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호 보기


동국대 법경(法鏡) 스님

이전 게시물 다음 게시물
호계삼소 - 이철순 1990년 07월 101호
법경스님께서는 30년이 넘게 학문이라는 한 우물파기에 온 힘을 쏟은 분이다. 지금도 그 일에 종사하고 있지만 앞으로도 그 일은 계속될 것이다.
스님을 처음 뵙는 순간 학자로서의 부드럽고 깊은 연륜을 한 눈에 느낄 수 있었던 것은 오랜 세월을 일관된 생각으로 외길을 걸어오신 탓이리라.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을까마는 온종일 책상머리를 하고 책과 씨름하는 공부일 또한 결코 만만한 작업은 아니다. 승려 생활 30년이 넘는 세월 중에서 절반 이상을 프랑스에서 공부했는데도 지금은 언제 그곳에서 지냈던가 싶게 기억에 별로 없다고 하시는 걸 보면 어려웠던 지난날의 공부 고생을 잊어버리고 싶은 마음에서인지도 모른다.
스님께서는 현재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에 재직하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외에는 거의 연구실을 떠나지 않는 교수님이시다.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어떻게 하면 학생들에게 정말 좋은 가르침을 전하는 선생님이 될까를 고심하고 연구하는 게 하루 일과의 전부다.
요즈음 대학의 교수라고 하면 상상외로 바쁘고 연구실에 늘 상주하는 것은 드문 일처럼 안식되어 그 외에 하시는 일이 없을까 하고 여쭈었더니,
“학생들을 교육시키는 것이 주 관심거리죠. 그것으로도 벅찬데 다른 일은 나에게 주어지지도 않겠지만 능력이 없어서 못해요”하며 겸손해 하신다. 앞으로도 계속 스님의 말씀처럼 다른 일은 주어지지 말고 오직 연구와 후학들을 가르치는 일에만 주력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스님께서는 꿈많은 청년시절부터 철학적 사고에 짖어 있을 때가 많았다고 하셨다. 그래서인지 종교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은 출가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승려가 되기 전부터 종교에 관계되는 일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어요. 종교행사가 있으면 빼지지 않고 참석하곤 했지요. 그러다가 절 근처에서 한 두 해를 보내게 되었는데 그때 큰 큰스님이 계신다고 해서 찾아갔어요.”
이십 대 초입에 그렇게 해서 인연이 맺어진 분이 바로 은사인 손경산(孫京山)스님이시다.
“스님께서는 선객(禪客)이셔서 행(行)이 아주 좋으셨어요. 일상 생활 속에서 모범을 보이셔서 스스로 본받게 하셨지요.”
벌써 10년 전에 입적하신 은사스님을 회고하면서 그분을 처음 만났을 때도 종교에 대한 본질적인 문제를 토론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잠시 옛날을 회상하셨다. 은사스님이 특별히 정해놓은 본사가 없어서 스님을 따라 경상도, 강원도 등지를 다니면서 시봉하기도 하고, 한 때는 토굴에서 혼자 생식을 하면서 정진한 적도 있다고 말씀하시면서 벌써 오래된 일이라고 웃으신다.
그러다가 스님께서 학교에 가시게된 것은 은사이신 경산스님께서 동국대 이사장을 역임한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스님께서는 종비생으로 동국대 인도철학과 2회 졸업생이다. 당시 종단에서는 청회작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되어갈 즈음, 도제양성의 필요성에 따라 승려교육에 적잖은 투자를 시작하였다. 종단의 재정적인 뒷받침은 학문에 뜻을 둔 승려들에게는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주었으며, 법경스님께서도 그 케이스에 속한다.
학부를 졸업하고 전공과목이 대학원에 신설되어 있지 않아 불교학과 석사과정에 입학하면서 평생 잊을 수 없는 도반인 같은 종비생이었던 윤호진 스님과 프랑스 사람으로 당시 정교회 신부(안동 교구) 였던 여동찬(현재 외국어대 교수)씨 세 사람은 깊은 인연으로 만나게 된다.
여동찬씨는 신부의 입장에서 비교종교학적 차원에서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서 석사과정에 들어온 것이다. 대학원 2년 동안 세 사람은 누구보다도 많은 종교토론과 학문의 깊이를 넓혔다고 한다.
“학부 때부터 호전스님과는 백상원에서 밤을 새우며 불교의 전반적인 문제점에 대해 토론하곤 했어요. 우리 절집도 자급자족하며 수행정진하는 승단 조직을 세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기독교에서 하는 가나안농군학교에도 여러번 갔었어요.”
그 생각의 연장선 상에서 여동찬씨가 소개한 곳이 프랑스의 수도원이었다.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카톨릭의 성직자들은 어떻게 공부하고 수행하는지 알아보고, 우리 불교계에도 새로운 승려상의 재정립이 필요함을 느껴 프랑스로 떠난 것이 1972년 이른 봄의 일이다.
“프랑스에는 자급자족하는 여러 수도원이 있는데 그 중에서도 베네덕트 계통의 수도원이 가장 전통적이고 오랜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 현대적인 시설을 갖추고 있어서 우리의 승단 조직과 잘 맞을 거라고 하여 여동찬씨가 소개한 곳이‘삐에르 끼비’ 수도원이었어요. 그곳 수도원은 매우 엄격한 규율과 통제 속에서 외부와 단절된 성역이었어요. 그 전 같았으면 타종교인들이 수도원 담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어요. 그런데 당시 유럽에서는 종교인들끼리의 대화운동을 펼치고 있었고, 로마 교황청에서도 적극 권장하는 칙령이 내려져 매우 개방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수도원 생활을 할 수 있었어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고 했던가. 흔히 말하는 발원의 염이 깊으면 부처님의 가피가 따른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국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딸린 것이 아닐까. 기회라는 것도 같은 의미로 해석해야 옳을 것이다. 스님은 호진스님과 함께 주어진 기회에 감사하며 2년간을 그곳
