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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 거는 곳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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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 함께하는 자리 - Singelis 1985년 10월 44호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면 ‘고향이 어디냐고, 고향에 가고싶지 않으냐?’고 물어오곤 한다. 이국에서의 생활은 때로 그 자체가 향수의 연속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 나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고향, 나의 고향은 미국 콜로라도(Coloracdo)주의 에스핀(Aspen)이다. 에스핀은 세계에서도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며 특히 스키로 이름이 나 있다. 겨울이면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설경과 스키를 즐기러 에스핀으로 몰려든다.
에스핀은 록키산맥 중에서도 매우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해발 2500미터 높이에 맑고 신선한 공기와 푸르고 깨끗한 하늘, 푸른 숲속은 동물들의 천국이다. 하늘엔 끊이지 않고 새떼가 날고 맑은 강에는 은어가 떼를 지어 몰려 다닌다. 에스핀 주변의 산들은 거의가 4,OOO미터 이상이며 산에서 산으로 이어지는 산들이 너무나 아름다워 아무리 쳐다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언뜻 내 고향은 작고 외떨어진 곳처럼 여겨지지만 여러가지 문화적인 활동도 빈번하여 계절따라 음악학교, 무용공연, 연극 등이 열린다. 내 고향의 모든 것들 중에서 나는 시골과 주변의 산들, 그 자연 속의 아름다움을 제일 좋아한다.
나의 고향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은 그 곳에서 60km나 떨어진 곳에 있다. 콜로라도는 거의 대한민국의 2배 크기이나 살고 있는 사람들은 200만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땅들은 황무지와 국립공원들이다. 산 속에 들어가면 몇일을 걸어다녀도 다른 사람들을 만나볼 수가 없다. 혼자 또는 좋은 친구와 함께 그 산을 사색하고 거닐고 하기에는 산은 너무도 조용하고 평화롭다.
콜로라도에서 산을 오르는 것은 세계의 정상을 오르는 것과 같다. 신선한 공기를 가슴 가득 들이키며 멀리, 저 멀리 수백 킬로미터 앞을 내다 볼 수가 있다.
우리가 어떤 산의 정상에 서게될 때 우리의 존재가 보잘 것 없고 작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거대하고 엄숙한 우주적 존재인 것 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것은 우리들의 소아(小我, ego가 점점 작아지고 우리들 내면에 잠재한 불성(佛性) 이 점점 팽창해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온 우주를 가득 메우고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
“고향이 그리우냐고요? 아니요, 정말 …”
어떻게 나의 한부분을 내가 그리워 할 수 있겠는가? 비록 고향은 떠나왔지만 고향은 잃어버린 것도, 없어진 것도, 늘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밤이 올 때 낮을 그리워하고 가을인 지금은 지난 여름을 그리워 할까? 그렇다면 그것은 얼마나 비극인가! 내가 이곳에 살면서 늘 내 고향을 그리워 한다면 나는 결코 여기서 완전하게 있는(be-存在) 것이 아니다.
만약 여기에 완전하게 있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진실로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그러면, 내가 여기에 있지 않다면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시간과 장소는 똑같은 것 같다. 우리를 우리의 고향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오직 시간뿐인 것 같다. 비록 우리가 우리들의 고향에 머물러 산다고 해도 오늘의 고향이 어제와 똑 같은 고향은 아닐 것이다. 시간적인 한 때에 매달리는 것보다 사람들은 하나의 장소에 더 잘 집착하는 것 같다. 시간과 장소는 모두 우리들로부터 끊임없이 떠나고 있다. 어떤 기억이나 사상을 우리의 머리 속에 불잡아 둘 수도 있지만 그것은 나약한 인간의 필사적인 노력인 것이다. 다만 우리가 살고 있는 그 곳에서 매순간순간을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 속에 내재한 참다운 성품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고 미래는 아직 채 이르지 않았고, 중요한 모든 것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우리의 고향이나 오랜 유산, 조상을 잊어야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단지 지금을 버리고 그러한 것들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이 지금의 우리를 규정해 주리라 믿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마치 수전노가 돈을 끌어앉고 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차라리 자기 아들을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아끼지 않는 용감한 어머니처럼 있자. 진정한 사랑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오직 집착하는 것을 버림으로서만 가능한 것이다. 애착, 의무에 대한 굳힌 생각을 놓아버림으로써 오염되지 않은, 비이기적인 순수한 의무(pure duty)가 우리들의 개인적인 필요와 바램에서 우리들의 성품 깊숙이서 오는 것이다. 자연에서 느껴지는, 돌이나 한 조각 나무토막처럼, 그렇게 되어서야 우리의 참다운 성품을 실현할 수가 었으며, 진실로 인간이 될 수 있으며 자비로와 질 수 있다. 그때 우리는 그것들에 집착하지 아니하고, 그 어느 것에도 걸림이 없이 우리의 고향이나, 조상들 또는 삶의 고뇌를 추억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 속담 중에 ‘네가 모자를 걸어 놓는 그 곳이 바로 네 고향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고향이 어떤 특별한 곳이 아니라 그것은 마치 우리가 갖고 다니는 모자에 대한 감정과 같다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시간적 공간적으로 떠나 있다 해도 결코 떠난 것이 아니며, 늘 고향에서,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지금 내 모자와 내 집은 한국에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곳에 자리잡은 내 집도, 한국의 산, 꽃, 버스 그리고 미소짓는 사람들에 의해서 낯설지 않게 바뀌어지고 있다. 그만큼 내가 이 곳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토요일 일요일이면 찾아가는 파계사 성전암, 그 주변의 산들, 그리고 부처님의 가르침, 그것은 내게 이 곳에서의 고향을 빨리 성립시킨 요인이 되었고 에스핀의 산과는 또 다른 한국의 나지막한 산들과 절을 무적 좋아하게 되었다.

나는 가끔씩 꼭 이 금생(今生)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꼭 이 한국에서 산 적이 있었던 것 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하루를 더 살면 살수록 그것은 내게서 참으로 묘한 기분이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 내게서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여기, 이 곳에 있기 때문에.
“고향이 그립지 않으세요?”
“아뇨,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정말요.”
그러나 이따금 내가 혼자 있을 때면 산란해지고 약해짐을 느낀다. 내 눈에 구름이 끼고 마음이 흐릿해져 오면 그때 나는 시간과 장소에 대해 생각을 한다. 그 무엇보다도 나(眞我)로부터 잃어버린 듯한 어떤 사람을 생각한다. 그리고 이 무상한 인쟁의 고통을 알고, 또 조용히 새로운 어떤 것을 느끼게 된다.


선시감상

이 공부는 사람마다 자기 일인데
어째서 버려두고 돌아보지 않는고
배 고프면 밥 먹고 곤하면 잠자면서
우습구나 소를 타고 소를 찾다니.

묵암 선사(1722~1795)… 조선 때 스님. 이름은 최눌(崔訥). 저서 <화엄품목(華嚴品目)>은 송광사 화엄전 장경각에 목판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