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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불교의 해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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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함경역해 - 법성 1985년 11월 45호
십이인연경(十二因緣經)

이와같이 내가 들었다.
한 때에 부처님께서는 슈라바스티국 제타숲 외로운 이 돕는 장자의 동상에 계시면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시었다.
“옛날 비파시부처님께서 아직 정각(正覺)을 이루시기 전에 깨달음의 자리에 머무시다가 오래지 않아 부처님이 되시었다. 부처님은 보리수밑에 나아가 풀을 깔아 자리를 삼으시고 가부좌로 앉으셨다.
그리하여 단정히 앉아 바른 생각으로 이렛 동안을 십이연기(十二緣起)에 대하여 역(逆)으로 순(順)으로 관찰하시었다. 곧 「이것이 있으므로 저 것이 있고 이 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는 것이니 「무명(無明)을 인연하여 행(行)이 있고 행을 인연하여 식(識)이 있고 식을 인연하여 명색(名色)이 있고 명색을 인연하여 육입(六入)이 있고 육입을 인연하여 닿음(觸)이 있고 닿음을 인연하여 느낌(受)이 있고 느낌을 인연하여 애착(愛)이 있고 애착을 인연하여 취함이 있고 취함을 인연하여 존재(有)가 있고 존재를 인연하여 남(生)이 있고 남을 인연하여 늙고 죽음(老死)이 있으며 또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모이고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없어진다」
비파시부처님께서는 이렛동안 바르게 앉으신 뒤 삼매에서 일어나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이와같이 모든 법은 생겨나나니
수행자가 부지런히 선정 닦으면
모든 의심 미혹을 길이 떠나서
인연으로 온갖 법이 생김 알리라
인으로 생기는 괴로움 알고
모든 느낌 없어져 다함을 알며
인과 연이 이룬 법 다함을 알면
곧 모든 번뇌의 다함 알리라
---------중략-------
이와같이 모든 법은 생겨나나니
범지가 부지런히 선정 닦으면
밝은 지혜 모든 세간 두루 비침이
마치 해가 허공에 머무름 같아
악마의 모든 군사 깨쳐 부수고
온갖 얽힘 깨달아 해탈하리라”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여러 비구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기뻐하여 받들어 행하였다.
(잡아함경 권15)


(해 설)

