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건 왕조의 몰락이 서서히 드러나던 조선조 말기 경기도 광주 땅에 새로운 학풍이 일고 있었다. 십팔세기 중엽 권철신을 중심으로 한 남인계 소장학자들은 이익의 서학 열을 이어받아 한역으로 된 서구 사상서를 탐독하였다. 이들은 지금의 광주군 퇴촌면 우산리 앵자봉 기슭의 아담한 사찰을 강학의 장소로 사용하였다. 그 사찰은 천진암 이었다.
조선 왕조가 해체기에 들면서 왕조의 통치이념이었던 성리학은 그 근간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피지배계급인 문중은 스스로 크고 작은 저항과 봉기로 지배 질서에 거부했으며 지배계급의 일부도 사장적 이반을 나타내었다. 특히 사상적 이반은 사신등으로 북경을 다녀오는 사람들을 통해 서양의 문화가 이입되면서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였다. 이들이 북경을 통해 들여 온 서학서의 종류가 대략 일백이십여 종이나 되었다. 중세의 암흑기를 벗어나 문명의 부흥을 일으켜고 있던 서양의 학문서는 성리학에 식상해 있던 지식인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
천진암에 모여 강학을 하던 인물들은 권철신 형제를 비롯하여 이벽과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 그리고 김원성 등이었다. 이들은 학문으로서 서학을 탐구하다가 차츰 천주교사상으로 경사되었다. 그런 까닭에 천진암은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로 천주교인들이 빼지 않고 참배 하는 순례처가 되었다.
이들이 하필 천진암을 강학 장소로 선택하고 여기서 천주교를 신봉하게 됐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이들은 한결같이 당시 왕조의 지배계급에 속한 사람들로서 부유했으며 아울러 앵자봉이 위치한 광주 땅에는 18세기 초 중엽의 석학으로 서학에 밝았던 실학자 이익이 살았던 고장으로서 그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볼수 있다. 특히 이벽은 외교사절로 북경을 자주 드나들던 홍대용이 부친과 친해 그가 북경에서 가져온 서학 관련 서적들을 어려서부터 탐독했다. 정약용의 맏형인 약현과 처남매부지간인 이벽은 천진암 강학회에서 천주교 교리 연구를 제의해 조선에서 처음으로 천주교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가 시작됐다.
천진암의 창건 연대와 창건주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상당히 오랜 고찰이었으며 정악용등이 이 곳에 모여 서학을 공부하고 천주 교리를 연구하던 시기에는 퇴락하고 있었다 고한다. 「여유당전서」에는 당시의 천진암과 관련한 시문이 여러 편 있는데 천진암의 퇴락상을 묘사하고 있다.
당시에 천진암은 주변 양반 집안에서 곡식 등을 받아 절살림을 운명하고 있었으며 양반의 자제들은 이 곳에서 과거 공부도 하고 때로는 토론회도 가졌다고 한다. 승려의 도성 출입이 금지되어 있던 사회 현실에서 진보적인 인사들이 사찰을 주요 공간으로 새로운 사상을 공부하였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중창을 히지 못한 채 오랜 세월을 이어왔던 도량이 마침내 폐사가 된 계기도 그러한 점에 있었다. 왕조의 지배계급은 통치 이념인 성리학이 민중과 일부 지식인에 의해 심각한 위협을 받자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했다. 민중사이에 불교와 유교의 진보적인 이념을 흡수한 새로운 종교가 불길처럼 퍼져 평등과 자유를 부추겼고 게다가 천주를 받드는 서구 종교가 유입되어 지식인 일부가 이반을 보이고 있었으므로 왕조는 더 이상 방관할 수 없게 됐다.
