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미륵신앙의 재현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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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 이영기
1985년 11월 45호
삼국시대의 불상가운데 상당수를 차지하는 것이 미륵반가상(彌勒半跏像)인데 반하여 경덕왕대의 삼국유사의 기사중 1/2(8개)이 아미타(阿顆院)에 관계되는 사료(史料)들이며 조상면(造像面)에서도 질•양(質•量)의 모든 면에서 아미타불들이다.
이것은 경덕왕대 때에 미타 미륵의 병존신앙의 시대를 거쳐 미타신앙이 크게 대두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다.
이는 그 당시 시대적 상황의 요청이며 지배자의 통치이념이 가미한 것이라고 사료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이유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유추는 신빙성을 더하게 된다.
신라가 통일을 전후로 하여 미륵신앙과 미타신앙의 상이한 양상의 전재는 삼국통일이라는 거대한 국가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비롯된 전란의 사회적 불안의 요인에서 기인하고 있다. 통일이전 신앙의 형태를 삼국통일을 목표로 한 흥국이민(興圖利民)의 이념적 출발이라고 가정한다면 통일 이후의 신앙은 사회적 안정에서 오는 극락왕생(極樂往生)을 목표로 한 것이다.
이와 같은 요구는 민족사적인 대사건을 계기로 필요 불가결하게 되었으며 통일후에도 잡다한 국민들을 하나로 묶고 전쟁에서 파생한 정신적 물질적 막대한 피해를 안정시켜줄 지도이념이 절실히 요청되었던 것이다. 이를 담당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불교외에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 신라에 도래한 많은 불교사상 중에서 어떠한 것이었을까.
통일을 전후로 하여 오교(五敎)가 성립되었고 통일후반기부터는 원효, 의상 경흥 같은 분들의 불교운동이 가장 활발하였다. 제각기 다른 종파의 승려들이었지만 이들의 공통점은 통일과 화합의 사상이었고 이것은 신라사회의 국가통일이라는 시대적 조류가 크게 작용한 것이다.
즉 원효는 화쟁(和爭)을 주장하였고 의상은 일승사상(一乘思想)으로 고일(故-)의 사상을 강조했고 경흥이나 순경같은 이들은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철리를 주장하였다.
그들이 전개하였던 그당시 사상은 전문적이고 철학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당시 낮은 지적 수준의 민중들을 이끌 수 있는 사상으로는 적당하지 못하였다. 이들을 이끌 수 있는 것으로써 통일과 화합의 깊은 철리가 깃든 사상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상으로서 그들에게 환영을 받을 만한 것이 미타신앙(彌陀信仰)이었다고 본다. (문명대 ‘경덕왕대의 아미타 조상문제’ P.P.681~682) 이것은 신라의 왕실 및 귀족불교에서 대중불교로 그 폭이 저변으로 확산될 때 요구되는 당연한 귀결이다.
이와 같이 무식하고 미천한 하류층에게 아주 쉽게 믿어질 수 있는 신앙이면서 유식한 상류층에서도 부담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대중성이 짙은 미타신앙을 불교교단에서도 다투어 권장하였을 것이고 국가에서도 잡다한 국민들의 정신적 통일을 꾀하기 위해 명실상부한 통일국가를 성취하기 위하여 민중에게 가장 호소력이 강하고 통일과 화합을 내세우는 미타신앙을 적극 강조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미타신앙이 일반민중이 아닌 귀족사회 속에서 싹이 텄다는 것이다.
신라불교의 초전을 검토해보면 그 성격면으로 왕실귀족불교적 성격과 민간신앙으로서의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여기서 왕실귀족불교의 성격을 자세히 살펴보면 당시 신라의 사회는 종교와 정치가 미분리한 시기로서 정치가 종교에 의속(依屬)한 시기이며 초인간적인 힘을 왕권과 국가의 위임으로 생각하였을 뿐만 아니라 토속적 무격신앙을 지키려는 낡은 씨족적 세력과 끊임없이 계속되는 전쟁에 의하여 국민들의 사상을 통일하기 위한 접합이 불교수용의 필요성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공인불교 이후 정치중심 이념으로써 불교 자체내의 과속한 성장과 함께 싹이 트는 호국불교 사상적 신앙과 문화권의 성장에서도 엿볼 수 있다.
수많은 경전과 불사리 등의 전래를 비롯하여 불상 불탑의 조성, 승단의 조직화, 경론의 경소, 저서 등 활발한 발전을 보았다.
당시의 불교사상은 대•소승의 경론이 동시에 수입•연구되어 최상의 정신문화권을 창조하였다.
