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근본정신과 기복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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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 보원
1985년 09월 43호
불교의 목적은 오로지 인간의 자각과 해탈에 있다. 불타의 사십 오년 방편설은 현상계에 고착된 인간의 마음을 맑혀 스스로 본체계를 드러내도록 함에 그 본지가 있는 것이다. 〈대반열반경〉의 다음과 같은 말씀은 그것을 분명히 해 주고 있다.
「나는 이제, 모든 중생들이 다 가지고 있는 불성이 여러 번뇌들에 의해 덮혀 버린 바 되어 마치 가난한 사람이 진금의 보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능히 보지 못하는 것과 같음을 널리 보여준다」
이 말씀은 곧, 모든 사람이 본질적으로는 불타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미완성의 불타이므로 모든 방편 교설이 모두 불타의 완성에 그 목적이 있음을 단적으로 표현하신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자기완성」을 말씀하시는 불타께서는 언제나 진리를 일깨우는 교사적 위치에 서 계신다. 한번도 스스로에 대한 어떤 류의 도그마(dogma)도 강요하신 적이 없다. 이것은 중생 스스로가 본래 불타이거늘 따로 신봉하여야 할 대상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 할수 있다. 즉 각자가 지닌 미망의 먹구름만 제거하면 본래의 밝은 불계의 본성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완성을 향하는 불교적 인간상이 어떤 가공적 절대자에 대해 예속된 인간상이 아닌 가장 지혜롭고 자주적인 인간상이 될 것임은 말할 나위 없다. 이는 「불타(佛院)」가 「깨달은 사람」이라는 어의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원시경전인 「아함부」의 도처에는 「너 자신에 의지하고 진리에 의지하라. 그 외의 것에 의지하지 말라」고 하는 「자귀의 법귀의」의 가르침이 누누히 강조되고 있다. 심지어 불타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스승인 불타 자기 자신에게 조차도 맹신하거나 맹종해서는 안되며 각자 독자적으로 진리를 관찰하고 수행해 갈 것을 강조하고 계신다. 이같은 불교의 「자귀의 법귀의」의 사상은 다음에 인용하는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야잡사〉에 보이는 불타의 가르침 속에 그 뜻이 보다 분명히 드러나 있다.「난타여, 너는 나를 믿지 말며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따르지 말라. 나의 말을 의지하지 말고 나의 형상을 보지 말라. 사문이 소유한 견해를 따르지도 말며, 사문에게 공경심을 내지도 말라. “사문 고타마가 나의 위대하신 스승이다”라고 말하지도 말라. 그러나 다만 내가 스스로 증득한 법에 대하여 홀로 조용한 곳에서 사랑•관조•성찰하고 항상 많이 수습하여 용심의 관찰한 바 법을 따라 바로 법의 관상에서 정념을 성취해 머물러 있음이 옳은 일이다. 자신을 피난처의 섬이나 물가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을 것이니라. 별도의 피난처로서의 섬이나 물가가 없으며 별도의 귀의처가 없느니라.
이것은 불교의 이상적 인간상이 일체의 물질적 갱신적 구속이나 우상을 벗어나 자유롭게 사색하는 것에 있는 바 이 점이 바로 유신론적 종교와 명백히 구별되는 성격이라 할 것이다. 물론 불교에는 그 불타의 완성을 위해 타력적 정토신앙이 있으나 다른 유신론적 신앙의 내세관과는 그 길을 달리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무엇인가 의지하고자 하는 중생의 근기에 맞춰, 정토신앙에 입각한 보살의 모든 서원과 실천적 이타행을 통해 궁극에는 인간이 스스로의 내면 속에 갖추고 있는 불타의 씨앗을 개화시킬 수 있다는 자력적 숨은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자력이든 타력이든 불교는 궁극에 있어 의불지교(依佛之數)가 아니라 성불지교(成佛之敎)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불교는 새롭게 불타의 근본정신을 회복해야만할 시점에 이르렀다. 현대에 이르러 불타의 육성에 가까운 많은 경전들이 번역 유통되면서 불교의 근본정신에 입각한 신앙을 영위할려는 층이 많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불교 교단이 겪고 있는 근래의 과도기적 현상은 바로 이러한 의식의 전체적 조류의 변화에 그 큰 원인이 있다. 불교가 불교다울 수 있는 것은 불타 근본 정신에 가장 접근했을 때라야 만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에게 닥친 이런 과도기적 제현상이 빨리 극복되어야만 l600년 한국불교사를 새롭게 계승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다른 무엇보다 우선하여 이른바「기복적 불교신앙」의 형태가 먼저 개선 극복되어져야 할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 불교는 결코 현세적 혹은 내세적 복을 기원하는 종교가 아니다. 