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는 만해 한 용운 선사의 오도송(悟道頌)이다. 깨친 형안(炯眼)의 선사에게는 이르는 곳마다 고향이요, 처처가 걸림없는 본래면목(本來面目)의 자리 일런지도 모른다. 사실 수행자에게 고향이란 흔히 그 고향이라는 말이 연상시켜 주는 아득한 푸른 논밭 건너 얕으막한 산이 병풍처럼 둘려져 있고 옥같은 시냇물이 흐르는 계류(溪流) 건너 박넝쿨을 얹어놓은 달 같은 초가집 등의 고향의 이미지(Image)가 아닌, 영원한 이상향(理想鄕)이자 동시에 환귀본처(還歸本處)한 자리인 생명의 근원을 일컫는 말이다.
이는 곧 불교의 이상 세계인 열반의 세계, 해탈의 세계인데 이러한 세계는 영 손 닿지 않는 금단의 세계가 아니고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의 평범한 일상(日常)이 곧 열반이라고 역대의 선사(輝師)들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나 무명(無明)의 먹구름인 온갖 번뇌 속에 있는 자들에게 어떻게 평범한 일상이 그대로 부처의 삶, 고향에서의 삶이랴. 번뇌니 부처니 하고 분별하는 것 부터가 벌써 고향하고는 십만팔 천 리 일지도 모르겠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는데, 다만 분별 망상하는 마음 때문에 어렵게 보일 뿐이라고 신심명 (信心銘)에 승찬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사실 깨친 경지에서 보면 두두물물(頭頭物物)이 모두다 비로자나의 세계다.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날 때 이미 가슴속 깊이에 근원적인 고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모두 천애고아로 태어난 것이다. 그렇게 가까이에 고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고향을 자기 마음 속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꾸 밖에서 찾아 헤메는데 그 대상도 가지가지에서 온갖 욕망과 어리석음의 수렁에 빠져 영영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마저 잃어버리고 오히려 새로운 장벽을 만들어 고향이 있다는 의식마저도 잊어버리는 것이다. 이 사바세계에는 항상 대립적 상대적인 개념이 항존(恒存) 하는데 끝없는 고투(苦關)와 노력과 낙망(落望), 꿈과 환멸(幻滅), 기대와 낙심, 희망과 절망 속에서 몸부림 치는 데 언제나 욕망의 속성은 내가 지금 갖지 못하고 이루지 못한 불만으로 시작하여 이 욕망을 채우지 못할 때 오는 낙심도 있고 또한 이 욕망을 채운다 하더라도 일련의 권태가 뒤 따르게 마련이며 더 나아가서는 새로운 형태의 욕망이 우리를 항상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욕망과 권태 사이를 방황하고 있으며 그 욕망과 권태의 한 끝에서 다른 한 끝으로 통과하는 도중에 우리는 고민하고 고통을 겪는 존재’라고 규정지었다.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권태와 고통의 와중에 있는 현상적(現象的) 자아가 존재의 탁물(漫物)로 말미암아 고통 중에 있다가 깨달음으로 열반을 증득하게 되면서 존재론적 자기초월에 이르게 된다고 말씀하였다. 이러한 근원적 고통의 이유는 무지(無知)이며, 참다운 깨달음이 있을 때 우리는 모든 집착심을 버리게 되며 현상적 자아를 몰각(沒覺)하게 되어 무아(無我)의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서 존재론적 자기초월을 경험하고 헌출히 무명의 늪을 벗어나 구름 한점 없는 가을 하늘처럼 근원적 생명의 고향에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육신을 낳고 길러 준, 해질녁 노을이 아름답고 강변의 금모래와, 서걱이는 갈잎의 노래, 그런 아늑한 고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를 낳고 길러준 이러한 고향은 영원한 고향일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생을 받을 때마다 그 고향의 의미가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세 가세 어서 가세 저 열반의 언덕에 어서 가세」로 끝을 맺는 반야심경이야말로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의 노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