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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보살의 원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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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최석호 1985년 11월 45호
얼마전 K지방 B사를 방문, 평소 존경하던 조실스님을 찾아 뵈었다.
“저, 왔습니다” “음, 오랫만이군. 요즘 뭣하고 지내나?” “예, 포교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래, 장한일을 하는군. 그런데 무얼 가르치나? 가르치려면 한 소식해야지. 한 소식 했어?” “아, 예, 저 아직…” “그렇다면, 어떻게 가르쳐?, 눈먼 소경이 어찌 길을 안내할 수 있는가? 다 그만 두고 네 공부나 하지. 참선을 해.”
하직 인사를 하고 일주문을 나서니 맥이 탁 풀렸다. 스님을 뵙고 격려를 얻기보다는 갈등만 심해지는것 같았다. 그렇지 않아도 명소에 수행에 대한 동경 때문에 포교 활동에 대한 일말의 회의도 가지고 있던 차에 스님의 말씀은 더욱 나를 어지럽게 하였다.
현대는 자연과학의 발달로 인간의 삶이 많이 향상되었다고는 하나, 우리나라의 현실은 반려 긍정적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서양 문물의 무분별한 도입과 수용은 민족 고유의 전통을 무너뜨리고, 주체성을 상실시키고 있으며, 외세에 의한 민족분단과 그 갈등으로 전쟁의 끊임없는 위협을 받고 있다.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억압은 다수 대중을 상대적 빈곤 속에서 고통받게 하고 있으며, 타락한 문화는 대중을 방황하게 만들고 있다. 이런 삶의 현장속에서 아우성치는 병든 중생을 도외시하고, 무슨 깨달음이 불법이 따로 있을까? 의사와 병원과 약이 환자를 위해서 존재하듯 부처님과 사원과 불법이 앓는 중생을 위해서 있다면, 그들에게 불법이 베풀어지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
포교의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마장은 바로 포교와 수행의 선후 문제인 것 같다. 현실은 우리를 포교의 현장으로 부르고 이제까지 배워온 포교는 수행을 주장한다.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포교에 신명나 있다가도, 큰 스님 한 번 뵙고 참선하라는 말씀을 들으면 마음이 흔들린다. 포교사에게 어려움을 겪을 때 힘이 되어주는 것은, 큰 스님의 말씀보다는 오히려 청소년들의 초롱초롱한 눈망울과 신도들의 감사해 하는 순수한 얼굴을 볼 때다.
「뎃바닷타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 이제 연세도 많으시고 하니 교단을 이끌고 지도하시기에 힘드시겠습니다. 교단을 저에게 맡기고 좀 편히 쉬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뎃바닷타야, 그런말 말아라, 나는 아직 한번도 교단을 이끈다거나, 지도한다고 생각해 본적이 없다. 교단은 수행자들이 모여 물과 젖이 하나가 되듯 잘 화합하여 가지 않느냐?」
이 대화속에서 알 수 있듯이 부처님은 교단을 이끈다거나 지도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제자들과 함께 한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오늘 우리들은 중생을 깨우친다거나, 가르친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포교와 수행의 우선 순위가 논의되는 것은 아닐까? 함께 길을 찾아 나선 도반이라는 생각을 갖는다면 친구끼리는 서로 격려도 할 수 있고 충고도 받을 수 있다. 그것이 곧 포교요, 수행이 아닐까? 포교의 현장에 서 있는 포교사가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법행을 떠난 선재동자처럼 배우고, 수행하기 위해서 현장에 있다면 이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지나 않을까?
포교사가 대중을 깨우친다거나 가르친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들과 함께 하면서 배운다는 생각이 과연 타당한가? 그렇다 그것은 대중들이야말로 진정한 보살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웃이 고통 받을 때 함께 슬퍼하고, 이웃이 어려울 때 도와주며, 그대로 자비행이며, 일한 만큼 댓가를 받지 못하니 그대로 무주상보시행이며, 사회의 온갖 억압과 냉대를 받으나 꿋꿋이 살아가니 그대로 인욕행이며, 재물로 권위도 아만도 버릴것 없으니, 그대로 출가행이며 스스로 보살이라는 생각도 내지 않으니 참으로 보살행이 아닌가? 민중은 가르침을 받고 지도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종교인이나 지식인이나 사회지도자가 민중의 생활에 비추어 자신의 생활을 참회해야 할 모범의 대상이다. 포교사는 이런 자기반성과 겸손 없이는 불법을 올바로 전할 수 없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외치는 신부, 목사는 부유하고 “일체의 소유물은 본래 네 것이 아니니 버려라”고 가르치는 스님들은 서로 많이 갖기 위해서 싸우고 외제만을 쓰는 부유층이 대중을 향해 외제 불매 운동을 주장하는 이런 혼돈과 모순의 시대에선 참으로 수행의 길은 민중의 삶을 거울 삼는 것 뿐이다. 이런 수행의 모범을 원효대사는 이미 천수백년전에 우리에게 보여 주시지 않았는가?