1 . 생성하는 세계

연기론은 우리들의 생활세계(十二處)가 막혀있고 머물러 있는 닫혀짐의 세계가 아니라 서로서로 스며들며 약동하는 열려짐의 세계 전체성의 세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연기론은 존재와 인식에 있어서 미리 마련되고 미리 주어진 실체적인 출발점을 부정하는 생성의 세계관인 것이니 연기적인 세계관에서 보면 온갖 것은 주체와의 살아있는 관계속에서 지금 현전하고 있는 그 무엇(唯心所顧) 입니다.
그런데 존재일반을 어떤 제일원인의 토대위에서 근거지우려는 것은 인류정신사속에 오랫동안 뿌리내려진 사고유형의 하나입니다. 그 한 예로 고대 그리스인들은 변화하는 만물의 제일원인으로서의 아르케(Arche)를 사유하고 탐색해 왔습니다. 그렇게 하여 서양철학은 그 아르케를 정신적인 이데아(Idea)로 보는가 물질적인 원자로 보는가에 따라서 관념론과 유물론으로 갈레지어져온 것입니다. 물론 헤겔철학과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에 이르르면 정신과 물질이 변치않는 실체가 아니라 과정성과 운동성으로 나타나지만 아직 실체의 자취는 철저히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연기론은 일원적이거나 다원적이거나 주관적이거나 객관적이거나 모든 형태의 실체주의를 거부함으로써 세계를 주체적인 생명세계로 파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본경에서 설한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는 여래의 교설을 해석할 때도 실체주의의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될 것입니다. 즉 이것은 저것 앞에 전제된 이것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은 서로가 서로를 기다려서 비로소 있어지는 이것과 저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과 저것은 제 홀로만으로서는 아무것도 아닌 어떤 것이지만 다른것을 만남으로써 자신을 전체로서 드러내는 이것과 저것인 것입니다. 즉 온갖 것은 제자신을 벗어나 이미 다른 것 속에 나가 있고 서로 하나된 터전속에서 겹쳐지고 스며들고 있는 열려진 존재들인 것이니(相郞相入) 모든 것은 자기부정의 심연에서 절대적으로 현전하는 관계의 존재(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과정의 존재(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긴다)인 것입니다.
이러한 뜻을 아함경전은 온갖 것이 실체가 없으므로(諸法無我) 과정과 관계로서 새롭게 나타난다(諸行無常)고 표현하고 있고 중론(中論)은 상대적인 현실경험의 세계(俗諦)가 바로 절대적으로 주어지는 선험성의 세계(眞諦)라 하였으며 화엄학(華嚴學)에서는 연기(緣起)에 실체가 없는 줄 알면 상대속에서 평등의 진리를 구현할 수 있다(因果緣起 理實法界)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불교의 기본적인 입장에 서 우리는 십이연기설의 열 두가지 범주를 하나하나 독립된 영역으로 파악해서는 안될 것이며 그것들은 서로 맞물리고 서로 어우러져 이루어가는 범주들로 이해해야 될 것입니다. 십이연기설은 아함부 경전에 있어서 연기설의 가장 잘 갖추어진 표현양식이며 온•처•계(讀處界)설 육육법(六六法) 사제법(四諸法)이 하나로 녹아서 이루어낸 원융한 교설체계인 것입니다. 즉 유전연기(流轉緣起)와 환멸연기(還滅緣起)를 밝힌 사제법의 체계에 존재와 인식의 구조를 밝힌 온•처•계설 육육법이 하나로 결부된 교법인 것이니, 이것은 우리들의 구체적인 생활세계의 장이 인식의 영역 존재의 영역 실천의 영역이 따로 따로 나누어짐이 없이 서로 맞물려 이루어가는 전체성의 세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십이연기의 서로 맞물린 고리가운데 식(識)⇔명색(名色) ⇔육입(六入)의 구조는 십이처 십팔계와 조금도 다름없는 법 구조로서(명은 섭이처의 의근이며 색은 십이처의 오근, 육경이므로 섭이연기의 식-명색-육입의 구조는 육근-육경-육식의 구조임) 의식과 존재 주체와 객체가 상호규정하는 연기의 세계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식(識)은 흔히 이해하는 바와 같이 대상을 파악하는 주관적인 의식으로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관주의적인 잘못은 水野弘原의 原始佛敎를 위시하여 기존 韓•日의 모든 불교학 저서가 범하고 있는 잘못이다)
식(識)은 아는자-알려지는 것의 본질적인 관계성으로서 주어지는 것이니 식은 대상을 지향하는 주체의 힘(名 : 意根)과 주체 앞에 자신을 던져주고 있는 객체(色 : 六境)가 온통 그 안에 들어와 있는 현실 경험의 장인것입니다. 그러므로 식(識 : 自證分)에 있어서 알려지는 것(相分 :所緣)은 아는 자의 외적 대상이 아니라 본질적인 자기내용을 이루어 주고 있는 것입니다(그러므로 농가경에서 마음이 날때 존재가 난다고 한 명재는 존재가 날 때 마음이 난다는 명제와 동일한 지명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십이연기설에서는 식의 아는자(見分) 와 알려지는 것(相分)을 이루어주되 식 안에 온통 들어와 있으며 식(識)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마음과 세계를 명색(名色)이라고 합니다.
