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라벌이 기울고 있다. 서라벌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들고 있다.
한 아이가 뛰어간다. 어른들도 뛰어간다. 낭(郞)의 무리들도 뛰어간다. 부녀자도 뛰어간다. 뛰면서 부르는 노래소리.
“오려 오려 오려 오려 애닮아라, 애닮아라. 여보소! 공덕(功德) 닦으러 오려”
노래에 섞여 염불소리도 들려온다. 「반야심경」이다.
“가자 가자 저기 가자 저기 같이 가자 깨달음이여! 길상(吉祥) 있으라”
서라벌에 처음 온 나그네는 눈이 휘둥그레진다. 뛰어가는 사람을 잡아 세운다.
“아니, 대체 무슨 난리가 났소?”“난리는 무슨 난리요 나라에서 절을 짓고 우리 큰스님이 부처님을 조성해 오신다는데 우리가 그냥 있어 되겠어요. 일하러 가야지요. 당신도 오셔요” “아 그렇구나. 그럼 같이 갑시다”
선덕왕 4년(635)의 일이다. 영묘사(靈廟寺)를 짓고, 양지(良知)스님께서 장육폰상(文六尊像)을 조성할 때의 일이다.
영묘사에 벌떼처럼 모여든 사람들이 자갈을 져나르고 모래를 실어 나르고, 벽돌을 찍어내고, 나무를 다듬는다.
“오려 오려 오려 오려 애닮아라. 애닮아라. 여보소! 공덕닦으러 오려”
야단법석(野瓚法席)이다. 누가 서라벌로 하여금 이렇듯 기울게하고 사람들을 이렇케 열광케 했는가? 양지스님이시다.
스님은 선덕왕(632-646) 에서, 문무왕 (661-680) 대에 걸쳐서 사신 분이다. 그의 고향이며 가계(家系) 등은 알려지지 않았다. 미천했기 때문이다. 스님은 자기의 영향력으로 이렇듯 사람을 이끌었지만, 한 조그만 절에 살면서 조각과 서예에 몰두하는 예술가적 삶을 살고 만다. 재주는 오롯하고, 덕도 가득했지만 스님은 그렇게 살았다.
스님에게 재미있는 이야기가 또 있다. 그의 탁발(托鉢) 이야기다.
“어, 양식이 다 됐네. 탁발을 보내야겠구나”
“(슝-) 땔랑 땔랑”
“아이구, 스님께서 탁발을 보내셨구나, 쌀을 담아 드려야지”
스님의 육환장(六環校)을 하늘로 날려 보내면 이처럼 신도들은 그 육환장 끝에 매어달린 자루에다가 쌀을 담아준다. 한 자루가 다 차면 육환장은 스스로 다시 스님에게 돌아간다. 그래서 양지스님께서 사시던 절 이름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하였다. 지금 경북 월성군 현곡면 석장리 북방 15km 정도에 절터가 주춧돌 몇 개의 기와 조각으로 남아 있다.
석장을 남기는 일은 당시, 양지스님에 대한 신라인들의 절대적인 신뢰와 귀의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역시 영묘사 불사 이야기와 함께 뜻하는 바는 같다고 본다. 물론 양지스님이 밀교승으로서 신통력에 의한 민중들의 교화라는 측면도 있다고 인정된다.
그러나 그가 살던 마을사람들 속깊이 불교가 뿌리 내리고 사랑과 믿음의 공동체를 이룩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다시금 사찰과 마을과의 관계정립에 시사하는 바 크다고 생각된다.
일연스님의 그에 대한 찬(護)을 들어보자.
재를 마치니
법당앞에 석장은 한가하네
향하나 꽂고
남은 경(殘經) 다 읽으니
무얼 하겠나
부처님 모셔서 합장할 밖엔
※편집자 주
위 향가는 「풍요(風謠)」로 알려진 바, 번역은 효대 홍재휴 교수의 설(說)에 따라서 번역한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