ㄴ. 떠도는 아들
가섭의 업을 통해 고백된 그들의 비유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세존이시여, 저희 이제 비유 설해 이 도리 밝히오리이다. 비유컨대 사람 있어 나이 아직 어릴 적에 아비 떠나 도망쳐서, 오래 타국 머물기를 10년이나 20년, 내지는 50년이 되었다 하사이다. 나이 이미 든데다가 곤궁까지 하옵기에 이리저리 떠돌면서 의식을 구하다가 점점 흘러가는 길이 저도 저 모르게 본국가게 됐나이다.”
이 아버지와 아들을 부처님과 중생의 관계라 볼 때, 중생은 아버지의 아들인 점에서 부처님과 혈연으로 연결돼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불성을 지닌 중생이요, 본래부터 부처일 수밖에 없는 중생이다. 그러므로 이 점에서만 본다면 중생이라 불리울 근거 또한 없는 것이어서, 중생이 아닌 불자(佛子)요 본래불(本來佛)이라 해야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이 아직 어릴 적에 아비 떠나 도망을 친’ 아들인 점에서 볼 때는, 처음부터 부처님에게 등을 돌린 패륜아다. 이리하여 혈연으로 묶여 있는 부처님의 아들이면서 부처님을 등진다는 이율배반(二律背反)이 우리들 중생 모두의 현존재(現存在)인 것이 된다.
그러나 이런 이율배반 속에 우리의 활로(活路)가 있기도 하다. 왜냐하면 형편없는 중생이어서, 때로는 지옥 같은 절망에 몸부림치기도 하고 축생같은 행동도 서슴지 않는 것에 의해, 죽어서가 아니라 일상적 나날 속에서 하루에도 열두 번씩이나 악도를 윤회하고 있다 해도, 부처님과의 혈연은 어떤 경우에라도 지워질 수 없는 것이매, 우리의 혈관 속에 흐르는 부처님의 피가 어떤 악인도 때로는 인간적이게 하고, 때로는 도(道)를 지향하게도 만들기 때문이다. 설사 그것이 터럭 같이 아주 미미한 일념(一念)이라 하더라도, 이 일념은 아버지인 부처님과의 연계가 아직도 지속되고 있음을 뜻하므로, 우리에게 있어서는 더없이 소중한 동앗줄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태양 쪽으로 얼굴을 돌리는 해바라기 같이, 무의식 중에 부처님 쪽으로 자세를 잡는 막연한 지향성(志向性)이 부처님으로의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니, 경에서 “의식을 구하다가 점점 흘러가는 길이 저도 저 모르게 본국으로 가게 했다”고 말한 것이 이런 사실을 가리킨다.
처음부터 불도를 아는 사람은 좀체 있기 어렵다. 그래서 대개 이래서는 안되겠다는 막연한 충동에서 정신의 양식을 다른 종교에서 창기도 하고, 또는 문학이나 철학 쪽에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는 수가 있겠으나, 이런 조그마한 선이 부처님과의 만남을 가능케 하는 원인구실을 하는 수는 얼마든지 있지 않은가.
ㄷ. 기다리는 아버지
그러면 아버지인 부처님 쪽에서는 어떻게 하고 계셨는가.
“한편으로 아비는 일찍부터 자식 찾아 나섰다가 찾지 못하매 중간부터 한 성에 살고 있었사온 바, 그 집 크게 부유해 재물 한없어 금·은·유리·산호·호박·파려주 등이 창고마다 가득했으며, 노예·하인·일꾼이 많았으며, 코끼리와 말·수레와 소와 양이 무수했으며, 이잣돈을 놓음이 타국까지 두루 미쳐 드나드는 상인 또한 많았나이다.”
그렇다고 아들을 잊은 것은 아니었으니,
“내 몸 늙되 재물 많아 금은·진보(珍寶)가 비록 창고마다 가득한데도, 자식없거니 일조(一朝)에 죽고 나면 재물 흩어질 뿐 맡길 데란 없도다.”하여 은근히 아들을 못잊어 하고, “아들 찾아 재물만 맡긴다면야 마음놓여 근심이란 없으리라.”
