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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은 민족정서의 기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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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인리포트 - 편집실 1994년 01월 143호
애환이 배인 쌀
눈이 먼 아버지의 고통을 덜어 주고자 공양미 삼백 석에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친 심청 이의 효심이나 굶주린 자식들을 위해 형수에게 밥주걱으로 낯짝을 맞고도 오히려 한 대 더 때려 달라고 통사정하는 흥부의 처절함은 바로 가난한 백성의 애환을 상징한다. 심청전의 쌀은 부모에 대한 효성의 상징으로, 흥부전의 밥은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난다. 그렇다. 우리네 조상들은 쌀과 밥이 인간 관계의 끈을 이어 주는 상징물 이였다. 형과 아우가 달밤에 서로 볏가리를 주고받는 옛 이야기는 동기간의 끈을 중시하라는 교훈이며 홍길동이 활빈당을 만들어 토호의 양곡 창을 터는 의적 행위는 민중이 생산물의 주인이 되는 생산 관계의 변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이상의 끈이었다. 그래서 온갖 억압과 수탈에도 미련할 만큼 생산의 터전인 논과 밭을 지켰고, 어떤 경우에는 같은 피지배 계급인 ‘마름’의 착취마저 지배 질서인양 순순히 감내하였다.
이런 우직함이 민족의 역사를 대하와 같이 느긋하게 이어지게 하였고, 그 속에서 독특한 문화의 저류를 형성케 하였다. ‘밥이 하늘이다“라는 선언적 명제만큼이나 주식인 쌀을 중심으로 하늘과 땅, 인간과 인간을 잇는 ’어우러짐의 문화‘가 바로 그것이다. 별쭝맞게 툭 불그러지는 문화가 아니라 그저 자연의 한쪽인양, 아니 자연의 구색으로서의 인위적인 조화가 우리 문화의 전통인 것은 다름아니라 ’쌀‘을 기본으로 삼는 산업에서 파생된 삶의 조건에서 비롯된다.
한반도의 기후나 지형 조건에 가장 알맞은 농작물이 쌀이다. 사계절이 뚜렷하고 한여름 장마로 풍부한 수량을 받아, 가두어 놓은 물을 적절히 이용하여 생산하기 좋은 작물은 단연 논농사이며 쌀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로 인한 음식 문화가 형성되었고, 머무는 공간 곧 사는 집 또한 논농사에 맞게 꾸려졌다. 일찍이 치마보다 바지가 널리 입힌 복식문화도 이런 맥락에서 비롯된다. 또한 밥을 먹기 좋도록 갖가지 재료를 이용하여 국과 반찬의 가짓수가 그토록 많게 된 까닭도 마찬가지이다. 흉년이 들면 민심이 흉흉해져 나라가 기초부터 흔들리기를 수없이 겪어 왔다. 그래서 ‘뒤주에서 인심 난다’고까지 하지 않던가.
그렇게 신주단지처럼 대접 답아 오던 쌀이 이제 수난의 시대를 맞고 있다. 바꾸어 말해 우리의 밥 문화가 외국산 쌀에 대한 수입 개방으로 여지없이 망가지게 되었다. 그러잖아도 진작부터 공업화에 밀려 위축되어 온 농업이 이번 우루과이라운드 협상의 타결로 초토화될 운명을 맞게 되었다. 그 협상의 결과, 이론으로만 상정할 때, 십 년 뒤쯤이야 충격이 본격화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지금 당장 농민들이 입을 엄청난 심리적 충격은 곧바로 드러나 대규모의 이농과 탈 농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만일 이 가능성이 그대로 현실로 나타나도록 방치된다면, 단순히 수치로 환산되는 피해보다 민족문화 전체가 받을 타격이 더욱 심각할 것은 명백하다.

농업초토화의 역사
조선조 말까지, 곧 봉건왕조 해체까지의 농업은 사정이야 어쨌든 일국의 내부에서 농업 생산의 잉여를 지배계급이 수탈하고 생산자가 착취당하는 체제였다. 그러다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뒤에는 식민 본국인 일제의 강제 공출에 따른 잉여의 유출이라는 구조 속에 편입되었다. 그렇긴 하지만 생산력의 증대를 토대로 한 잉여의 유출이었으므로 농업이라는 산업의 목을 누를 정도는 아니었다.
해방이 된 뒤, 미군정이 한반도의 남쪽을 지배하면서 농산물의 국외 유출은 줄었다. 다시 말해서 과거처럼 농업의 잉여 생산물이 강제든 임의든 외국으로 공출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이 땅에서 생산된 농산물은 같은 민족에게 쓰여질 수 있었다. 다만 그 수확물을 둘러싼 계급간의 수탈은 그대로이지만, 그러나 ‘해방’이 되면서, 곧 낡은 형태의 식민정책보다 발전된 새로운 형태의 식민정책 - 신 식민주의에 의한 원조정책은 그 이전 구 식민주의에 의해 수탈되던 방식보다 차원 높게 농업을 피폐 화시켰다. 복잡한 논리적인 설명을 생략하고 간단하게 정리하기란 그리 쉽지 않은 ‘자본의 논리’가 작용하는 ‘원조’가 이 땅에 들어오면서 농업은 더 이상 버티기 어렵게 되었다. 미군정 치하에서 막대하게 들여오는 미국의 잉여농산물로 한국 농업은 생산 의욕을 잃게 되었고, 남한의 친미성향 정권이 나름대로 기반을 잡게끔 만들었다. 46년 5월에서 48년 7월까지 이 년 이 개월 동안 미국에서 도입된 밀과 밀가루 그리고 설탕만 해도 칠십 칠만 칠천여 톤에 이르러 저 참혹한 일제시대에도 존재했던 밀농사가 단절되었다. 직접적인 수탈이 아니라 가히 미국식 물량공세인 ‘원조’라는 폭격으로 오랜 세월 끈질기게 이어 온 농산물의 한 부분이 멸종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폭격 당한 밀농사는 거의 반세기 뒤인 최근에 와서야 ‘우리 밀 살리기 운동’으로 되살아날 수 있었으니 참으로 기가 막히다.
