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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사의 인물열전(人物列傳)-연담유일(運澤有一)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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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의 향기 - 시명 1990년 07월 101호
연담 유일스님은 숙종 46년‘서기 1720년 호남 화순 천(千)씨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총명하여 이미 10대에 유교의 경사(經史)의 여러 서적들을 섭렵하였으나, 불행하게도 7세에는 부친을 여의고 13세에는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으므로 고아가 되고 말았다.
18세에 승달산(僧達山) 법천사(法泉寺)의 성철(性哲)스님을 따라 드디어 출가하여, 19세에는 구족계를 받고 이후 보흥사(普興寺)의 영허(靈虛)선사에게서「사집(四集)」을, 대둔사의 벽하(碧霞)스님으로부터 「능엄경」을, 축서사의 영곡(靈谷)스님으로부터 「원각경」을, 보림사의 용암(龍巖)스님으로부터 「기신론」과 「금강경」을 배우는 등, 그 당시 최고의 강백(講伯)들을 역방하여 교학의 가르침을 받았다.
영조 17년인 서기 1741년 봄, 해인사로 와 그 당시 화엄의 대종장 호암대사를 뵙고 그를 시봉하면서 염송을 비롯한 선문(禪文)을 배웠는데 2,3년 여의 기간 동안 부지런히 선을 공부하여 선지(禪旨)를 얻었다. 영조 21년인 서기 1745년에는 법형(法兄) 젤파대사에게서 화엄을 배웠고, 다음해 송광사 동암에서 설파스님의 시봉으로 입실(入室)하게 되어 사실상 설파스님을 스승으로 모셨던 것이다.
그 이후 동리산(桐裏山)으로 가 풍암(楓巖)스님을 역방하는 한편 법운암(法雲菴)으로 가 상월(霜月)스님을 만나 문법(問法)하는 등 불법을 배우고 수행하기 위해 실로 어느 스승을 가리지 않고 그 당시 고승이란 고승은 모두 찾아가 널리 배웠는데, 이러한 구도열은 스님의 사상체계로 나타나는 등 그의 저술에 더욱 깊이와 넓이를 더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스님의 나이 29세 되던 해인 1748년에는 강원도 장구산(長丘山)에 53불(佛)을 조성하기도 하였으며, 31세 때에는 보림사의 진선(震先)스님의 청으로 처음으로 강석(講席)을 연 이래 60세에 이르기까지 30년간 강의를 하였는데, 늘 그의 강석에는 사방에서 몰려든 청강생이 백여 명이나 되었다.
서기 1777건 대중의 여망에 따라 밀양 표충사의 원장으로 추대되었고, 1779년에는 창평 서봉사(瑞鳳寺)에 머물다가 삿된 무리들의 무고(誣告)를 받아 감옥에 잠시 갇히는 신세가 되기도 하였다.
감옥에서 석방된 뒤 정조 5년 서기 1781년에 시끄러운 세상을 피해 금강산으로 들어가 18년간 머물다가 1799년 살던 금강산을 떠나 다년간 머물렀던 보림사 삼성암으로 돌아온 후 점차 병세를 보이다가 그해 2월 3일 시지에게 마지막 가르침을 남기고 업적하니 세수 80이며 법랍이 62세였다.
스님의 마지막 말씀은 ‘인간의 죽음과 삶은, 밤과 낮이 열리고 닫히는 것과 다름 없나니 무엇을 슬퍼할 것인가[人之死生如 夜之開合 何必爲悲〕’라는 의연한 말씀이었다.
스님의 저술로는 화엄경에 대한 스님 스스로의 사기(私記)인 「연담사기(運潭私記)」를 비롯하여 「화엄유망기(華嚴遺忘記)」 5권, 「기신사족(起信蛇足)」 1권, 「금강하목(金剛蝦目)」 1권, 「원각사기(圓覺私記)」 2권, 「능엄사기(楞嚴私記)」, 「현담사기(玄談私記)」 2권, 「대교유망기(大敎遺妄記)」 5권, 「제경회요(諸經會要)」 1권, 「염송착병(拈頌著柄)」 2권, 「사집사기(四集私記)」 1권의 저술이 있고, 또 문집(文集)으로 「임하록(林下緣)」 4권이 전해지고 있다.
이와 같은 저술목록으로 보더라도 스님의 활동과 학문적 깊이와 사상이 얼마나 넓은 것이었나를 엿볼 수 있는데, 아직까지 스님의 학문적 업적에 비해 그에 대한 연구논술이나 그의 학술적 면모에 대해서는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스님의 사상적 세계나 특정들은 여러 저술을 통해서 나타나 있으므로 일괄적으로 나타내기는 어려우며, 아직도 그에 대한 체계있는 연구논문이 나와 있지 않으므로 무엇이라고 피력하기는 어렵다. 스님의 화엄학에 대한 태도는 그 당시 화엄의 또 다른 대가 묵암(默菴 ; 1777∼1790)과의 학문적 논쟁을 일으킨 스님의 저술 「심성론(心性論)」이 그 기초가 되는데 뒷날 연담스님의 법손들에 의하여 번쇄적이고 논쟁의 근거가 된다고 하여 불태워 없애 버림으로써 그 전체적인 면모는 알 수 없지만 그 「심성론」의 서문이 남아 있어 스님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대체로 화엄의 기본적 주장은 중생의 마음과 부처님의 마음은 별다른 실체를 갖는 것이 아니고 하나’라고 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 중생의 마음과 제불(諸佛)의 마음은 그대로 하나의 총체적인 대실재를 이루는 것인지 아니면 그 마음 하나하나는 개별적인 실재인지 하는 문제가 논쟁거리로 대두된 것이다.
묵암스님은 중생과 제불의 마음은 각기 원만하고 완전한 것이지만 아직 그 마음을 총괄적인 대실재는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연담스님은 중생과 제불의 마음은 각각 원만하고 완전하여 원래 하나이고 총괄적인 대실재에 귀일(歸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묵암스님은 개개(個個)의 마음이 소우주이기 때문에 그 마음 하나가 하나의 실재이기는 하지만 그 하나하나의 실재는 대실재 속에 포섭되지 못하는 것이라고 본 데 반해 연담스님은 실재 자체는 우주와 동일한 하나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스님의 이러한 일심에 관한 관점은 화엄사상의 심즉만유(心郞萬有)라는 주장과도 통하고 특히 일심사상을 상기시키고 있다.”(한국불교연구원 著「해인사」)
이러한 불교사상뿐 아니고 연담스님은 유교에도 조예가 깊었으므로 당시 유학자들에 의한 불교 견해의 잘못을 지적하기도 했는데, 스님의 견해가 워낙 탁월하였으므로 그 당시 유학자들의 편협한 배불론(排佛論)에 대한 관점을 시정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사실 이제까지 불교사의 연구는 신라나 고려의 불교사 연구에 너무나 편중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조선 말(末), 즉 근대사의 고승에 대한 자료의 부족은 절대적이어서 심각하기까지 하다.
앞으로 이 분야에 대한 연구서적이 보다 많이 나오기를 기대하면서 근대 고승들의 열전을 씀에 있어 일지사가 간행하고 한국불교연구원이 저술한 「한국의 사찰」시리즈의 도움을 얻었음을 부기하면서 거듭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