마침 1785년 지금의 명동성당 자리인 김범우의 집에서 천주교 집회를 갖다가 적발되는 사건이 터졌다. 이 사건은 그 동안 적당한 구실을 찾지 못하던 지배층에게 좋은 계기로 작용했다. 이후 조정은 왕조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반대파를 척결하는 명분으로 천주교 탄압을 적절하게 이용하였다. 18세기 후반 로마 교황청은 아시아 지역의 선교에 최대 장애가 되고 있던 제사 문제에 대해 ‘천주교도의 조상 제사를 금한다.’ 는 교시를 내렸다. 유교적 관습을 철저하게 관철하던 왕조는 조상을 파멸하는 천주교의 탄압에 이 점을 앞 세웠다. 1785년의 을사주초에 이어 1801년 신유사옥 때에는 천진암을 거점으로 공부하던 정약종, 이승훈, 권철신 등이 참수형을 당하거나 옥사하였다.
정약용은 17살 때 천진암 모임에 나가기 시작하여 22살 때 영세를 받았으나 을사주초 때 자신은 천주교 신자가 아니라고 자술하여 변을 면했다가 신유사옥 때 다시 연루돼 강진으로 유배를 떠났다. 그 뒤 18년 만에 자신의 고향인 경기도 남양주군 능내리 생가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1836년 조선에 와있던 중국인 신부 유방제에게 종부성사를 받고 75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천주교도들이 참수형을 당하던 장소는 남한산성 동문안에 있었다. 천진암에서 그리 멀지 않은 이 곳에 당시 천주교도들에게 모임 장소를 제공하였던 천진암 스님도 함께 처형됐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벽을 비롯하여 처형됐던 사람들의 기록은 정확하게 남아 있는 데 반하여 불교인 기록은 그렇지 않다. 기록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당시 지배층의 유수한 집안을 배경으로 갖고 있기에 가능 했을 것이다. 갑오동학혁명 당시의 지도부에 상당수가 천민출신이었으나 이들의 이름은 역사에 기록되지 않았던 사례와 비슷한 경우처럼 천주교도를 숨겨 주었다가 함께 처형됐던 스님이나 여타의 사림들은 기록에 남지 않았다.
세월은 흘러 1990년 6월에 그동안 역사의 저면에 묻혔던 천진암의 비애가 불교계에서 다시 제기된 바 있다.
90년 6월 대한불교청년회(당시 회장 배영진)는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에게 서신을 보내 “천진암 터가 과연 천주교만의 성지가 될 수 있는지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며 1979년부터 경기도 광주군 퇴촌면 일대에 천진암 성역화 사업을 벌이면서 주변 사찰은 물론 주민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행위를 “참다운 종교화합”을 위해 중지해 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였다.
천주교 수원교구가 관장하여 ‘한국판 베드로 대성당’ 이라 불리는 성지 조성 작업을 지난 1979년부터 시작하여 2079년에 완공할 목표로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한번에 3만 명이 앉아 예배를 볼 수 있고 제단만도 55개를 헤아리며, 종탑이 높이가 150미터나 되는, 한마디로 어마어마한 대성당을 백년 목표로 짓고 있는 것이다.
전세계에 천주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외국인 신부가 아닌 자국민이 스스로 학습을 통해 천주교를 받아 들인 나라는 유일하게 한국뿐이라는 것을 천주교측에서는 강조하고 있다. 1962년 남상철에 의해 천진암사지가 확인 된 뒤 천주교 수원교구에 있던 변기영(현재 천진암성지 주임 신부) 신부의 노력 끝에 천주교단이 승인한 사업으로 백년공사가 시작됐다.
79년부터 천진암 주변의 땅을 매입하여 현재는 3만여 평의 인공분지를 만들었다.이 과정에서 천진암 터 인근에 있던 사찰이 천주교측의 등살에 못이겨 절을 팔고 떠나야 했다.
