다도 더 오랜 기원을 가진 것이다.
아미타불은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라는 두 보살이 협시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형식상으로는 힌두교에도 일체삼신(一 三神)의 관념이 있었고, 그러한 신상도 남아 있어서 선례(先例)가 없지 않으나 이제 그 내용은 완전히 다른 것이 되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도 과연 힌두교의 일체삼신 사상이 앞서느냐 그것은 아직도 검토되어야 할 문제이다. 이러한 정토 경전이 어느 때 어디에서 성립된 것이냐 하는데 대해서는 많은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있어서 확실한 것을 이야기 할 수 없다. 그러나 학자들은 불상의 출현이 서력기원 후의 일이라는 점을 들어 불상의 제작에 관해 언급하는 이 문헌들은 적어도 그 후의 일, 즉 서력 기원후의 일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보고 있다.
정토 경전에 나오는 술어(術語)들은 대체로 소승불교의 용어들이다. 이 점에 의거하여 학자들은 정토 경전이 일단 소승불교의 체계가 확립된 후의 일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면 그 성립된 장소는 어디겠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이 문제에 대하여는 이 경전들을 한문으로 번역한 사람들의 출신지가 대부분 서역 및 북인도라는 점을 들어 대체로 그 지역이 북인도나 서역이 아닌가 보고 있다.
정토삼부경이 성립된 지역은 매우 더운 지방이었다고 생각되고 있다. 특히 무량수경에 의하면 극락에는 바람이 불어서 쾌적하다고 적혀 있고 또 세탁과 건조에도 힘이 만든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런 언급은 남방의 더운 지방 사람들의 회구나 심정을 반영한다고 보는 것이다.
정토경천은 탑파숭배가 아니라 불상숭배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상의 조각은 이 경의 성립 또는 유포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모든 점을 고려하여 학자들이 대체로 수긍하는 정토경의 성립연대는 서기 후 140년을 전후하는 시기가 아닌가 보고 있다.
정토삼부경의 요지는 청명(稱名) 염불을 통한 정토왕생에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다. 그리하여 이 삼경을 소의로 하여 동아시아 불교사상에는 하나의 강력한 타력신앙의 조류가 나타났고 오랜 기간에 걸쳐 이 지역문화의 저변에 깊숙히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교단을 말하는 사람들이 이 경들을 어디에 분류하느냐 하는데 대해서 명석한 언명(言明)을 회피한 것은 과연 무슨 까닭이었는지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유독 중국의 도탁(導卓 562-645)만이 차토입성(此土入聖)을 성도문(聖道門)이라 하고 왕생정토(往生淨土)를 정토문이라고 구분하였을뿐 다른 모든 교판들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까닭은 그들의 관심이 보다 철학적인데에 치우쳐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도 생각되나 우견(愚見)으로는 이 정토 경전들은 이를테면 대승불교 권내에 있어서의 인과교내지는 인천교(人天敎)라고 보아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문장의 표면만을 읽는 사람에게는 이 경들이 단순히 그러한 권선징악 인과응보의 도리만을 이야기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우려가 있지만 깊이 그 내면적인 정신을 이해하는 입장에 서서 보면 소승의 인천교에서 마저도 참다운 대승의 의미를 찾아낼 수 있듯이 오히려 그 이상으로 대승의 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이 경들이다.
이제 필자는 가능한 한 상정의 뒤에 숨은 그 진의를 발견하는 입장에서 정토경이 가지는 뜻을 찾아내어 독자의 일조(一助)가 되게 하고자 한다.
무량수경 하권에는 정토의 의미를 다음과 같은 말로써 표현하고 있다.
「그 국토에 있는 만물에는 아소심(我所心)이 없고 염착심(染着心)이 없다. 나아가고 들어오고 하는 일상생활이 도무지 정에 얽혀 있지 않아 수의자재(隨意自在)하고 맞고 안맞고 하는 일이 없다. 또 거기에서는 피·아의 구별이 없고 경쟁과 싸움이 없다.
그저 모든 중생에 대한 자비심 효익심만이 있을 뿐이다. 사람들의 마음이 부드럽고 균형이 잡혀 있으며 분노와 원한이 없고 무엇에든지 걸리지 않고 또 싫증을 내거나 태만한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저 평등한 마음 모든 것을 견디어내는 마음 깊은 마음 가라앉은 마음만이 있다. 진리를 좋아하고 그것만을 따르며 기뻐하는 마음이 있어 온갖 종류의 번뇌가 다 사라졌고 따라서 좋지 않은 생존양식에 빠지는 일이 없다.
