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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왕 살생을 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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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 편집실 1986년 06월 52호
백제 제29대 법왕(法王)의 이름은 선(宣) 또는 효순(孝順)이라고 불렀다. 서기 599년에 즉위했다.
즉위하던 해 겨울에 왕은 조칙을 내려 살생을 금했다. 민가에서 기르고 있던 매 종류들을 놓아주게 하고 고기잡이며 사냥도구를 불태워버리게 하는 등 살생을 금지했다.
그 이듬해에는 승려 30명을 입도(入道)시키고 그리고 당시 서울 사비성에다 왕흥사를 창건하기로 했다. 법왕이 겨우 그 기초를 세우다가 승하했으므로 무왕이 즉위하여 아버지가 기초한 사업을 계승하여 수십여 년에 걸쳐 창건하고 그 이름을 미륵사라고 이름했다.
미륵사는 경관이 수려하여 뒤로 논산을 등지고 앞에는 강이 흐르고 꽃이며 나무들이 또한 빼어나게 고와서 사철의 아름다움이 갖추어져 있었다. 왕은 매양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절에 와서는 그 경치의 장려함을 감상하곤 했다.

보덕스님 절을 옮기다
보덕(普德)화상은 고구려 보장왕 때의 고승이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에 불교를 받아들여 대대로 불법을 융성시켜 왔으나 27대 영류왕대에 이르러 도교를 받아들이면서 불교를 차츰 멀리하였다.
그 다음 보장왕은 본격적으로 도교를 승상하여 이제까지 신봉해 오던 불교를 멀리하고 도교의 경전 만을 배워 강설하는 것이 사회풍조가 되고 말았다. 심지어는 불교 사원을 폐지하고 도교의 도관(道館)으로 만들어 승려를 박해하고 도교의 도사들을 우대하였다. 이러한 일들은 그 당시 막강한 힘을 가졌던 연개소문등이 왕을 충동하여 그 영향을 미쳤으며 또한 도교를 신봉하면서 백성들에게도 쌀을 다섯 말씩 바치도록 하는 오두미교(五斗米敎)를 시행하여 백성들의 원망이 높았다.
그리하여 혜편(慧便), 혜자(慧鉉), 승륭(僧隆), 혜관(惠灌)등의 고구려 고승들은 수행하고 교화하던 절을 도교에 빼앗기고 신라, 일본으로 떠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실을 안타까이 생각한 보덕화상은 왕에게 나아가 간청하였다.
“상감마마 이 나라는 처음부터 불교를 받아들여 부처님의 자비, 화합정신을 이어받아 상하 군신이 화목하고 백성들이 복되게 지내 왔읍니다. 그런데 상감께서는 도교를 받아들인 후 불법을 박해하니 백성들의 존경을 받던 고승들이 나라 밖으로 떠나게 되어 민심이 분멸되니 나라의 앞날이 걱정입니다”
“듣기 싫소 음식도 바꿔 먹어야 구미를 돋구는 법이고 의복도 새것으로 바꿔 입어야 청신한 맛이 있는 법이요 그러니 화상도 내가 하는 일이 못마땅하거든 이곳을 떠나면 될 것이 아니요”
이 말을 들은 보덕화상은 이렇게 생각했다. 「나라가 어지러우니 임금의 눈도 흐려지는구나 아무리 간청하여도 소용이 없으니 이것 역시 천운(天運)이다. 내가 떠나는 것만 같지 못하다」하고는 절에 돌아와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내일 일찍 이 곳을 떠나야겠으니 모든 준비를 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너희들 중에 수도할만한 좋은 도량을 보아 둔 사람이 없느냐?”
“몇 해 전에 찾아본 남쪽의 완산주 고달산이 좋아보였읍니다”“그러면 내일부터 그곳에 옮겨가서 살아야겠으니 그리 알아라”
그 이튼날 새벽에 한 제자가 일찍 일어나서 도량석의 염불을 하며 주변을 살펴보니 살던 철은 그대로인데 주위의 산천은 아주 딴판으로 바꿔져 있었다.
어리둥절해진 제자가 스승에게 쫓아가 말씀드렸더니 “간밤에 내가 신통력으로 우리가 살던 평양의 반룡사를 이곳 완산주 고달산(高達山)으로 옮겨왔으니 이상하게 생각할 것 없다.”라고 하셨다.