「상구보리•하화중생」인 불교의 양대 기치는 불타의 완성이라는 뜻에서의 자기개발과 그 불타의 지혜와 자비를 타에 회향코자하는 자세를 요구한다. 특히 대승 보살도는 궁극적으로 너와 내가 사라진 「하나」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이기(ego)를 극복할 것을 그 주된 의지로 하며 그 실천론으로 이타행을 적극 강조하고 있다. 중생을 중생이게 한 것을 「나」에 대한 고집 탓으로 규정하여 그 고집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일체의 방편교설인 바 그것은 무아, 공, 연기, 중도 emd의 가르침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무아, 공, 연기, 중도 등의 교설에 입각한 인간의 지향점은 곧 「무소유적 삶」으로 나타난다. 다른 말로 일체에 대한 애착이 없을 때 일체의 구속이 없는 대자제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나」에 대한 고집을 극복했을 때라야 인간은 참으로 보살로 불타로 새로운 탄생을 맞이할 수 있는 것이다. 대승보살 정신인 「무연대비 •동체대비」의 정신은 개아적 자기를 버리고 우주적 자기를 획득할려는 정신 자세에 입각한 구도자적 열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보살의 실천덕목들로 제시되는 사섭법, 육바라밀, 십바라밀, 사무량심 등은 하나같이 개아적 욕망을 버리고 이타와 구세에 헌신하려는 무소유적 삶의 전형을 얘기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불교의 근본정신이 이러함에도 불타와 불타의 공능(功能)이 인격화된 보살에게 「나의 욕구충족」을 -물질적, 정신적-바라는 사고는 참으로 재고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물론 중생의 입장에서 일률적으로 기복을 매도할 수 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나」의 고집에서 일어난 삼독심의 밧줄에 묶인 사람에게 우선 시원하다고 물을 뿌려준들 그 고의 근본이 해결될 수는 없다. 오히려 밧줄은 더욱 탱탱하게 그 사람을 죄어들게 될 것이다. 여기서 종교가 가지는 「위안」의 요소 못지 않게 「채찍」의 요소가 더욱 문제의 근원적 해결에 도움이 될 것으로 판단해 볼 수 있다.
다음에 내세적 기복과 관련된 부처님의 말씀을 한번 더 인용해 보기로 하자. 〈중아함경〉속에 등장하는 어느 마을 촌장이, 어떤 종교에선 죽은 사람들을 천상계에 들어가게 한다는데 불타께서도 그와 같이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촌장이여, 예를 들어 누가 큰 바위를 못 속에 던져넣었다고 하자. 거기에 사람들이 모여와, “바위야, 바위야, 떠오르거라, 떠올이라서 땅으로 올라오너라” 하면서 그 바위를 향해 기도하고 그것을 찬탄하고 합장하여 그 둘레를 휘돈다고 하면, 그대는 어떻게 될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그 큰 바위가 많은 사람들의 기원과 예찬에 의해, 혹은 합장하고 주위를 돈 것에 의해 모습을 드러내겠는가? 떠오르겠는가?」
「대덕이시여,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촌장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여기에 사람이 있어 나쁜 짓을 했다고 할 때, 비록 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이 사람이 죽은 뒤에는 제발 천상계에 태어나지이다”
하고 빌어준다 해도 그 사람은 죽고 나서 육도를 해매고 결국은 지옥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
부처님의 이 말씀은 이제까지 논의한 기복 신앙의 허망성을 더 없이 적나라하게 지적해 주고 있다 할것이다.
오늘날 많은 불자들이 불교의 사회화 대중화를 고창하고 있다. 불교가 사회화, 대중화되어 그 본연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오직 불교의 근본정신에 입각해 있을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불교의 근본정신을 퇴색케 하는 가장 큰 부정적 요인중의 하나가「기복적 불교신앙」인 점을 앞에서 살펴 보았다. 오늘날 한국 불교가 사회봉사의 측면에서 가장 미흡한 종교라는 일반적 지적은, 바로 우리나라에서 「보살」의 개념이 그 본래의 「구도자」의 뜻이 아닌 사찰의 재정적 뒷받침과 구복하는 자로 여겨지는 대체적 현실만 봐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불교는 인간 각자의 큰 지혜와 자주적인 실천수행 그 뒤에 오는 너와 내가 하나가 된 종교적 큰 감동 즉 「구원」에 그 목표가 있다.
이 싯점에서 우리는 한국불교 극복의 제일의제(第一義諸)는 바로 기복 불교 극복의 논리라는 주제를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