그러므로 보살이 해야할 모든 일들이 다 만족되고 무량한 공덕이 완전히 성취되어 있다. 선정도 지혜도 다 이루어졌으므로 사람들에게는 그 육안이 철저히 맑아 확실히 이해하지 못하는 일이 없다. 또 천안이 한량없는 끝까지 다 통달할 정도로 밝으며 법안(法眼)이 모든 도(道)를 관찰하여 그 구석구석까지 다 알게 되어 있으며 혜안(慧眼)이 진리를 보고 저 피안에 이미 도달해 있고 또 불안(佛眼)이 법의 본성을 환히 깨달아 조금도 남김이 없이 무애지(無 智)로써 사람들에게 연설을 하며 삼계가 공허하고 실재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불법을 구하는 뜻을 발하고 변재로써 중생들의 고질인 번뇌를 제거하고 없애간다. 그곳의 사람들은 세상의 비속한 언어를 즐겨하지 않고 오직 정론(正論)만을 즐겨 한다. 그곳의 사람들은 모든 선한 일을 닦아 오로지 불도만을 따라가되 모든 법이 다 적멸하다는 것을 알고 조금도 의심이나 공포를 가지지 않는다. 이렇게 일승(一乘)을 완전히 알고 피안에 도달하여 모든 의심을 다 끊어버리는 지혜는 오직 마음에서 살미암은 것이다. 불교의 진리에는 모든 것이 망라되어 있고 아무것도 제외되는 것이 없다.
불교에는 원래 비유법이 많다. 또 그것은 인도인의 사유방법의 한 특정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불경의 말씀은 그러한 전제(前提)를 이해한 아래에서 이해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위의 구절은 정토에 대한 다른 모든 현란한 현실적 묘사 우의적 묘사를 그냥 그대로 실재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은 잘못된 이해의 방법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게 해 주리라 믿는다.
정락정토는 아무리 현세적 복락이 극대화된 경계인 것처럼 그려졌다 하더라도 위해서 인용한 귀절에 나타나는 바와 같은 마음의 경지가 아니라면 한낱 환상이요 망상일 따름이다. 극락의 바탕과 본질은 마음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 마음의 개발과 정화를 수반하지 않는 어떠한 다른 수단으로도 그것을 보거나 그 속에 들거나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같은 경은 현실의 다섯가지 악이 이 세상을 극심한 고통의 땅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자세하게 지적하고 매번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사람이 능히 이러한 고통 속에서 일심으로 제의(制意)하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오직 선한 일을 하고 악을 짓지 않으면, 그 혼자만이 고통을 벗어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해서 생긴 복덕은 온 세상과 천상의 중생까지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고 있다.
염불과 칭명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인가를 우리는 경구(經句)를 통해서 직접 듣는 것 같다. 이러한 말씀을 우리 고려의 보조국사나 신라의 원효대사는 누차 뚜렷한 말씀으로 강조해 주셨던 사실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무량수경은 말한다.
지혜는 대해와 같고 삼매는 산왕(山王)과 같다. 지혜의 빛이 밝고 맑은 것은 태양이나 달보다 더하다. 그 맑고 흰 것이 가득차 있기로는 마치 설산과 같다. 또 그 마음이 넓고 차별없는 것으로 말하면 대지와 같다.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좋은 것과 싫은 것, 그런 것들을 차별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그 지혜와 삼매의 능력이 강하기로 말하면 맑은 물과 같다. 모든 때와 더러움을 다 씻어버리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화왕(火王)과 같다. 모든 번뇌를 불태워 버리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연꽃과 같다. 세간으로 부터 오염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대승 즉 큰 수레와 같다. 모든 어린 싹들을 싣고 가서 생사에서 벗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두꺼운 구름과 같다. 위대한 법의 천둥을 진동시켜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사람들을 깨어나게 하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큰 비와 같다. 감로의 법을 비오듯 뿌려서 중생들을 적시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금강산과 같다. 중마(衆魔)와 외도가 능히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정토왕생의 뜻과 염불칭명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