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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화신이여, 자장율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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뜰앞의 잣나무 - 동봉 1990년 07월 101호
자비란 사랑하는 마음과 연민히 여기는 마음이 한데 어우러진 심성을 말한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즐거움을 안겨주고 연민히 여기는 마음으로 고통을 제거해 준다. 즐거움과 고통(괴로움)은 동시적 마음이 아니다. 고통이 있다면 즐거움이 있을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즐거움이 있다면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즐거움이 있다 하더라도 즐거움이 다한 뒤에 남는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의 뿌리가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증거다. 자비란 그러기에 긍정[玆]했하는 마음[心〕과 부정[非]하는 마음[心]의 종합[慈悲]된 언어이다. 긍정할 때는 한없이 긍정해 주고 잘못된 일이 있을 때는 사랑의 매로써 호되게 꾸짖을 줄 아는 부정적 마음이 함께 있어야 한다.
자장(慧藏)이란, 그 이름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사랑을 간직한 이’란 뜻이다. 사랑의 화선이다. 애욕의 화신이 아니라 참된 길을 열어주는 스승으로서의 화신이다. 그는 신라시대의 유명한 고승이며 한국불교에 남산율종(南山律宗)을 처음 편 율사다. 생몰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나 대략 7세기초에 신라의 진골(眞骨)인 소판무림(蘇判茂林)의 아들로 태어나 7세기 후반에 세상을 떠난 분으로 짐작할 따름이다. 부모가 돌아가시자 세상의 덧없음을 깨닫고, 아내와 자식과의 결별을 주장한다. 처자에 대한 훗날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뒤 자기의 집을 고쳐 원녕사로 만들고 거기서 고골관(枯骨觀)을 닦는다.
고골관이란 죽음 뒤에 남는 하얀 뼈, 즉 백골을 떠올리며 자기 몸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골관(白骨觀)이라고도 한다. 사람들은 대체로 겉모습만을 보고 아름답다느니 미남이라느니 미녀라느니 하지만 실제로 그 몸 속에는 온갖 오물로 가득 차 있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을 부정관(不淨觀)이라 한다면 무덤 가에 흩어져 있는 빛바랜 뼈를 생각하며 자기와 남의 미래를 보는 것이다. 목적은 모두 자신과 타에 대한 집착·욕망으로부터의 해탈이지만, 부정관은 현세적이고 백팔관 또는 고골관은 내세적이다.
중생(衆生)이란 뜻 생명을 말한다. 피부 밑에 피가 흐르고 있는 생명이다. 초목 등은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참된 자아의 성찰이 없고, 또한 미래에 그러한 무명으로부터의 해탈을 기약할 수도 없고, 방법도 모르는 생명을 말한다. 먹고 배설하는 것 말고 특별히 자기 존재에 대한 물음부호를 갖고 있지 않는 존재를 일컬음이다. 그러기에 ‘중생’을 우리말로 풀이한다면 ‘멍텅구리’이다. 밥통·머저리·바보·숙맥·천치다.
한치 앞을 내다볼 줄 모르는 우리네 인생이 천치(天痴)가 아니고 무엇이며, 죽음의 신이 뒤에서 쫓고 있고 앞에서 무덤이 기다리고 있음도 분간하지 못함이 숙맥(菽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먹고 배설하는 것 말고 진정한 자아의 성찰이 결여되었다면 ‘밥통’이 아니겠는가. 밥통이란 밥 먹고 오줌과 똥으FH 배설하는 것 말고 잘하는 게 없다는 뜻일 터이니, 그렇다면 ‘똥만드는 기계’가 분명하다. 그러다가 한 생을 마치고 나면 무덤에 묻히고 마는데, 살은 문드러져 흙으로 돌아가고 피는 물로 돌아가고 호흡은 바람으로 돌아가고 체온은 불로 돌아가고 만다. 앙상한 뼈만 남았다가 먼 훗날 누군가에 의해 파헤쳐지고 나면 벌판에, 산야에 뒹굴 것이다.
선종랑(善宗郞) 자장이 관(觀)한 고골관·백골관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으리라. 그는 율사라기보다는 화엄학의 위대한 사상가였다. 그러나 그가 화엄사상의 대가요, 한국불교에 우뚝 선 율사가 되기까지에는 어떤 피나는 노력이 있었으리라. 인간은 순간순간 끊임없이 욕망을 솟구쳐 올리는 존재다. 그러한 욕망을 이길 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인과사상(困果思想)이다. 인과사상이란 무엇인가. 어떤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에는 그러한 결론이 도출될 수 있게 한 원인이 있었을 게다. 그를 일러 ‘원인에 의한 결과’라 하고, 줄여서 인과라고 한다. 계율이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다. 인과 역시 이론에 의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표현됨이다. 둘은 상관관계에 놓여 있다. 분리될 어떤 성질의 것이 아니다. 어떻게 수행해 가느냐에 따라서 어떠한 결과를 증득하느냐 하는 실제적 지침이다.
