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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정도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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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역해 - 법성 1986년 06월 52호
근본불교의 실천관

사정경(邪正經)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슈라아바스티이국 제타 숲 외로운이 돕는 동산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삿됨과 바륨이 있으니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라. 너희들을 위해 설명하리라. 어떤 것이 삿됨인가 삿된 소견과 나아가서는 삿된 선정이다. 어떤 것이 바름인가 바른 소견과 나아가서는 바른 선정이다.
어떤 것이 바른 소견인가. 보시가 있고 여래의 교설과 재(齋)가 있으며, 선한 행위, 악한 행위와 선하고 악한 행위의 갚음이 있고, 이 세상과 다른 세상이 있고, 부모가 있고 중생의 태어남(生)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며, 또한 아라한이 열반으로 잘 향기하고 잘 이르러 이 세상과 다른 세상에서 스스로 알고 중득하여 나의 생 (生)은 이미 다하고(我生已作) 범행이 이미 서며(梵行已立) 할 바를 모두 마친(所作已作) 곳에 완전히 머물러 다음 생의 몸을 받지 않음(不受後有)을 스스로 안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바른 뜻인가. 탐욕을 뛰어난 뜻, 성냄이 없는 뜻, 해치지 않는 뜻이다.
어떤 것이 바른 말인가. 거짓말 ·두 말 ·나쁜 말 ·꾸밈 말을 떠난 것이다.
어떤 것이 바른 행위인가. 살생과 도둑질과 사음을 떠난 것이다.
어떤 것이 바른 생활인가. 의복 ·음식 ·와구 ·탕약을 법다이 구하고, 법답지 않게 구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것이 바른 방편인가. 하고자 함澈)과 정진(精進)의 방편이니 번뇌를 떠나며 부지런하고 조심하여 항상 물러섬이 없이 행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바른 생각인가; 수순하는 생각이니 헛되고 망녕되지 않는 것이다.
어떤 것이 바른 선정인가. 마음을 어지럽지 않은 데 머물러 두고 굳게 거두어 가져 고요히 삼매 (三味)에 든 한 마음이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그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잡아함경 권28)

(해설)
짙은 안개속에 휘말려 들듯 혼미에 혼미를 거듭하는 현실상황은, 삶 속에 무엇이 진실(正道)인가를 묻고자하는 창조적인 인간들의 가슴속에 깊은 실존적 고통을 안겨주고 있다. 이것과 이것의 대립물로서 나타난 저것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해서 그것에 가담하라는 언어적인 폭력이 범상한 생활인들의 뇌리를 질타하고 있다.
물론 저것이 주장하는 형식논리는 현실에 관한 어느 정도 바른 시각을 열어 주고 있으며, 오늘날의 현실상황이 안고 있는 모순해결을 위한 타당한 실천방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므로 역사를 사랑하는 모든 양심있는 생활인들은 저것의 타당한 주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야 하며 그 형식논리에 실체를 부여하기 위하여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저것이 주장하는 형식논리는 지지하면서도 그 형식논리에 참다운 실체를 부여해가려는 구체적인 실천운동에 있어서는 저것이라는 조직의 굴레 속에서 만이나 저것만이라는 논리를 고집하지 않는 것은 이것이 안고 있는 모순의 복잡성과 저것까지도 배제하지 않고 있는 모순의 포괄적 측면 때문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가슴속에 우리들 자신도 모르게 스며드는 어두운 그림자가 있으니 그것은 저것의 지극히 타당한 형식논리의 산출 근거속에 어쩌면 지극히 타당하지 못한 제 조건이 스며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인간이란 누구나 진실이 아닌 것을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부정의 정신을 통해서만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인간으로 성장해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개방된 사회 건전한 사회란 그러한 부정의 자유가 모든 이들에게 공유되어지며 가치의 다양성이 인정되어지는 그러한 사회일 것이다.
오늘날 범상한 생활인을 좌절케하는 것은 아닌 것을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게 하는 이것의 억압구조와 함께‘이것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저것의 부정의 행위가 자신을 다시 특권화하고 기득권화해감으로써 역사의 향방을 염려하는 많은 양심인 일반의 의치를 총체적으로 수렴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일 것이다.
