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불교를 다시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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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김상조
1985년 11월 45호
나는 최근에 비교적 친했던 사람에게서 내가 퍽 딱하고 한심한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
학창시절의 한 때에는 불교학생회 등에서 비교적 열심이었던 그 친구가 아직도 자네는 불교니 청년회니 하는데 관련되어 있느냐면서 그런 나의 모습이 한심하다고 하는 말이다.
불교니 청년회니 하는 것은 한 때 호기심과 취미삼아 학창시절에나 해 볼 일이지 나이 40에 가까운 사람이 좀 더 현실적이어야지 늙어가면서 무슨 주책이냐는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뒷통수를 맞은 듯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에는 오늘날 학생회라던가 청년회라던가 하는 청년층 불교인들의 의식구조에 상당한 문제점을 단적으로 나타내주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종교를 믿는다는 것이 한때의 취미쯤으로, 흥미쯤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적어도 수 천년 동안 인간이 창조한 종교로 인한 문화적 유산의 비중으로 보나, 도덕적 윤리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인생의 참된 삶의 길을 가르쳐 온 종교를 믿는다는 것을 무슨 유흥이나 여유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태도에 대하여 우선 경악을 금할 수 없다.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자기 신념을 그 종교의 가르침과 일치시키는 일이요 그 종교가 가르치는 교훈을 적어도 실천할려고 노력하는 것이 신앙하는 사람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중대한 문제를 아직도 유흥이나 여유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청년들이 우리 주변에는 없을까? 물론 종교에 대한 기대나 호기심을 갖지 말라는 말은 아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어떤 종교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되는 것이 대부분의 신앙을 갖게 되는 동기가 되며 또한 통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랬다 하더라도 차츰 신앙심이 생겨 신앙인이 되어야 하는데 그 반대 현상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지금은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절이라는 곳이 나이가 든 우리 어머니 또래의 부녀자들이나 다니는 곳이라고 많이 생각해 왔고 사실 절에서 얼마전까지만 해도 젊은 사람들 보기가 드물었다. 그러나 차츰 현대에 와서 학생회가 조직되고 청년회가 조직되어 도시를 중심으로 청년불교가 차츰 확대되어 이제는 그래도 그러한 인식이 많이 달라졌고 이제 큰 행사가 있을 때마다 젊은 불자들의 활달한 모습은 그래도 한국불교의 밝은 미래를 기약해 주기도 한다.
그러한 밝은 면에 비하여 청년 불교에 대한 반성을 내 나름대로 해 보면 그동안 한국 불교가 너무 지나치리 만큼 교리 위주로 법회 운영을 해 왔고 지식 위주의 법회 운영을 해 왔다는 점이다.
그러한 법회 운영은 일년에 한두번 절에 나가기만 해도 불교 신자가 되고 불교를 몇 십년을 믿어도 불교의 근본교리가 무엇인지도 모르기가 일쑤인 재래의 신도들을 너무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그러한 무지한 불교가 제일 문제시 되었기에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반대인 교리 일변도, 지식 일변도의 법회 운영에도 이제 한계점에 이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한다.
지식이나 교리는 어떤 종교의 이념적인 면을 제시해 주는 중요한 부분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으로써 불교의 완성은 아니다. 특히 불교와 같이 실천궁행을 강조하는 종교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불교의 교리는 사실적이며 또한 논리적이기 때문에 상당히 사변적인 쪽으로 흐를 위험마저 안고있다.
작은 교리라도 배우면 그것을 실천할려고 노력하기는 커녕 오히려 입만 살아가지고 딴 사물, 특히 승단의 비행(非行)이나, 그 원인이나 현실적인 바탕은 이해할려고 하지도 않고 사찰에 대한 무리한 요구 사항을 항변하거나 자신이 소속된 조직을 공격하고 무엇이든지 부정적인 시각을 갖게 되는 위험한 경우도 가끔있다.
그리고 기본교리도 모르고 선불교(輝佛敎)나 공병(空病)이 들어 도저히 고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월 회비 등 자신이 회원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는 소홀히 하면서 절에서는 공짜로 무엇이든 할려고 하는 풍조의 만연과 사찰을 대상으로 포교에 통 관심이 없다는 등 어떤 스님은 어떻고 또 어떤 스님은 어떻다는 등의 스님 품명회나 하면서 자신을 책(責)할 줄도 모르는 자세는 개탄해야 하리라 본다.