사원 불탑 석탑 등의 예술문화권의 창조는 자타공영적이며 적극적이며 불법(佛法) 즉 왕법(王法), 진속일여주의(質洛一如主義)적인 대승불교사상의 반영이 절대적으로 요청되었으며 행동이 수반되는 소승계율의 도덕적 윤리적 측면에서 국가나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고 수호한다는 호국신앙의 성격은 호국경천사상을 근저로 한 호국적인 불교를 이룩하기에 이르렀으며 그들의 정치사상은 왕실과 귀족위주의 권위주의적 불교로 만들어 갔던 것이다. 이와 더불어 국가공인의 절실한 필요성은 국력을 신장시키기 위하여 차원높은 불교사상이 요청되었고 이로 인한 국민사상 통합의 필요성은 모든 문화권의 성장이고 나아가서는 종교의 의속으로 국가왕권의 위엄을 세우고 불교의 호국사상을 근저로 얻어지는 막강한 국력이었다. (장휘옥. ‘신라 미타정토사상의 사척 고찰’ P.P. 9~10)
이와 같은 사실을 유추로 해 보면 미륵신앙에서 미타신앙에로의 전환은 시대의 당연한 요청에 편승하여 지배계층의 의도적인 면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이 돋보인다.
이는 미타신앙이야말로 장기간의 전쟁으로 지칠대로 지쳐 불안에 떨고 있는 민중들에게 현실에서 안락한 국토를 보장함으로써 그들을 평정할 수 있다고 판단되었으며 이런 안정된 민중을 통하여 통일국가로서 명실상부한 자리를 굳히고 교단적으로는 불교를 깊이 전도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들과 뜻을 같이 하였을 것이다.
또한 그 당시 미타신앙이 풍미하게 됨 것은 중국의 지배적인 신앙으로 강력히 대두되었던 영향도 컸지만 신라에서 그렇게 깊이 침투될 수 있었던 것은 안정과 통일국가의 출현이라는 역사적인 사실과 떨어질 수 없는 인과관계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이때가 신라문화의 황금기이자 절정기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전제 왕권의 철저한 작용이 컸다고 보아야 하며 이 절대적인 전제왕권을 뒷받침해 주는 정신적 지주는 미타신앙이었으며 미타신앙의 절정은 바로 전제왕권의 절정을 뜻하다고 볼 수 있다.
통일의 전제왕권은 항상 미타를 요구하였고 미타신앙 또한 전제왕권을 확립시켜 주는 반대급부로 포교의 적극적인 장려를 그로부터 받았다는 것이다.(문명대 전게서 P.P.682-685)
그리고 교리적인 면을 보면 신라 정토교학에서 가장 꽃피운 논쟁은 십념(十念)에 대한 문제였다. 원효는 십념을 둘로 나누어 칭명염불은 현료(顯了)의 십념이니 실천하기 쉬운 것이며 「미륵소문경」에서 설하는 것과 같은 십념은 은밀(隱密)의 십념이니 이는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어서 관무량수경의 십념은 현료의 십념이고 무량수경의 십념은 현료와 은밀의 두 십념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 「미륵소문경」에서 십념이라 함은 보살이 갖추어야 할 10가지 마음가짐을 뜻한다. 법위(法位)는 정토교학에서 제시한 원효의 십념론(十念論)을 계승하되 제18원에 설해진 십념의 내용으로 ‘칭명염불을 재외시켰다. 그후 경흥은 「미륵소문경」의 십념을 아예 거론하지 않았고 무량수경과 관무량수경이 다같이 전개에 하나의 전환을 일으키더니 다시 의적에 와서는 무량수경이나 관무량수경이 다같이 십념은 청명염불로 보되 칭명염불 그 자체에는 「미륵소문경」의 10념도 자연히 갖추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다툼으로써 기왕에 있어온 십념론을 완전히 절충시켰다. 정토교의 경전을 이해하려고 전개시킨 십념론에서 대개의 신라승들이 「미륵소문경」파 같은 미륵계 경전을 끌어들인 것도 일찌기 중국 불교계에서 시도된 일이 없었던 신라정토 교학의 한 특색이다.
십념에 관한 신라승들의 이해방법은 아미타불을 미륵불과 함께 나란히 예배하기 위한 신라인들의 세계관이라 할 수 있지만(안계현 ‘한국불교사연구’ P.P.100~101) 미륵신앙을 미타신앙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교리적 방편이 아닌가 싶다.