어쨌든 과거사를 들추어보아야 이 나라에 대한 혐오만 가중될 뿐이다. 친미주의자에 의한 분단, 그 구조를 위해 마구잡이로 받아들인 원조, 그리고 그 원조 또는 구호물자를 둘러싸고 벌어진 추악한 재벌 형성 따위는 다시 들먹이기가 싫을 정도이며, 그 후손이 오늘도 민중의 머리 위에 군림하고 있어 자괴감만 더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우루과이 협상이 타결되기 전에도 세계 제2위의 미국농산물 수입 국이고, 밀과 옥수수는 99퍼센트, 콩은 86퍼센트, 쇠고기는 65퍼센트를 미국에 개방하고 식량 자급률은 40퍼센트 이하로 떨어져 있는 터에 미국은 그것도 모자라서 농업 소득의 41퍼센트에 달하는 쌀 등 기초식량마저 개방하라 하였고 마침내 그 강요에 못 이겨 95년부터 십 년 동안 국내 소비량의 최소 시장의 물량을 수입하게 돈 이 판국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합의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대안의 모색은 ‘개방불가피론’처럼 패배주의는 아니라는 강변을 달면서.

우리가 할 일
우루과이 협상에 따른 정부의 속셈이 김영삼 대통령의 장담을 백지화하고 한국 농민의 희생으로 매듭짓게 되면서 각계에서는 다양한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정부는 국민을 상대로 ‘목적세’를 신설할 움직임인 반면 야당인 민주당에서는 국민투표에 붙여 여론을 검증하자는 주장을 펴고 있다. 한편, 전문가로 자부하는 교수나 학자 층에서는 구조 조정을 통해 생산비를 낮추고 생산성을 높여 국제경쟁력을 강화하자고 한다. 구체적으로 개인 또는 법인이 소유하는 농지의 규모를 대폭 늘리자는 정책을 제시하고 있다. 곧 현재 소농체제의 경지 면적을 대단위 - 미국식을 본보기로 삼아 - 로 하여 기계화와 전업농지화하자는 것이다. 언뜻 그럴듯한 제안이지만 무척 위험한 발상이다. 시민운동 조직에서도 이런 제안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형상 다랑이 논이 많고 기껏 기름진 고래실 논이라 하여도 일정한 구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판에 자칫 농지상한제도의 철폐나 농지소유자격의 제한 완화는 오히려 공업자본가의 땅 매점이나 유한 계급의 땅 투기를 초래할 수 있다. 즉 당장은 농업의 명분을 띠고 농지를 구입할 지 모르지만 장래 농업의 비교우위성을 구심 삼아 공장부지나 주택용지로 용도 변경하리라는 예상은, 독점자본의 생리상 어렵지 않은 것이다. 더욱이 소수가 대단위의 농지를 소유할 경우 농민은 어쩔 수 없이 도시의 유민으로 전락되어 실업자, 또는 유휴노동력이 되므로 결국 저임금의 구조만을 악화시킨다. 따라서 한국농업을 지키고, 민족의 생존을 방호하려는 최선의 선택은 ‘수익자부담의 원칙’에 따라 우루과이 협상에 수혜자인 독점자본가에게 ‘수출과 수입에 따른 특별세’를 부과하는 것이다. 이번 우루과이 협상 결과 한국의 철강과 자동차 그리고 전자제품의 수출에 청신호가 켜졌고 다른 업종과 석유화학, 정밀화학도 높은 신장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쌀을 비롯한 열 다섯 개 기초 농산물의 수입개방으로 한국 농업이 초토화되는 반대급부는 독점재벌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이 세금을 부담하기 이전에 재벌이 벌어들이는 수익에 대해 중과세를 하여야 마땅하다.
우리 불교계는 민족문화의 보루가 되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갖고 있으며 실제로 지금껏 왜곡되고 사장되는 전통문화가 그 가운데에 원형대로 간직되고 있다. 따라서 기초 농산물의 수입개방으로 망가지게 될 우리의 먹거리 문화를 지켜 내는 파수꾼으로 나서야 한다. 가장 현실적인 대안으로서 우리 농산물만을 사용하는 ‘계약재배’를 실천하자.
심청 이가 부처님 전에 삼 백 석의 공양미를 올려 눈 먼 아버지에게 빛을 찾게 하였듯이 한국 불교계가 농업 살리기 운동에 적극 앞장서 민족에게 빛을 나누도록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