종교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기 자신에게 솔직한 것이다. 자신의 양심에 솔직할 때만 깨끗한 마음이 우러나온다. 이 지성심이야 말로 신앙의 요체다. 수많은 계율과 교리보다도 이 지성심이야 말로 계율을 지키게하고 인과를 믿게 만든다.
요즈음은 불교의 현대화라 해서 불교의 근본 가치관이 흔들리는 것 같다. 병든 현대사회의 제 모순을 무분별하게 받아 들이는 것은 불교의 속화만을 가속화 시킬 뿐이다. 불교의 현대화는 속화를 의미하지 않는다.
병든 현대사회를 불교적 가치관에 입각해서 고쳐나가려는 것이 불자의 사명이어야 한다. 사회는 불법에 기준해서 고쳐져야 할 대상이지 불법이 추종해가야 할 대상은 아니다.
일선에 있는 포교사들이 겪는 유혹은 기독교적인 방법의 도입이다. 부흥회니, 십일조니 하는 방법을 통해 외적 성장만을 거듭해 나가는 교회의 전교방법을 본받아서는 안된다. 불법은 고통받는 중생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불교를 위해서 중생이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원의 외적 성장을 위해 신자가 필요한 것도 아니며, 또 그런 것은 이미 불법도 아니다. 한 사람의 대중이라도 인생의 바른길로 나아가도록 인도하는 것이 불교의 목적이다. 그러나 현장에서 고생을 하다보면 주객이 전도된 생각을 갖기 쉽다. 시원은 그것이 스님의 수행을 위해, 신도의 신행활동을 위해서만이 필요하다. 전시용도 구경거리도 아니다. 그런데 막대한 경비를 들여 경쟁하듯 거대한 건물 불사만을 일삼는 일부 지도자는 깊이 반성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대중은 살 방하나 마련 못해 고생하는데, 자신의 법력을 과시하기 위해 어쩌다 한번 쓰기 위해 고루대각을 짓는 것은 삼가했으면 한다. 가난한 달동네에 하늘을 치솟는 교회건물을 보면서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인식한다면 스스로의 잘못도 볼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포교사들이 포교의 일선에서 악조건을 무릎쓰고 열심히 수행하고 있을 때, 조건이 갖추어진 큰 절들이 안일에 빠져 있는 것을 볼 때면 가슴이 아프다. 그들은 우리 주변에 있는 일반인과 같이 자신의 이익과 안락만을 위래 살아가니 그들은 이미 불교인이 아니다. 단지 불법을 빙자하여 이익을 취하는 생활자들일 뿐이다. 포교사는 이들을 보고 분노하기 보다는 부처님을 우러러 보면서 위로를 받아야 한다. 45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유행하시면서 중생이 있는 곳이면 어디 아니 가신 곳 없으신 부처님, 항상 걸식과 노숙으로 살아 가시면서 중생의 고통이 있는 곳이면 언제 어디서나 진리의 말씀으로 치유하신 부처님, 그분의 모습만을 생각한다면 오늘 우리들의 조건이야 얼마나 좋은가?
포교사는 포교가 곧 수행임을 깨달을 때, 흔들림 없는 정진을 할 수가 있다. 세상의 많은 길 중에서 이 포교의 길에 섰을 때 “이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구나”하는 안정과 기쁨을 가져야 한다. 매일 순간 순간은 어렵지만, 지나간 과거를 돌이켜 보면 보람되고 기쁜 일이었음을 느껴야 한다.
포교사는 모아둔 대중을 향해 강연하는 사람이 아니다. 민중의 고통을 알고 그 고통을 제거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민중의 상담자이다. 그러기에 항상 그들 곁에 있어야 한다. 그들의 언어로 그들의 생활방식에 맞게 설법해야 한다. 자신의 과시나 무분별한 지식의 남발은 오히려 그들에게 위화감만을 줄 뿐이다. 중앙 포교사가 모아둔 청중을 향해 강연할 때, 그 사람들을 모은 수 많은 일선의 보이지 않은 이들의 포교노력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무책임한 발언과 자기 과시는 지역포교를 망친다는 사실을 명심했으면 한다.
아픈 자만이 타인의 아픔을 안다고 우리 모두 이웃의 삶의 고통을 나누어 가질 수는 없을까? 오늘의 자
신의 안락이 이웃의 고통위에 존재함을 연기적으로 본다면 나와 남을 동시에 안락하게 하는 길은 자비행을 실천하는 수행 뿐임을 자각할 수는 없을까? 오늘도 지옥문 밖에서 울고 있는 지장보살의 원력이 모든 포교사의 귀감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