물론 이것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저것의 부정행위는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며 현실적인 위험부담을 안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무엇 어느 누구도 우리들 범상한 생활인 일반위에 군립하는 우상이나 메시아가 될 수 없으며 되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닫혀진 의사소통의 통로와 가진 자(이것 뿔 아니라 저것까지 포함하여)의 정보독점으로 말미암아 대다수 가난한 모든 삶들은 이것과 저것의 진정한 실체와 그들이 외쳐되는 정치적 선전구호의 내용을 알지 못한 채 또한 그것을 알기에는 너무도 바쁘고 고달픈 나날을 꾸려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도 금남로와 청계천 동대문과 전라도의 들판에서 가난하고 고달프나 선한 눈빛을 잃지 않으며 말 없으나 말없는 말로 역사 앞에 항변해가는 우리들의 소박한 이웃들은 다할 수 없는 목숨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
진정 우리가 부정하고자 하는 역사의 모순이 지양되어야할 곳도 이와 같은 범상한 이웃들의 선한 눈빛속일 것이며 우리가 규정해내고자 하는 긍정적인 삶의 가치들이 실현되어야할 곳도 범상한 이웃들의 그늘진 가슴속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에 대한 우리들의 부정행위는 부정의 대상을 자아에까지 적용함으로써 부정행위 자체를 실체화시킴이 없이 역사와 민중 앞에 스스로를 겸허하게 낮출 때만 참으로 역사발전에 기여하는 부정행위가 되어질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것에 대한 우리들의 부정행위가 스스로를 실체화시킨다는 것은 이것이 갖는 모순의 실체화나 모순의 암묵적 승인과 같은 것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주체의 실체화는 객체의 실체화이며 있음의 실체화가 곧 없음의 실체화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의 모순을 그 모순의 부정을 통해 자기에게 돌아오는 어떤 댓가를 바람이 없이 끝없이 부정해가야 한다. 그리하여 세상의 병을 치료해주는 의사가 되어야 하지만 의사가 되기 위해서 세상 사람이 계속 아프기를 바라는 어리석음에 떨어져서는 안될 것이다.
그 이유는 곧 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약이 꼭 필요하지만 약은 몸이 치료되면 버려야 하는 것과 같으며 우리들이 외쳐대는 부정과 비판의 언어들은 상황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들은 인간다운 삶의 확보와 함께 지양되어야 할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본경에서 불타가 말씀하신 바른 견해란 모든 것 속에 있는 상대적인 조건들을 끝까지 읽어냄으로써(畢竟空)
아무 것도 우리 앞에 우상으로 남겨 놓지 않는 철저한 부정의 정신을 말한다. 그렇게 하여 이것뿐 아니라 저것 속에 있는 모순까지 동시에 반성해냄으로써 열려진 역사의 지평속에서 항상 새롭게 긍정적인 삶의 가치들을 창출해내는 대긍정의 정신을 말한다.
곧 이러한 바른 견해로 세상을 살아가는 치우침 없는 인간은 이것과 저것·있음과 없음 모두를 즉자적(卽自的)인 것으로 파악하지 않는다. 그리고 주어진 대상영역을 주체적인 인식범주 밖에 독립된 그 무엇으로 외재화시키지 않지만 그렇다고 순수한 정신의 내용으로 내재화시키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그는 세상에 간여하되 세상에 걸리지 않으며 끝없이 모순을 부정하되 그 부정을 중오에 찬 대상의 파괴나 자학으로 얼룩진 자아의 희생속에서 담보하려 하지 않는다. 바른 견해에 의한 부정은 모든 것을 끝내 파멸로 몰아가는 부정이 아니라 조화로운 생명질서로 재편성해내는·부정인 것이니 이와 같이 부정( 選)이 살려냄( 照)의 대긍정으로 전환되는 사유의 운동을 대승은 반야(般若) 라고 말하고 선종(禪宗)은 참 마음(眞心)이라 이름한다. 물론 정견, 반야, 참마음의 대긍정은 부정을 통과한 긍정이므로 이것 저것 선과 악을 모두 신적인 일자(一者)의 현현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결국 악 그 자체까지 신성을 부여받게 되는 범신론적인 입장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바른 견해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로운 사람은 이미 주어진 하나의 있음, 곧 제 조건속에서 생성되어지는 있음(有:이 있음에는 정치권력, 외세, 매판자본, 체제. 이데올로기 뿐 아니라 신, 자아, 종교등 우리들이 알 수 있는 모든 것, 규정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대입할 수 있다)을 절대화시키거나 우상화시킴으로써 그 있음에 종속되어버리는 노예적인 생활을 거부한다(非有). 그러나 그 있음의 부재, 기득권의 비소유(無)를 실체화시킴으로써 있음의 영역 기득권의 무리를 대응하지도 않는다(非無). 있음의 부채를 실체화시킴으로써 있음에 대용하는 것은 언제나 그 비소유의 공허가 어떤 있음으로 채워지면 새로운 기득권자로 자신을 군림시킬 그러한 대응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떤 제3의 입장 속에서 이것과 저것을 도외시하며 살아가야 하는 가. 창조적인 인간은 있음과 없음 이것과 저것을 실체화시키지 않지만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제3의 입장을 만들어 이것과 저것, 있음과 없음에 대한 역동적인 대응이 없는 무관심의 길도 걸어가지 않는다(非非有非無).