즉 명(名:Nama)은 아는 자를 계속 이루어주는 주관의식의 뿌리(意根, 제8식 見分)이며 색(色:Ripa)은 알려지는 것을 이루어주는 세계(六境)와 감각기관으로서의 신체(五根)를 말합니다.
그런데 명과 색으로 표시된 선험성(초월의 의미가 아니라 경험화되지 않았다는 의미로서의 선험성)으로서의 마음과 세계가 겹쳐져서 경험성으로서의 식(識)을 이루고, 식을 통해서만 자신의 활동성을 드러낸다는 것은 마음(名)과 세계(色)가 독자적인 실체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명과 색은 둘이 없는 전체성의 터전속에 서로 사무치고 있는 것이니 유식(唯識)에서는 명과 색의 이와같은 하나됨의 장을 제8아뢰야식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 아는자-알려지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는 식(識)의 현실태(習氣)는, 식 속에 자신을 감추고(所藏) 활동하는 명과 색으로부터 다음의 식(識)을 불러 일으키는(能藏) 공능(功能)이 되는 것이니, 잠재태의 어두운 밤으로부터 현전의 낮으로 표출될 수 있는 명과색(含藏講)의 약동하는 생명의 힘을 유식학은 종자(種子)라고 표현합니다.
또한 십이연기설에서의 육입(六入)이란 마음(意根)과 신체(五根)의 결합체로서의 자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자아는 실체로서의 자아가 아니라 정신-물질 자아-세계의 연기적인 관계성 속에서 활동하는 자아인 것이니 이것을 본경에서는 식(識)⇔명색(名色)⇔육입의 체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와같은 고찰을 통해서 보면 식⇔명색으로 표시된 십이연기설에 있어서의 주체-객체의 관계와 주-객의 자기 전개로서의 생성-소멸은 실체없는 주-객 생-사의 세계이니 관계는 관계없는 관계며 과정은 과정없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은 존재의 참모습을 바로 보지 못하는 착각된 앎(無明)과 함(行)으로 말미암아 주-객 생-사를 실체적인 대립의 세계로 파악함으로써 존재(有)의 얽매임 속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즉 식(講)이 주체객체를 매개할 때(觸:육근 육경 육식이 마주침) 무명에 빠진 중생은 대상에 대한 집착속에서 대상을 무관심 속에 내버려두거나(不苦不樂受) 대립적인 느낌(苦受 •樂受)으로 받아들이게(領納) 되어 자신에게 고통스러운 대상은 버리고 자신에게 즐거운 대상은 소유(取) 하고 더욱 오래 지키기 위해(愛) 투쟁과 갈등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중생은 유한성의 심연속(生死)에서 혜어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니 이와같이 중도실상으로서의 주-객을 실체적인 주-객으로 파악하는 삶의 태도를 본경은 무명(無明•業相, Avidya)이라고 이름하였으며 다시 그 무명이 주-객 사이의 상호반응의 에너지로 구체화되어 살아나오는 것을 행(行:身口意三業, 轉相•現相)이라고 한 것입니다. 즉 무명과 행은 생사(生死)를 일으키는 원인이면서 생사를 생사로 국집함으로써 일어나는 현실적인 삶의 결과인 것이니 무명 그 자체도 어떤 실체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함경은 도처에서 그런 뜻을 밝히기 위해 무명을 정의하여 주체가 객체를 대해서 소외와 분열을 일으키는 것(因眼見色生貪愛)이라 하였습니다. 즉 십이연기의 각 범주의 법은 독자적인 실체가 아니라 관계를 통해서 일어나는 법이므로 그 모든 법은 있되 있는 법이 아니며 조건의 성숙으로 새롭게 드러나는 법이므로 없되 없는 법이 아닙니다. 대승경전은 이와같이 과정성과 관계성으로 주어지는 십이연기의 무자성의 터전, 십이연기를 포괄하는 전체성의 세계를 불성(佛性)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중생이 나고 죽음, 주체 객체의 대립속에서 갈등한다 하더라도 불성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며 무명을 끊고 주체 객체 있고 없음의 대립을 해소한다 하더라도 새로 불성이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주체 객체의 대립으로 나타나는 부조화된 삶의 현실이 창조적인 삶의 지명 조화로운 역사세계로 전환되어 나타날 뿐이니 이러한 뜻을 대열반경에서는 십이연기를 보는 자가 불성을 본다고 하였으며 영가선사는 증도가에서 무명의 참된 성품이 바로 불성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흔히 三世兩重因果로 이야기 되어지는 십이연기의 해석 즉 무명•행을 과거의 인으로 생•노사를 미래의 과로 보는 시각은 십이연기의 구조를 실재론적 입장에서 거시적으로 파악한 것임)