원래 천진암이 사지만 남기고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진 지 150여 년이 흐른 뒤 천진암에서 가까운 곳에 한 비구니스님이 옛 천진암의 뒤를 이를 사찰을 지었다. 임엽 스님인 이 비구니스님은 67년에 천진암의 복원을 꿈꾸고 아늑한 앵자산 기슭에 사찰의 이름을 영통사로 짓고 도량의 터를 닦았다. 그러던 중 변기영 신부가 한국 천주교 발상지를 성지로 만들겠다고 이 곳에 찾아들면서 상황은 급전했다.
백년공사를 목표로 대성전을 짓는 공사를 하면서 인근의 산을 절단했고 영통사를 드나드는 길조차 막아버렸다. 10여 년 동안1천 세대를 천주교단이 넘던 신도가 3백 세대로 급격하게 줄어들었으며 성지라고 순례하는 천주교 신도들의 횡포를 노비구니 스님 혼자 감당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처음엔 같은 종교인이니까 그래도 경우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천진암 성지 건립에 영통사가 눈엣가시처럼 느껴진 탓인지 천주교측은 우리 절을 괴롭히기 시작했지요. 싸우기도 많이 싸웠고 때론 너무너무 화가나 욕설까지 했지요.”
이렇게 비애를 털어 놓는 임엽스님은 “죽을 때까지 천진암 영통사를 지키려고 했어요. 천진암 절이 어떻게 망가졌는데.... 천주교인들 숨겨주다가 절이 망한 게 아녜요. 배은망덕하기가 유만부동이지...” 하며 울분을 삭였다. 적어도 은혜를 원수로 갚지는 말아야 한다는 따끔한 지적이다.
그 뒤 스님은 어쩔 수 없이 천주교 측에 절터를 팔아야 했으며 약 3억 원의 땅값으로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으로 절을 옮겼다.
천주교 성지 건립을 위해 자연이 망가지고 사찰만 부서진 것이 아니다. 원래 천진암이 있던 곳에서 산을 끼고 내려오면 조선 왕조의 유명한 관요가 있었다. 궁중에서 쓰는 각종의 자기 그릇을 만들어 납품하는 중요한 유적지였다.
92년 9월 8일자 한겨레신문은 `성당 짓다 사적지 매몰’ 이라는 제목의 사회 기사를 실은적이 있다. 이 기사에 의하면 천진암 성지를 건립하면서 조선백자 도요지(사적 314호)를 흙으로 덮어 말썽을 빚고 있다는 것이다. 89년 10월 대성당터 닦기 공사중 문화재관리국이 사적지로 지정한 조선백자 도요지를 매몰했는데 이 공사를 관장하고 있는 수원교구는 89년 10월부터 91년 5월까지 대성당터 일부를 미8군 헬기장으로 쓰는 조건으로 터 닦기 공사를 의뢰해 미8군 공병단이 공사를 하면서 도요지를 10~12미터 깊이로 덮어버린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문화계에서는 광주군 일대 도요지가 조선 초기 백자를 굽던 가마 터가 곳곳에 흩어져 있어 보존과 발굴의 필요성이 높은 데도 수원교구가 무리한 공사를 강행해 사적지를 훼손했다고 반발하였다.
이에 대해 경기도와 광주군은 “그 동안 문화재관리국이 수원교구에 대해 원상회복 지시를 수차례 해왔고 수원교구가 이를 받아들여 발굴조사 비용을 내기로 했다.”고 말했으며 “앞으로 문화재관리국의 승인을 받은 뒤 용역을 주어 발굴할 예정”이라고 덧불였다. 이 문제는 급기야 93년 정기국회에서도 다루어졌다. 국회에 답변한 문화체육부의 자료에 따르면 `천진암 성역화사업’과 관련하여 사적지정 해제 요청 등 민원이 야기된 바 있던 사적 제314호 광주 조선백자 도요지에 대하여는 이미 관계 전문가의 현지 조사 및 발굴조사 결과 (해강도자미술관:93.4. 6~4. 21) 조선 초기의 상감백자를 제작하던 중요 요지임이 입증되었으므로 보존이 필요하다는 발굴조사단의 의견 및 문화재위원회의 심의(93. 5. 20→93. 6. 18) 결과에 따라 사적지정 해제의 타당성이 없었으므로 사적지임을 알릴 수 있는 표석 및 안내판을 설치하도록 하였고, 사적지 보존에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는 공사를 하고자 할 때에는 문화재보호법 제20조에 의한 현상변경 허가를 받도록 경기도와 천진암 측에 통보(93. 7. 2)한 바 있습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올해 11월 초에 현지를 답사한 결과 천진암에는 그런 표지도 없었으며 광주군 공보과의 한 직원은 아예 그런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으며 그저 “예전에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고 하는데 해강도요에서 조사하고 발굴하여 하등 문제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답변만을 들었다.