그렇다고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는 식의 기회주의 노선이나 아무것이 와도 환영의 노래를 부르겠다는 무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지도 않는다(非亦有亦無).
오히려 그는 이것과 저것 있음과 없음의 실체가 부정된 역사의 전체성에 서서 역사 속에 내포된 모순을 부정하며 모든 긍정적인 삶의 가치들을 끝없이 재생산해 간다. 곧 그는 영원한 부정자이며 영원한 긍정자이다.
그도 물론 기득권을 지속적으로 자기화하려는 모든 억압구조에 대항한다. 그러나 창조적인 인간의 대항행위는, 대항행위를 통해서 기득권자로부터 어떤 댓가를 받아내려는 대행행위가 아니다. 그리고 기득권자의 있음을 깨뜨림으로써(滅有方無) 그 있음의 공백속에 자신이 새로운 기득권자로 대체해 들어가려는 대항행위가 아니다. 그의 부정하는 행위는 기득권자의 있음이 본래 스스로 있음이 아님을 확인시켜 줌으로써(郞有本無) 자신의 기득권을 고수하기 위해 모든 강압적인 수단과 허위 의식을 동원하고 있는 그 억압자마저 해방해버리는 그러한 대항행위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른 견해로 삶의 진실을 확인해냄으로써 자아를 해방해가는 창조적인 인간은 신, 진리, 민중, 역사의 이름으로 민중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치 서구의 종교계급들이 신적인 권위를 등에 젊어지고 세속적인 것 위에 성스러운 자(聖職者)로 남아서 신적인 계시를 중재하려함과는 달리 대승의 보살(Bodhi--S人ttv人)이 깨달음이라는 신비영역을 내세워서 삶들 위에 군림하지 않고 깨달은 삶(覺有情) 자각된 민중 그 자체로 남아 있음과 같다. 또한 서구 사회과학의 전통 속에서 사회 변혁의 이론들이 메시아 적인 해방의 주체를 절대시하는 입장과는 달리 대승의 보살은 중생구제의 실천을 쉬지 않되 내가 중생을 구하고 있다는 환상과 새로운 자기 집착마저 끝까지 버려버림과 같다(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郞非菩薩:金剛經)
그러나 지금까지의 역사적 과정 속에서는 민주를 말하는 자가 민(民) 그 자체가 되어본 실례는 찾기가 드물었다(조선조 농업이 천하의 본바탕이며 백성이 나라의 뿌리라는 정치적 구호는 바로 유학자들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음이 그 단적인 예다)그러나 불교의 중도적 실천은 삶들의 해방을 말하는 자는 실천 그 자체를 절대화하지 않음으로써 민중 그 자체 자각된 삶 그 자체로 남아 있기를 요구한다.
곧 이것과 저것, 있음과 없음 성과 속의 모든 실체화에서 벗어난 치우침 없는 시각 속에서(正見, 正思推, 正念) 역사의 진실을 끝없이 확인해 내고(正精進) 그 진실을 증거하며(正語) 진실에 부합된 행위와 생활(正業正命)을 통해서 삶들의 진정한 평화(正定)를 달성해갈 것을 요구한다.
특히 천태선사의 법계차제초문은 팔정도가운데 바른 생활을 다섯 가지 잘못된 생활방식(%命)에서 벗어난 치우침 없는 삶이라고 정의하고 있으니 천태선사가 들고있는 잘못된 생활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어떤 권위를 조작하고 신비를 나타내는 것(爲利養故 許現異相奇特) 둘째,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어떤 일의 공덕을 허위로 선전하는 것(爲利養故 自說功德) 세째,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결정론적인 역사관이나 잘못된 세계관을 사람들에게 주입하는 것(爲利養故 古相吉凶 爲人說法) 넷째,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대중을 강압적으로 위협하여 대중의 지지를 얻어내는 일(爲利養故 高聲現威 令人畏敬) 다섯째,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기가 받은 지지나 성원을 지나치게 홍보하는 일(爲利養故 稱說所得 供養) 등이다.
천태선사의 지적과 같이 중도적 삶을 사는 자, 바른 견해로 진실을 추구하는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인생에 상처를 입히거나 진실을 왜곡함으로써 인간을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시하지 않는다.
그의 노동, 언어, 인식(身, 口, 意、 三業)은 상황을 치우침 없이 받아들이는 존재의 장이면서 상황을 조화롭게 재생산해 나가는 창조의 통로이다.
그러나 중도적인 실천의 인간도 진실이 허위로 변모해버리고 허위가 진실을 위장해버리는 암울한 시대 속에서는 때로 물러섬과 침묵으로 항변하기도 할 것이다.
그의 삶은 이것과 저것의 패거리들을 떠남이 아니지만(不離) 이것과 저것에 전적으로 종속되지 않으므로(不郞) 외형적인 고독을 감수해야할 것이다.