수도원에서 수도사들과 똑같이 생활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고 한다.
“수도원은 수도사에 의해 처음부터 끝까지 자급자족하는 생활이었어요. 자체적으로 발전소를 세우고, 농장을 경영하는가 하면 인쇄소까지 운영하는 매우 잘 짜여진 거대한 조직체였어요. 하루 일과의 대부분은 우려의 참선과 유사한 기도생활로 일관되어 있으며, 나머지는 시간표에 따라 학업과 공부, 토론시간 등으로 보냈어요. 자기가 맡은 분야에는 거의 전문적인 기술을 갖고 10년 이상 그 일만을 수행하고 있었어요. 또 비교종교의 연구로서 불교나 동양사상에 대해 공부하고 있었는데 서구에서는 최초로 원전이 번역된 법화경을 텍스트로 하여 읽고 토론하는데 같이 참여하기도 했어요. 특히 인상에 남았던 것은 수도원 내의 인쇄소에서는 자체 출판은 물론이고 유럽 전 지역에서 주문을 받아 제작하는데 그 숫자가 참으로 방대했어요. 거기에서 남는 이익금은 후진국에 성금을 보낼 만큼 큰 규모와 완벽한 인쇄기술에 놀랐어요.”
수도원 생활이 몸에 익숙해질 무렵, 스님은 이왕 이렇게 멀리까지 왔으니 이곳 사람들은 어떻게 공부하는지 방법론도 배우고 자료도 모아야겠다는 욕심에서 학교에 갈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역 만리 타국, 그것도 코 큰 서양인들 틈에서 프랑스 정부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아가면서 공부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도 국립 소르본느대학에서 말이다.
“무엇보다도 그곳 대학의 도서관은 잘 정돈된 하나의 거대한 지식창고 같았어요. 처음 1년 동안은 불교부분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여 노트하는 일로 거의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어요.
불교에 대해서는 생각보다 훨씬 연구가 많이 진행되어 있었고, 한국에서 그때까지 공부했던 것이 그곳에 가보니 포든 게 새로워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공부했어요.
유럽에서는 불교연구에 있어서 첫출발을 잘 했다고 봐요. 그들은 원시불교부터 산스크리트어나 빨리어로 된 원전을 텍스트로 삼아 번역하고 연구했기 때문에 학문적 기반이 대단히 탄탄했어요.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석학들이 경전을 번역하는 작업에 참여하고 있었고, 그들의 학문적 수준이 아주 높았어요.”
공부하는 어려움은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겠기에 스님은 외국생활의 어려움을 음식물과 주거문제로 꼽는다. 학비조달을 위해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도 많이 했으며 가끔 몸이 아플 때 고향 생각이 나곤 했는데 고달플 때 고향생각 나는 건 당연하지 않느냐며 천진하게 웃으신다.
스님은 1987년도에 소르본느대학에서 비교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그 해 10월에 16년 동안의 프랑스 생활을 마치고 귀국하여 1988년 봄부터 동국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3년 째 접어드는 한국생활이 아직도 낯설기만 하다고 하시며 부끄러워하시는 모습이 어린아이처럼 해맑기만 하다. 이야기를 돌려 현재 불교계가 안고 있는 승려교육의 문제점을 짚어 달라는 질문에,
“한국 불교계는 오랫동안 교육문제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지만 다른 분야에 비해 훨씬 못미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교육에 대한 장기적인 투자는 불교 전반에 대한 질을 높일 뿐만 아니라 포교적 차원에서도 보다 광범위하고 세분화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거예요. 또 그런 방향으로 교육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제 승려들도 여러 분야에서 전문화된 인력이 필요함은 이 시대가 요구하는 바이기도 하다. 음악, 미술, 문학 분야에서 포교하는 승려가 있듯이 승려의사, 간호사가 없으라는 법도 없다. 이제 불교계도 각 분야에서 꼭 필요한 전문화된 인재양성이 시급한 실정에 놓여있음을 공감했다. 그동안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느끼는 점도 같은 맥락에서 말씀하신다.
“가르치는 일이 아직 얼마되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학생들의 어학실력이나 학습의욕은 그 전에 비해 상당히 향상된 것 같애요. 그런데 구체적인 문제의식이 결여되어 있어요. 특히 내가 맡은 과목이 불교철학이기 때문에 그런 문제제기가 학습의 바탕에 깔려있지 않으면 무미건조하고 재미없는 학문이 되고 말지요. 학생들의 교육에 있어서도 좀더 전문화되고 세분화될 필요가 있어요.”

스님께서는 시간이 나면 그저 걷는 것이 좋아 가끔 산에 오르는 게 유일한 취미라고 하신다. 처음에는 천안 각원사에서 다녔는데 시간을 많이 빼앗겨 최근에는 과천 쪽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하시며, 2∼3년 걸쳐 불어로 된 『인도불교사』를 한권 번역할 계획도 세워놓고 계시다.
책상에 가지런히 얹혀있는 책들을 보며 저 속에 숨어있는 지식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이 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정열을 쏟아부어야할까를 생각하며 바쁜 시간에도 인터뷰에 응해주신 스님께 감사드리며 비내리는 교정을 걸어 나왔다.

〈글·이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