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에는 없는 숭고한 초월공간을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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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윤석관
1990년 07월 101호
나에게는 여름 산사에 대한 별다른 감회가 있다. 이번에 재수하며 대학에 들어간 둘째 녀석이 네댓살 때니까, 지금부터 15년 전 쯤 일이다. 여름 휴가 때가 되면 언제나 겪는 일이지만 그해 여름에도 휴가를 잘 지내려고 산이냐 바다냐를 가늠하다가 애들도 어리고 하여 조용한 산사를 택하기로 했다.
그때만 해도 절이라면 해인사가 제일인 줄 알았고, 마침 합천지역을 담당한 후배가 해인사를 소개해 주어 찾아간 곳이 해인사 삼선암이다.
법당을 가까이한 안채의 방 한 칸을 얻어 남매랑 네 식구가 들었다. 딴에는 나름대로 주의하고 몸을 도사리긴 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천지도 분간 못했었나 보다. 그저 내 면하고 우리 가족 재미만 생각했지 절측에 대해서는 막무가내였다.
예불은커녕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 전에 절 한번 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애들보고 칠성당에 올라가 절이나 하고 내려오라는 식이었다. 그중에도 둘째인 딸애는 다음해 사립국민학교에 입학할 때 추첨에서 당첨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부처님께 열심히 절하고 기도했다.
그러니까 내가 “부처님에게 가서 절이나 해라”라고 말하면 착한 딸애는 한번도 거역않고 시키는대로 절하고 내려오고는 했다. 우리 부부는 스스로 예불하지 않고 아이들이 절하러 갔다 오는 것만해도 그저 흐뭇하게 생각했다.
그래도 스님들은 우리 어른들에게 부처님께 예불하라든지 절에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라고 한번도 말해주지 않고 극진히 손님대접을 해 주었다. 하기사 그때는 무어라고 말해 주거나 간섭해 주는 것을 바라지도 않았으니까. 아침 늦게까지 늘어지게 자다가 아침 7시나 8시께 쯤에 방문을 두드리며 “공양하세요”라며 밥상을 방문 앞에까지 갖다주면 그제사 미안한 마음으로 일어날 정도였다.
그리고 특히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는 재미로 계곡에서 물고기를 잡아다가 법당 경내에서 버너를 피우고 찌개를 맛있게 부글부글 끓이며 냄새를 피운 일이다. 한참 찌개가 냄새를 피우며 다 익어 가는데 한 스님(비구니)이 다가왔다. 스님이 오히려 미안해 하는 듯한 자세와 말씨로“그 찌개, 조금 밖으로 나가서 끓였으면 좋겠습니다” 그제서야 우리는 “참, 스님들은 고기 먹으면 안되지. 이 맛있게 생긴 것을 먹지도 못하고…” 하면서 멀찌감치 옮겨 맛있게 먹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스님들이 그렇게 고맙고 넉넉했던 것 같다. 우리들의 잘 잘못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자비롭게 너그러운 어머님 품처럼 받아주셨던 것이다. 그때 우리들에게 잘못을 따지고 나무랬다면 다시는 그 절에도 불편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불법과 인연을 맺을 기회도 영영 멀어졌을지도 모른다. 그 다음해에 딸애가 국민학교 추첨에서 떨어졌다. 그해 여름휴기에도 해인사 삼선암을 찾았다. 어린 딸애는 스님에게 ‘부처님도 소용없더라’며 원망하며 따졌다. 이기적으로 자기의 원을 이루어 주지 않은 데 대한 앙갚음이었을 게다. 스님은 ‘그래도 부처님에게 기도했으면 좋은 일이 있을거다’며 위로해 주셨다. 우리 부부는 ‘그래 부처님이 좋게 이끌어 주실거다’며 은연중 믿음을 가지고 딸애를 달랬다. 그해 가을 2학기를 시작하면서 좋은 기회가 생겨 딸애는 원하던 사립학교로 옮겼다. 굳이 부처님 은혜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그래도 부처님께 절을 했기 때문에 도와주셨다고 딸에게 말해주었다. 딸은 원하던 것을 이루었으니까 조금은 수긍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 사립학교가 기독교재단으로 매주 예배시간이 있고 예수교회에 다니기를 그렇게 권장했는데도 딸은 남들이 ‘아멘―’ 하면 자기는 속으로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외웠단다.
그후 5,6년이 지나 애들이 아직 국민학교에 다닐 때인 지금부터 10년 전, 나에게 해직이라는 회오리 바람이 불어닥쳤다. 돌이켜 보면 해직 8년의 기간이 나에게는 너무도 고마운 세월이었다. 해직 후 처음에는 한숨이 멎지않고 머리 속에는 번뇌가 들끓었다. 아침마다 애들이 학교에 가고 난 뒤면 우두커니 그냥 집에 있을 수 없어 부부가 집에서 가까운 구덕산(九德山) 내 완정사를 찾곤했다. 그리고는 우연히 스스로 백팔배를 했는데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는 기쁨을 맛보고는 아내와 둘이서 매일 아침 그절에 가서 백팔배를 하자고 했다. 그러면서 무턱대고 100일을 채우자고 했다. 그리고 30일쯤 지나서 차(茶)전문업소인 ‘죽로다원(竹
盧茶苑)’을 개업하게 됐고 얼마 지나지 않아‘다도교실’(茶道敎室)도 열었다. 인연이 있어 매달 한번씩 삼천배를 하는 것도 1년반이나 이어갔다. 한번은 만배도 해보았다. 지장보살 염불 1만번 100일 기도도 성취했다. 그렇게 하면서 불교교리에 대한 이해도 꽤 깊어갔다. ‘다도교실’에서 스님을 모셔다가 반야심경, 화엄경 등 불교강의 시간도 가졌다. 그리고 회원들과 함께 산사를 찾아가 철야정진도 하고 곳곳의 이름난 사찰에 성지순례도 하고 스님들을 찾아다니며 친견하고 설법을 듣기도 하며 점차 수행하고 정진했다. 몇해 전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회원들과 함께 해인사 삼선암을 찾았다. 10여 년 전 우리를 맞아주셨던 그 스님은 그새 노스님이란 칭호를 받고 계셨다.
우리는 밤새 철야정진을 하고 새벽예불 시간에 참배하고 해인사 암자순례를 했다. 몇해 연이어 정초가 되면 버스 1∼2대씩 동원하여 삼선암을 찾아가 1박 2일, 또는 2박 3일씩 수련회를 갖기도 했다.
그때마다 삼선암 법당 부처님께 그 여름날 산사에서의 세속에는 없는 숭고한 초월 공간에 감사하고 감사했다.
모든 삿된 번뇌망상을 참회하며 혼탁하게 오염된 모든 것을 정제하여 청정하고 혼들림이 없는 고요의 경지를 지켜주시라고 발원하고 기도했다. 15,6년이 지난 지금도 그해 여름날의 넉넉하고 포근했던 산사를 잊을 수 없다. 산사는 아무말 없어도 항상 내곁에 다가와 진리를 설하고 계신다. 따짐을 초월한 숭고한 그 자리가 너무나도 좋다. 부처님, 녁넉히 회향케 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