그는 그와 같이 당파적인 의미의 벗들을 갖지 못하지만, 자각된 민중 그 자체로 남아 있으므로 양심있는 생활인 모두를 자신의 열려진 벗으로 삼을 것이며 역사적인 시간을 넘어 새로운 생명의 벗들을 만날 것이다.
신라 원효(元曉)는 왕권불교의 이용물이 되기를 거부했던 자신의 부정정신과 그의 종교적 천재성을 시기했던 주변상황에 의해 인왕백고좌법회(仁王百高座法會)에 참여하지 못했다. 기록에 보면 비록 그가 거부하고 있었던 제도권 불교의 모임이었지만 그 모임에서의 소외는 한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원효에게 좌절과 슬픔을 안겨준 것이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금강삼매경(金剛三味經)을 강론할 때는 신라 왕실에 밀착된 제도권 승려들은 아무도 그 일을 감당하지 못했지만 원효 홀로 그 일을 해냈다. 허지만 그는 민중의 새로운 우상이 되기도 거부한 채 천촌만락에 춤추고 노래하는 무애행(無 行)으로써 한 명범한 생활인으로 남아 있기를 회구했다.
그러므로 오늘날 제각기 다른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많은 지도자들이 자신만이 어리석은 양떼를 몰아 낙원의 땅으로 몰고 가는 선한 목자임을 외쳐대는 혼돈의 상황도 어쩌면 원효와 같은 거부의 정신, 모든 우상화의 유혹 앞에서 끝까지 자신을 부정해버린 그러한 지성의 힘을 요청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난한 삶들과는 전혀 무관하게 이(理)와 기(氣)가 하나인가 둘인가 이가 먼저인가 기가 먼저인가 떠들어대는 선비들에게 권력의 축과는 먼 지리산 골짜기에 앉아‘마당에 빗자루 질도 못하는 녀석들이라고 호통쳤던 남명조식(南溟曺植)의 투철한 야인정신이 오늘 날 기득권의 고수와 새로운 기득권획득의 싸움이 진정한 민중적 삶을 파국의 대단원으로 끌고 가려는 현실 속에서 참으로 요청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비록 일시적으로 용을 얻어먹더라도 그리고 잠정적으로 현재의 실천의 대열에 빗겨 서있더라도 역사의 대국적 맥락을 원음으로써 진정 한국역사가 필요로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찾아 그 일을 해내는 양심있는 지성의 역할이 지금 기대된다.
병자호란시 최명길(崔明吉)은 당시 사람들의 빗발치는 비난 속에서도 명나라에 대한 대의명분의 허구성을 자각하고 청나라와의 화친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정치적 신조를 끝까지 고수하였다. 이와 같이 아무리 세상이 욕하더라도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한 그리고 그 주체적인 자각이 객관적인 타당성을 갖고 있는 한 자신의 양심의 빛(良知:陽明學이 말하는 순수인식)을 끝까지 관철하는 굳굳한 절개가 오늘날 흔들리는 지성의 풍토 속에도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리들의 논의 우리들의 주장도 결국 상황의 긴박성 앞에서는 한갖 관념의 사치한 놀음놀이에 지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완벽한 논리는 그 이론의 추상성으로 말미암아 이미 가진 자의 자기보호에 이용될 위험성이 크다.
그렇다면 상황의 암울한 흐름 앞에 자폭으로까지 치달아가는 젊은 가슴들의 타는 목마름은 무엇이 있어 적셔줄 것인가.
결국 못가진 자에게 자신의 없음이 철저한 공허의 없음(斷空)이라는 허위의식을 심어준 것이 가진 자의 모순구조와 비도덕성이라면 있음이 스스로의 뜻에 의해서건 주변의 여건에 의해서건 자신의 있음을 창조적으로 해체함으로써만 없음이 그 스스로를 해방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것이 아닌가.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있음(有而不有)이 없음을 해방하고 없음(空而不空)이 있음을 해방하는 평등의 나라(質空妙有)가 구현되며, 이것과 저것, 있음과 없음의 필연적 대립이 대립 없는 대립으로 전환되는, 그리하여 필연과 자유가 진정으로 통합되는 열려진 자유의 왕국(淨土)이 건립될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화엄경은 있음과 없음의 대립에 머물지 않되 있음과 없음을 모두 버림이 없이 대평등의 땅에서 창조적으로 살려내는 보살의 실천을 다음 같이 설하고 있다.
普見於諸法 二邊皆橋離
道成永不退 轉此無等輪
참된 진리 바로 깨친 대승보살은
널리 온갖 것의 참모습 보아
두가지 치우침 모두 여의네
취함 없고 버림 없는 지혜 이루어
영원토록 진리의 길 물러섬 없이
있음과 없음의 대립 끊어진
대명동의 수레바퀴 항상 굴리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