솔직히 표현하건대 이 글을 쓰면서 옛 천진암이 자리잡고 있던 곳에 한국천주교의 성인 다섯 사람의 묘가 대신하고 있는 현장을 불교인들이 직접 보기를 강력히 권유하고 싶다. 백문이 불여일견이기 때문이다.
광주시내에서 천진암으로 가는 길은 외길이다. 승용차로 10여 분을 달려가면 길이 끝나는 곳이 천진암이다. 활엽수와 침엽수가 잘 어우러진 산을 돌아 계곡을 끼고 가다보면 빼어난 경관에 감탄하게 된다. 그런 경관은 앵자산 산동성이부터 벌거벗은 채 깎인 성당터를 보면서 아득한 심경으로 바뀐다. 멀리서도 성지를 알수 있게 20미터의 대형 십자가를 세워 놓았고 터 입구부터 산에서 끌어내린 암석의 더미는 얼마나 큰 규모로 장비를 투입하고 있는지 짐작하게 된다. 말썽 많은 골프장은 비교조차 할 수 없다.
길은 거기서 끝난다. 성지를 더 이상 지나갈 수 없다는 배려였을까. 예전에도 길이 천진암에서 끝났다면 그 땅은 천상 은둔처가 되기에 십상이었다. 절 아랫마을에는 도자기를 굽는 가마가 있고 뒤에는 야트막하면서도 숲이 우거진 산이 었다는 지리적 이점은 은둔자들이 모여 살기에 적당했을 것이다. 또한 절에서는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고 누구든 찾아들어 고단한 삶을 쉬도록 했으니 금상첨화라고나 할까. 그런 입지 조건과 자비의 정신은 마침내 왕조의 칼 아래 쓰러지고 절은 폐허가 된 채 무상한 세월을 감당해야 했다. 한술더 떠 세월은 폐사지 위에 이교도의 무덤과 상징물이 세워지고 있으니 참으로 비정 하기만 하다.
천진암을 성지로 승화시키고 나아가 세계 천주교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작업에는 앞서 변기영 신부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그는 서양인 성인들이 절대다수인 천주교회 안에 한국인 선조들을 세계교회의 성인으로 추대하는 성과를 올렸다. 거의 그런 일을 천주교인들은 `기적’ 이라고 한다. 2천년 세계 천주교사의 전통을 깨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성인으로 추대하는 행사에는 로마 교황이 방한했다. 85년의 일이다. 교황의 방한이 공교롭게 부처님 오신 날에 즈음하여 이루어져 의도적인 행사라는 지적도 있었다. 하긴 부처님의 도량 위에 세워지는 천주교의 성지와 맞물린 일이었고 게다가 그곳에 모신 사람들을 공식적으로 `성인’으로 추앙히는 행사를 위한 방한 이었으니 단순한 `피해의식’의 발로는 아닐 것이다.