특히 계율은 몸과 언어, 마음의 씀씀이에 초점을 맞춘다. 몸으로 부처님의 행동과 같이 행동하고, 입으로는 부처님의 말씀을 설하며, 마음은 거짓을 떠나 부처님의 마음처럼 자비와 지혜를 듬뿜 담았을 때, 삼밀(三密)이 갖추어지고 장래에는 부처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불성을 간직한 수행자는 부처를 만들어 내는 기계가 되도록 노력해야지, 똥이나 만들어 내는 도구는 될 수 없다는 것이 자장의 한결같은 태도였다.
세상은 비디오카메라다. 우리의 낱낱 행동과 언어와 마음을 카메라 필름에 담고 있다. 동시에 50억이나 되는 숱한 생명(사람을 놓고만 보더라도)들을 피사체로 삼아 같은 필름에 담고 있다. 필름은 무한대다. 필름을 중간에 갈아끼우는 번거로움을 원치 않으며, 완전 영구적이며 절대로 고장이 나지 않는 카메라다. 세상은 비디오카메라인 동시에 비디오비젼이다. 끊임없이 우리의 활동상황들을 방영하고 있다.
최첨단 과학을 자랑하는 비디오가 우리의 마음을 포착하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그러나 이 ‘세상’이라는 등록상표를 붙인 비디오카메라는 우리의 마음까지도 속속들이 찍어내고 있다. 그것이, 그 찍힌 영상들이 내생에 ‘업경대’라고 하는 염라대왕의 자리 옆에 놓여 있는 모니터에 방영되고 있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바로 지금의 이 순간에 우리의 모든 행동거지를 노출시키고 있는 ‘세상’이라는 비디오비젼은 어찌할 것인가 부처의 행동, 부처의 언어, 부처의 마음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가 어떤가를 조금만 신경쓴다면 이내 알 수가 있다. 거기에는 항상 회광반조(廻光返照)가 필요하다. 밖을 향해서가 아니라 보는 눈, 듣는 귀를 자기의 행동, 자기 내면의 세계로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세상은 비디오카메라이기 때문에 우리를 낱낱이 감시하는 역할을 하고도 있지만 반면에 C. F까지 겸하고 있다. 부처의 행동으로 살고, 부처의 언어로 말하고, 부처의 마음으로 펼쳐갈 때 세상이라는 비디오비젼은 아주 빠른 속도로 우리를 광고한다. 여기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인과율의 정확성이다. 카메라는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있었던 그대로를 찍어내며 비춰줄 따름이다.
자장은 유명한 말을 남긴다.‘오녕일일지계이사 불원백년파계이생(吾寧一日持戒而死 不願百年破戒而生)’이다. ‘차라리 하룻동안 계를 지키다 죽을지언정, 계를 화하고 백년 동안 살기를 원치 않는다’는 뜻이다.
무엇이 자장으로 하여금 그토록 장한 믿음을 내게 하였을까. 죽음마저도 불사하고 계를 지키려는 그 섬뜩하리만치 굳은 결심을 내게 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그렇다. 그것은 그의 백골관이요 인과사상이었으리라. 인과사상이 인천교(人天敎)사상이라고 얕잡아볼게 아니다. 인과사상은 교리에의 심천(深淺)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아니, 불교의 교리는 바로 인과사상으로 점철되어 있다 하더라도 과언이 아니다. 인과사상은 ‘돌고도는 사상’이다. 직선의 사상이 아니라 순환의 법칙이다. 순환의 법칙이란 바로 써클[圓]의 법칙이다.
지장이 인과율에 대하여 매력을 느낀 점은 바로 이 써클에 있었을 것이다. 써클을 표현한 것이 원(○)이다. 세상은 둥글다. 출가자의 머리도 원정(圖頁)이다. 세상은 돌고돈다. 끊임없이 순환한다. 순환하면서 조화를 이루어감이다. 써클은 조화요, 중도다. 따라서 인과율은 바로 이 중도에 바탕을 둔다. 자장은 부처님의 그 고귀한 계율에서 중도사상을 본 것이며, 조화를 본 것이다. 계율은 서로가 서로에게 침해를 주지 않는 대신, 화합을 얘기함이다. 단결을 뜻함이다. 계율은 묶임을 뜻하는 단어가 아니라 오히려 풀림이다. 구속이 아니라 해탈이다. 일시적 눈가림이 아니라 영원히 악도로부터 벗어나게 함이다. 육도의 윤회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묘약은 계율이다.
계율이란 금지(禁止)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풀어줌에 목적이 있다. 계율이란 격식이 아니라 파격에 그 목적을 둔다. 윤회라는 격식을 뛰어넘어 훤융무애한 대도에로의 전환을 의미함이다. ‘계율’은 그러기에 타율[戒]과 자율[律] 모두를 의미함이며, 타율에 의해 길들여진 뒤에 스스로의 행동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음이다. 모든 질서에 부합함이다.
흙탕물을 담은 첩을 고정시켜 앙금이 가라앉게 함이 계(械)라면 그 앙금을 걷어내고 다시 맑은 물만 담아놓음이 율(律)이다. 앙금이 있는 물은 흔들면 다시 흙탕물이 되지만 앙금을 걷어낸 물은 아무리 흔들어도 흙탕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자장은 우리 후학들에게 앙금을 가라앉히고, 그 앙금을 걷어내는 방법을 올바로 가르쳐주려 했다. 우리가 번뇌의 앙금을 걷어낸다면 ‘해인삼매’가 어찌 다른 곳에서 거론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