2. 현실적인 자유

열 두가지로 범주화된 법이 하나의 일관된 체계로 이어진 십이연기설을 ‘무명이 있으므로 존재(有)의 얽매임과 나고 죽음이 있다’고 읽으면 이것은 유전연기의 구조를 설명한 것이고 ‘나고 죽음은 무명 때문에 있으므로 무명이 사라지면 나고 죽음이 사라진다’고 거슬러 읽으면 환멸연기의 교설이 되는 것입니다.
즉 이것은 현실을 떠난 다른 어떤 곳에서가 아니라 주체-객체로 주어지는 현실경험의 세계(十二處) 속에서 뭇삶들의 실천적 행위(業)에 의해 생사로 표현되어진 삶의 부자유가 나타나고(流乾緣起) 현실경험의 세계속에서 생사가 사라진 자유로운 역사의 장이 구현되어짐(還滅緣起)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에서 십이연기의 각 범주가 있음과 없음을 떠난 중도의 세계이며 그 중도의 세계, 관계성과 과정성을 이루어주는 전체성의 범주를 불성이라 한다고 설명한 바 있습니다.
즉 십이연기는 전체성에서 관계성을 지향하는 언어구조이며 불성은 관계성에서 전체성을 지향하는 언어구조인 것이니 십이연기의 각 법에 독자적인 실체를 인정하려는 자도 십이연기를 떠난 형이상학적 실재에로 나아가려는 자도 올바른 지혜의 눈을 갖지 못한 사람입니다.
또한 주체-객체는 서로 의지하여 이루어지는 주체객체이므로 객체속에 노예적으로 매몰되어버리는 자도 주체속에 영적 실체를 세워 그 안에 몰입하려는 자도 참된 자유를 얻지 못합니다.
십이연기설에 나타난 인간과 세계의 혁명적인 자기전환의 길을 실천하는 자는 오직 주체 객체의 관계를 관계없는 관계, 과정없는 과정으로 되돌려 씀으로써 항상 새롭게 창조적인 관계를 창출해 때는 자인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영가선사는 중도가에서 ‘참된 자유인은 번뇌를 끊지도 않고 따로 참됨을 구하지도 않는다’고 한 것(總學無爲閑道人 不除妄想不求質)이니 역사속의 소외의 원인을 해소하면 소외의 현장이 열반의 현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명(無明) 너머에 명(明)을 설정하고 무아(無我) 밖에 진아(質我)를 설정하여 십이연기의 환멸의 구조를 규명하려는 모든 학문적 시도는 불교의 바른 시각이 아님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나고 죽음이 사라진다는 것을 잘못 해석하여 여래장(如來藏)이라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성품이 있어서 그것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영혼불멸의 실체주의의 잘못에 떨어진 것입니다.
이에 반해 십이연기에 있어서 주체•객체의 대립을 뛰어넘고 나고 죽음을 벗어난다는 것은 모든 있음(有)의 자취와 어떤 형태로든 남아있는 실체주의의 허물을 철저히 타파함(眞空)으로써 그 있음을 절대적 현전의 있음(妙有)으로 다시 살려내는 데 있습니다.
즉 환멸연기의 역사운동은 주체-객체 생성-소멸로 주어지는 역사현실을 자기부정의 심연에서 창조적인 관계로 다시 살려내는 진리운동이므로 주관적인 영적 실체에로의 복귀를 지향하는 선정주의(禪定主義)나 대상적인 부처님을 향해 공허하게 나아가는 정토신앙이나 자신의 권력의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대중을 조작하고 움직이는 민중운동 사회운동 등은 진정한 역사해방의 길이 아닌 것입니다.
불교적인 역사해방의 길 환멸연기 길을 가는자는 항상 겸허하게 자신을 부정해서 새롭게 자산을 긍정해가는 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선정을 닦되 아는 자-알려지는 것으로 주어지는 경험성으로서의 마음(識) 밖에 선험적 의식을 따로 세우지 않음으로써 앎(識)을 앎이 없는 암으로 지양하여(그러므로 어떤 주관주의적인 도피처로 물러섬이 없이) 자아의 해방과 세계의 해방을 동시적으로 통합해가는 것입니다. 또한 언제나 아미타 부처님의 이름을 끝없이 되뇌이되 이름 불려지는 부처님이 부르는 자 내 속에 이미 들어와 있고 부르는 나는 불려지는 자 부처님 속에 이미 들어가 있는 것으로 파악함으로써 저 부처님의 48대원을 오늘 이 땅의 현실속에 실천해가야 할 역사적 당위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고통받는 민중의 삶속에 동참하되 자기의 이기심과 영웅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뭇삶들의 함께 살아남(民生) 더 크게 어우러짐(統一)을 위해서 무아행을 실현하여 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화엄경은 십이연기로 드러나는 현실세간의 대립이 실체가 없는 줄 깨달아 현실을 떠나지 않고 진리의 작용을 일으키며 모든 얽매임에서 벗어나 민중을 위한 자기버림의 행을 쉬임없이 이어가는 보살의 길을 다음같이 설하고 있습니다.

觀諸因緣寶義空 不壞假名和合用
無作無受無思念 諸行如雲偏興起
세간모습 올바로 깨친 보살은
열두가지 인연이 공함 깨달아
현실세간 떠남 없이 어울려 살되
앎과 함의 모든 얽힘 멀리 벗어나
중생 위한 온갖 행을 널리 펼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