변신부는 자신을 `민족주의자’로 자부한다. 국가와 신앙보다도 신앙과 민족에 더 주의를 기울이며 정치는 바뀌고 시장은 변해도 민족은 영원하다는 굳건한 신념을 갖고 있다고 한다. 특히 작은 민족이 크게 발전하고 살아 남으려면 경건한 신앙 정신의 토착화가 매우 중요하다는 확신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과연 시적지를 훼손하고 민족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불교는 안중에도 없는 이가 `민족’ 을 우선시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아무튼 천주교단 안에서 변신부의 업적은 감히 허물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거의 개인의 노력으로 한국천주교의 위상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단계에 이르렀고 천주교의 발상지에 성지를 건립하고 있으니 그럴만한 일이다.
천진임을 보면서 우리 한국불교계의 존립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물론 천진암만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폐사가 허다하다. 천진암처럼 창건사가 명확하지 않고 창건 이후의 기록도 부실한 절 수준을 넘어 기록과 사지가 명확한 도량도 황폐한 채 잡초 속에 숨겨진 절도 숱하다. 하지만 적어도 폐사지가 확인된 사찰은 언젠가 우리 손으로 복원할 수 있다. 반면 천진암은 이제 그 절 터가 ‘한국천주교성인 다섯 사람’의 무덤 밑에 있어 그 복원은 영원히 불가능할 지 모른다. 그 절터 어딘가에 남아 있을 소중한 유물은 찾을 길 없다. 완전히 사라진 천진암, 그리고 그 절에 얽혔을 사람과 역사 이야기.
천진암으로부터 배우는 교훈 가운데 하나는 결국 사람에 관한 것이다.
우리 종단은 오래 전부터 `인재양성’을 부르짖어 왔다. 벌써 반세기를 이어 온 종단의 주요정책이다. 사실 적잖은 투자와 정책적인 배려로 ‘인재’를 키우고자 했다. 워낙 현대불교사가 외우내환으로 시달렸던 것에 비하면 인재양성의 성과가 적다고 할 수 없다. 조계종만이 아니라 여타 종단이 세운 학교의 수가 날로 줄고 있다는 점만 보더라도 인재양성을 위한 각고의 노력을 절대 평가하여서는 안 되겠다. 하지만 엄격하게 비판하여 과연 우리가 인재양성에 정말 자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 양성은 고사하고 종단에 의지하기보다 스스로 도시의 구석에서 전법의 도량을 펴는 인재조차 제대로 지원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어떤 경우에는 이 집안 일에 자신의 전문성을 살리겠다고 찾아드는 불제자 조차 내쫓은 적도 있다.
천주교단이 한 신부에 대해 전폭적인 지지로 소신있는 일을 할 수 있게 만든 조치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타종교가 다음 세기를 대비한 투자와 교육을 하고 있는 침에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철저하게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이미 한국사회의 각 분야는 다음 세기를 대비한 인재양성의 전쟁에 들어섰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 기업은 기업대로, 학교는 학교대로 적자생존의 운명을 건 인재양성을 위해 파격적인 조치를 취하고 있다. 종교도 예외는 아니다. 교단의 예산에서 차지하는 해외연수나 국제적 연대활동의 비중이 전에 없이 커졌고 해외의 인재를 현지 첨병으로 활용하고 있다.
‘종교도 상품처럼 고품질의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는 자본주의적 요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반드시 옳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전통적인 포교의 방식이나 태도로는 대중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할 수 없다. 컴퓨터의 발달과 더불은 시대에 전문적인 인재의 수용을 태만히 한다면 그 결과는 자명한 것이다. 인재를 양성함과 동시에 인재의 수용 또한 소홀히 하지 말아야한다. 천진암을 천주교성지로 못박고 대공사를 진행하고 있는 현실에서 다시 그 곳에 절을 세우기란 불가능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속수무책으로 있는 태도도 바람직하지 못하다. 최소한 성지 건립사에 천진암의 진실이 기록되어 한국 천주교가 입은 불교의 은혜를 대중에게 알려야 한다. 그런 작업은 천주교의 양식에 달린 것이기도 하거니와 우리의 노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에 해를 넘기며 모두의 각성을 촉구한다. 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