이때가 고구려 보장왕 9년(650년)의 일이다. 수행과 학식이 뛰어난 보덕화상은 특히 열반경에 통달하여 열반종(涅槃宗)의 종조가 되었으며 원효스님도 보덕화상에게 열반경을 배웠다고 한다.
「고구려고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수나라 양제는 대업 8년 고구려 제26대 영양왕 즉위 23년 서기612년에 30만 군사를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쳐들어 왔다. 양제 10년 10월에 고구려 왕은 양제에게 글을 보내어 항복을 빌었다.
그 때 어떤 한 사람이 품속에다 조그만 강궁(强弓)을 몰래 간직하고서 국서를 가지고 가는 사자를 따라 양제가 머물고있는 배 안으로 들어갔다. 양제가 고구려의 국서를 받아 읽는 사이에 그 사람은 품속의 강궁으로 양제의 가슴을 쏘아 맞혔다.
양제는 군사를 돌이켜서 그 휘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천하의 주인으로서 몸소 일개 소국을 정벌하다가 이로움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니 실로 만대의 웃음거리다”
우상(右相) 양명(羊明)이 있다가 이렇게 아뢰는 것이었다.
“제가 죽어서 고구려의 대신으로 태어나겠읍니다. 그래서 꼭 멸국시키어 제왕의 원수를 갚겠읍니다”
양제가 죽고 난 뒤, 양명은 고구려에 태어났다. 나이 열다섯, 총명하고 영특스러웠다. 당시 무양왕이 그의 뛰어남을 듣고 불러들여 신하로 삼았다.
그는 자칭 성을 개(盖), 이름을 금(金)이라 했다. 지위가 소문(蘇文)에까지 이르렀으니 소문은 곧 시중에 해당되는 직책이다.
개금은 왕에게 진언했다.
“솥에는 세개의 발이 있고 나라에는 3교(三敎)가 있는 법입니다. 제가 살펴보니 나라 안에 단지 유교 불교만 있고 도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나라가 위태롭습니다”
왕은 개금의 말을 그럴싸하게 여기고 당나라에 요청했더니 당 태종은 서달(敍達)등 도사 8명을 보내 주었다.
왕은 기뻐하며 불교의 사찰을 도관(道館)으로 바꾸고 도사를 높여 유사(偏士)의 위에 처하게 했다.
도사들은 국내를 돌아다니며 유명한 산천을 진압했다.
옛 평양성의 형세가 아직 홍왕의 여지가 충분함을 뜻하는 초승달 모양으로 되어 있는 것이 못마땅하여 그들은 남하(南河)의 용을 주술로부터 만월형의 성을 덧쌓도록 했다.
그리고는 이름을 용언성(龍堰城)이라 하고 참(讖)을 지어 용언도(龍堰堵)라 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 있는 신령한 바위를 깨뜨려 버리기로 했다.
개금은 또 진언하여 나라의 동북으로 서남으로 장성을 쌓도록 했다. 그 때 남자는 모두 그 축성의 부역에 징용되고 여자가 대신 농경을 했다. 공사는 16년만에 끝났다.
보장왕대에 이르러 당 태종이 몸소 6군을 거느리고 쳐들어 왔다. 그러나 불리하여 되돌아갔다.
당 고종 19년 서기 668년에 우상(右相) 유인궤(劉仁軌)와 대장군 이적(李積)과 그리고 신라의 김인문(金仁問)에 의하여 나라는 멸망당하고 말았다.
고승전에는 보덕화상에게는 11인의 고제(高弟)가 있다고 적혀 있는데 무상(無上)스님은 제가 금취(金趣)등과 함께 금동사를 개창했고 적멸(寂滅)과 의융(義融) 두 스님은 진구사를 지수(智 ) 스님은 대승사를 일승(一乘), 심정(心正), 대원(大原)스님은 대원사를 수정(水淨)스님은 유마사를 사대(四大), 계육(契育)스님은 중대사를 개원(開原)스님은 개원사를 명덕(明德)스님은 연구사를 개창했다. 그리고 개심(開心)스님과 보명(普明)스님도 역시 전기가 남아 있으며 훌륭한 스님이셨다.
모든 행적으로 보아서 보덕스님의 학덕과 수행을 후세에 기리 남을만한 행적을 보이신 고승이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