또 「유심안락도」에서 7가지 이유를 들어 극락정토가 도솔천보다 우월하여 그 왕생도 용이함을 강조하고 있지만 이것은 경의 내용과 비교•검토해 보면 맞지 않는 점이 많다. (서 융길 ‘신라의 미륵사상’ P.295) 「유심안락도」는 원효의 「무량수경종요」의 정토과 4문(四門) 중의 색무색문(色無色門) 공불공문洪不共門) 루무루문(痛無遍門)의 삼문(三門)을 제외한 나머지 전문이 그대로 전개되어 주축을 이루고 있다. 또 그 곳에 미륵발문의 십념과 관경의 십념과를 동일시하는 견해가 소개되어 있는 점에서 「유심안락도」의 성립시기는 의적(7~8C) 이후로 상한선을 잡을 수 있으며 하한시기는 밀교적 배경은 뚜렷하지만 선법(禪法)의 영향이 보이지 않는 점에서 선법전래(9C초) 이전으로 잡을 수 있는데 최근 신 현숙교수(동국대)가 발표한 「유심안락도」의 저자는 김 대성이라고 발표한 것에 신빙성을 부여해 본다면 당시 신라사회에서 원효의 정토사상을 재천양하려는 뜻을 가졌던 것임에 틀림없다. (고익진 ‘유심안락도의 성립배경’ 불교학보13집 P.170)
이것은 또 미륵신앙보다는 미타신앙의 우월성을 보여주어 불교신자들에게 미타신앙의 권장을 위한 교리적인 뒷받침으로서 누군가에 의해 조장된 것이 분명하다.
현재의 불안(不安)에서 미래의 완전(安全)에로, 희망과 새로움과 젊음을 상징하며 무한한 창의와 발전을 초치케한 당대불로서의 미륵신앙은 역사적 현실이나 사상적 입장에서 불교사상 중 어느 것보다 먼저 신라사회에 적합성을 띠고 생활화되고 사회화되었다. 이것은 미륵신앙이 우리 고유의 신앙(미리신앙)과 잘 습합하여 불교적으로 잘 정리되어 민중들의 생활 속으로 습합되어 불교의 이상국가 즉 현세정토 실현(화랑제도) 등 미륵신앙을 현사회 잘 응용하였다. 이때 미륵불의 조상이 활발히 이루어져 6C에서 7C 전반에 미륵불의 조성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전륜성왕 사상의 국가적인 정책 속에서 미륵의 현실성과 미래의 자주, 평등의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한 미륵의 이상성을 동시에 구유하고 있는 미륵신앙이 현세이익을 존중하고 이상적인 불국토 건설을 하려고 했던 신라임의 염원에 잘 순응하여 융화되어 갔다. 그러나 초기신라 불교의 성격에서 볼 수 있듯이 법흥왕의 개인적인 구복보다는 국가적인 지도이념인 흥국이민의 이변에 절대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고대국가 형성의 성격을 띠고 전래된 신라불교의 한계속에 있는 미륵신앙도 통일후 불교의 대중화와 역사적 필연성인 미타신앙의 등장으로 서서히 식어갔다. 자기간의 전쟁으로 정신적 경제적으로 지칠대로 지쳐 불안에 떨고 있으며 신분계층의 분화로 혼란한 시대 속에서 미륵신앙이 가진 시대의 큰 이상향에 대한 보편적 갈망과 역사적 실현의 가능성을 주로하는 위기신앙으로서의 변모와 백제유민들의 혁명적 미륵신앙은 신라후기 체제에 대한 저항이 주력을 이루게 되므로 강력한 전제왕권의 확립을 위한 미타신앙의 권장과 화랑사회의 부패와 타락에 편승하여 서서히 미륵신앙의 힘은 잃어갔다. 그 이후 미륵신앙도 교리와 사상체로 발전하지 못하고 개인적인 차원의 신앙으로 변모해 갔다. 신라 하대의 미륵신앙은 교리 및 사상의 체계로 발전하지 못하였고 백제지역에서는 이념이라기 보다는 생활과 꿈의 조화를 통해서 혁명의 의지로 변모하여 신라체제에 대한 저항세력으로 나타났고 신라 하대의 잦은 왕실변화의 혼란기를 통해서 상류계층의 국시적 신앙으로 민중본위의 신념체계를 상류사회의 구조적 모순의 심화와 함께 전 민중 사회의 바탕에 확장시키는 새로운 위기신앙으로 점화되었다. 또한 이것은 불교교리에 대한 논리성의 결여로 인해 사신(邪信)과 요괴망탄(妖怪妄誕)한 미륵신앙을 낳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불교 본연의 근본사상에 입각한 영원한 미래불로서 진정한 미륵신앙의 재현을 실현해야 함은 물론 현세에도 민중의 신앙과 습합되어 전해오는 미륵사상을 재점검하여 불교의 힘을 축적해야 하겠다. 또 정사(正史) 속에서 소외되고 버림을 받아왔던 미륵을 추앙했던 역사적 실존인물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을 통하여 재음미해 보아야 할 것도 우리들의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