종교는 퀴즈대회나 4지선다형으로 문제를 풀 수 없는 것이다. 삶의 문제를 Q ×로 나타낼 수 없음과 같이 인생을 가르치고 배우는 자세도 그래서는 안된다.
진지한 탐구와 성실한 수행정신이야 말로 부처님의 가르침에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지름길이 아니겠는가.
우리 청년 불자들이 그동안 기복(析騙)불교라고 욕해 온 우리 할머니나 어머니가 어떻게 불교를 믿는가? 한번 살펴보자.
그들에게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쥐꼬리만한 지식으로 기복불교니 무당불교니 하고 흉보고 형편없이 평가해 버릴 만큼 우리의 자세는 당당한가 하는 문제다.
옛 부터 한국불교의 맥을 지켜 온 그분들은 적어도 종교는 신성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고 절에 기도하러 가기 전에 목욕재계함은 물론 공양미에 돌과 뉘를 직접 고르고 양초나 공양 올릴 나물까지 손수 다듬는 것은 물론 부정한 날을 버리고 좋은 날을 택해 절에 가는 그분들의 정성과 신심에 우리의 지식이 과연 값할 수 있을까?
그러한 정성과 신심이 오늘의 불교를 있게 한 밑바탕이 아닐까. 그리고 그런 신심을 얻고자 우리는 불교의 교리를 배우는 것이 아닐까?
배울수록 더 겸손해야 할 사람들이 배울수록 더 거만하고 행이 나쁜 것은 왜 그럴까? 거기에는 분명히 무언가 잘못되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머리로만 입으로만 배웠지 실천이 없는 빈 껍데기 신심이기 때문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종교는 깨끗한 마음과 남을 위한 희생과 봉사와 겸손함을 가르쳐서 세상사람들에게 빛이 되려는 것이지 더러운 마음과 남을 깔고 뭉게고 해치며 남에게 지식이나 자랑할려고 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리고 이런 좋은 것이 일상생활에 활용되고 그것을 생활신조로 삼아 살겠다는 다짐이어야 하지 어찌 이러한 것을 일시적인 여유나 유흥으로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기왕 말이 나왔으니 스님들께도 한 말씀부탁 드리고 싶은 말은 너무 지식 위주의 설법에 치우치지 말라는 부탁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 설법 내용이 너무 이념적이고 실천할 수 없는 내용보다는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는 내용이면 좋겠고 스님네도 실천하지 않거나 못하는 것을 어떻게 신도들이 실천할 것인가를 감안하여서 좀 더 진솔하고 실천가능한 것을 설법해 주시면 좋겠다.
그리고 설법하는 내용도 설법하는 스님마다 너무 달라서 혼란과 갈등이 오지 않도록 같은 주제라면 비슷한 교안이 있어서 비교적 통일되도록 해 줄 것을 당부드리고 싶다.
화엄경 말씀에도 신심은 모든 착한 법을 나게 하고 도를 닦는 공덕의 어머니라고 하였다.
미래의 한국 불교가 청소년 불자들에게 달려 있는 만큼 일시적, 취미적, 유흥적 기분에 취한 믿음이 아니고, 또한 마른 지식 위주의 믿음이 아니고, 생활속에 살아있는 참신앙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간절하다.
우리는 좀 더 어리석고 바보스러울 필요가 있다.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현세적 이익이나 추구하고 남보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출세를 하고 내노라 하고 기개를 펴고 살기 위해서가 아니다.
더러는 양보하고 선량해지려고 노력하다가, 세상에서 볼 때는 실패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종교인의 태도는 전자(前者)와 같은 삶의 태도가 아니고 후자(後者)와 같은 삶의 태도라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후자에 속한다면 기꺼이 나는 후자의 삶을 택하겠다.
더 인간다와지기 위해, 더 거룩해지기 위해 부처님은 왕위를 버렸고 모든 것을 버리고 무소유(無所有)가 되지 않았던가.
나는 앞으로 계속 철없는 사람이 되고 싶고 그런 똑똑한 친구들에게는 더 많은 주책을 부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