하는 것이 그의 심정이었다고, 경은 전하고 있다.
부처님에게는 끝없는 재물이 있으시다. 이르는 바 무진장(無盡藏)의 재물이 그것이니, 쓰셔도 쓰셔도 줄어드는 일이 없으신 재물이다. 어째서 그런가. 무한(無限)을 다루는 수학에서 흔히 드는 예를 빌리자면, 가령 지폐를 무한히 가지고 있는 아버지가 있어서 한 아들에게는 지폐번호의 끝이 홀수인 것을 물려주고, 다른 아들에게는 짝수인 것을 물려 주었다 해도 두 아들이 차지하는 지폐는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것의 절반인 것이 아니라 역시 무한의 지폐가 된다. 왜냐하면 홀수도 무한이며 짝수도 무한이기 때문이다. 설사 열명의 아들이나 천만명의 아들이 있었다 해도 결과는 같다. 부처님도 이와 마찬가지이니, 그 깨달음은 무한의 것이기에 억천만명에게 나누어 주신다 해도 억천만명의 각자가 얻는 것은 무한의 진리요, 그렇다고 부처님에 있어서는 그 깨달음이 조금이나마 줄어드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는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무진장의 재물을 온갖 중생에게 나누어 주려 하심이 부처님의 소망이심은, 내가 죽고 나면 그뿐이 아니냐는 한탄과, 아들 찾아 물려주기만 하면 무슨 걱정이 있으랴 하는 간절한 기대에 잘 나타나 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에게 왜 나누어 주시지 않느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주고 싶으신들, 아버지를 등지고 가출하여 타국을 떠돌고 있는 터에 어떻게 주시겠는가. 그러므로 아버지가 자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듯, 부처님은 오직 기다리신다. 중생의 마음이 선 쪽으로 전환하기를 끝없이 기다리신다.
수발타(須跋陀)라는 바라문은 1백2십세나 된 노인의 몸으로 문득 부처님을 뵙겠다는 생각이 일어 찾아갔는데, 마침 부처님은 열반 직전에 계시던 때였다. 부처님의 시자인 아난은 물론 그의 청을 물리쳤다.
“세존은 지금 몸이 극도로 쇠약해 계신데, 당신이 까다로운 질문이라도 하면 그것을 풀어 주시려 하시다가 병환이 더욱 악화될지도 모르오. 그러니 면회는 안됩니다.”
그러나 수발타는 고집을 버리지 않아 두 사람은 언쟁을 벌였고, 이를 이신 부처님은 그를 불러 법을 설해 주셨다. 이에 수발타는 한 번 듣고 아라한이 되니, 그는 실로 부처님의 최후의 제자였다고 전한다. 1백2십세의 수발타 또한 부처님에 있어서는 잃어버린 아들인 것이고, 돌아온 아들을 보시자 임종의 쇠약한 기력을 가지고도 법을 설하심을 주저하지 않으신 것이
었다. 감용이라는 말이 시사하듯 중생의 신심이나 선근이 부처님에게 닿아야[感], 부처님 쪽에서도 거기에 응해 구원의 손길을 뻗으실 수 있는 것이니[應], 부처님이 중생의 회심(廻心)을 기다리실 수밖에 없으신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회심은 마침내 이루어졌으니,“세존이시여, 그때 아들은 품팔이로 떠돌다가 마침 아비 집에 오게 되었나이다.”
라 함이 이를 말한다. ‘품팔이로 떠돌았다’ 함은, 비록 불교의 권외에서 이루어진 것이긴 해도 도를 구함이 거듭되는 중에 조그마한 선근이나마 생겨났음을 뜻하고, ‘마침 아비 집에 오게 되었다’는 것은, 그 선근으로 하여 부처님의 교화대상에 포함되기에 이르렀음을 가리킨다. 무시(無始) 이래 광명에 등을 돌린 끝에 아버지와의 혈연조차 까마득 망각하고 있었던 과거는 과거라 해도, 드디어 본가에 돌아와 제 아버지와 만나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이들 부자의 상면은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어떤 장면을 연출해 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