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희와 천도교의 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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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유종교 산책 - 황선명
1995년 12월 166호
패랭이(平凉子) 쓰고 물미장勿尾杖 짚은 등짐장수-지난 시대의 보부상의 행색을 일컽는 말이다. 또한 근세사 에서 백범 김구에 견주어 전혀 뒤질 바 없는 위대한 발자취를 남기고간 의암義魔 손병희孫秉熙의 젊은날의 모습 이기도 하다. 손병희의 발자취는 단순히 천도교를 창건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는다. 근래에 와서 그의 행적에 대해 이러저러한 논란이 없지는 않으나, 의암은 독립운동가로서의 역할 뿐만이 아니라 교육사업가로서 또 계몽기의 문화사업의 후원자로서도 선구적인 업적을 남긴 존재이다. 어린이의 영원한 벗인 소파 방정환이 그의 사위라는 사실 말고도 의임이 소파를 시켜서 창간한 종합잡지 「개벽開闢」은 우리나라의 민간이 주도하는 신문화운동의 효시이자 기수였음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이러한 배경은 일제 치하에서의 천도교 교단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에도 큰도움이 된다. 다시 말해서, 당시의 천도교는 요즈음의 종교 단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개인이나 가족의 성공이나 빌고 그저 안심입명의 위안이나 내세의 극락왕생을 염불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애국 계몽 단체였던 것이다. 그러니 일제가 눈엣가시처럼 여긴 것은 당연한 노릇이다.
그런데 도대체 그 무렵 사회의 밑바닥 신분이던 보부상 출신에게서 어떻게 민족의 백년대계를 내다보는 이토록
웅대한 혜안이 우러 나왔을까 하는 의문아 생기계 된다. 더군다나 그때의 보부상 패거리는 성격상 지독한 수구 반동으로서 썩어빠진 세도정치 세력과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서 동족을 괴롭히는 일을 서슴지 않던 무리들 이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갑오 동학 농민전쟁 당시 경군京軍과 왜군에 맞서 동학 농민군이 결사적으로 항쟁한 우금치 전투때에는 충청우도 저산 팔구(苧産八區, 모시행상) 소속의 보부상 패거리들이 동족을 학살하는 데 맹활약(?)을 하기도 했었다. 그보다 몇 년 뒤 서울에서 열린 만민공동회 때에는 보부상들이 달려들어 훼방꾼 노릇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비록 보부상 출신이기는 했어도 의암에게는 출신지역의 특수한 성격 때문에 남다른 배일사상과 독립정신이 깊이 배어 있었다고 보인다. 다름이 아니라 그가 태어난 충청북도 청원은 단재 신채호를 배출한 미원 땅과 지척이다. 그런가 하면 유관순이 3.1운동때 만세를 부른 아오내장터와도 멀지 않다. 또 만해 한용운이 태어난 홍성이나 윤봉길의 예산과도 가깝다. 그리고 예산에서 조금 내려가면 김좌진을 배출한 보령 땅이 나온다. 결국 의암이 태어난 청원에서부터 걸어서 하루에 다다를 수가 있는 거리 안팎의 땅에서 항일 애국지사가 대부분 배출 되었다는 사실을 그저 우연으로만 치부하고 말일이 아니다.
본디 의암은 가난한 농가의 서자 출신이었다. 송곳 꽂을 만한 땅뙈기 하나. 없는데 호구지책은 마련해야겠고,
그러자니 손쉬운 등짐장수의 보부상에 가담한 것이다. 당시의 청원으로 말하자면 보은을 거쳐서 화령재만 넘으면
영남 상주의 넓은 들로 통하는 길목이었다. 그러다가 의암이 동학에 입교한 것은 그이 손위 강맨 손천민의 권유
때문이었다고 한다. 손천민은 문정에 능통하여 일찍부터 해월 최시형의 신임이 두터웠다. 여러 가지 공문서가 모
두 그의 손을 거쳐서 작성된 까닭이다. 그런 그가 서삼촌應三寸인 병희에게 동학에서는 적서織庶의 차별이 없으니 입문해서 적극적으로 활동해 보라고 권유했음에 틀림없다. 하여튼 손병희는 동학에 입문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송암松幕 손천민, 구암龜養 김연국과 더불어 삼암三養의 하나인 의암義魔으로 지목되었으니, 처음부터 두각을
나타냈다고 볼수 가 있다.
이 삼암이 모두 북접北接이라는 사실은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다. 북접측은, 갑오 동학 농민전쟁 당시 농민 봉기와 결전을 주장한 전봉준이나 김개남의 남접측과 맞서, 항일 반봉건의 투쟁보다는 종교 본연의 포교활동에 전념 하자는 미적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게다가 갑오 농민전쟁의 패배 뒤에 그 행적이 뚜렷하지 않아서 기회주의자 인듯이 비치기도 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삼암 모두가 우금치 전투에 앞장서서 전투를 진두 지휘하였다. 최시형이
참수형을 당한 뒤에는 삼암 모두 스승을 따라서 순사하자는 의견이 있었다. 그러나 의암이 끝까지 반대했다고
한다. 의암의 주장은 자폭하는 것보다는 후일을 기약하자는 쪽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의 주장이 옳았다.
그러나 송암 손천민 한 사람만은 동학의 문도를 대표해서 스스로 교수형의 길을 택함으로써 스승의 뒤를 이어 순교했다.
삼암의 또 한 사람 김연국은 애초에 스승을 따라서 모두가 순교하자고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그는 동학의 입문이 의암보다 앞선 데다가 나이도 네 살이나 손위여서 선임자격이 이었으나, 지도력에서 의암에 견줄 바가 못 되었다. 그래서 갑오 농민전쟁 뒤로 천도교를 창건하는 1906년까지 의암이 해월의 대를 이어 통령統領 노릇을 했다. 김연국은 천도교 창건 초기에 잠시 대도주가 되기도 했으나 의암과의 불화로 영영 교단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뒤에 ‘상제교’ 라는 이름으로 계룡산 신도안에 거창한 궁궐을 짓고 교주가 되어 마치 천자처럼 군림했는데 일제 때 ‘유사종교’ 니 뭐니 해서 우리의 고유 종교에 대한 사회 인식이 좋지 않을 때 표적이 된 장본인 이기도 했다.
의암이, 일개 교주만으로 군림하지 않고, 독립운동가이자 민족대표로 나서서 만인에게서 추앙받게 된 데에는 그자신의 천부적이고 비범한 능력 못지 않게 후천적인 노력 또한 커다란 밑거름이 되었다고 본다. 1901년에 의암은
이용구와 더불어 세계 정세를 살필 목적으로 일본, 중국 등지를 두루 여행하고 견문을 넓혔는데 이것이 천도교를
창건하는 데 정신적인 초석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한국을 병탐하려는 세력끼리 맞붙은 러일전쟁을 계기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 등화와 같다고 판단한 그는 진보회를 조직했다. 그리하여 본격적으로 무능부패 정권에 치정을 나무라는 압력단체를 이끌게 된다. 동학운동이 본디 창도 당시 부터 보국안민과 광제창생에다가 척왜양창의를 외친 정치 지향의 종교 단체였다는 점에서 동학 재건의 큰 짐을진 의암에게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는 오늘날의 종교가 내세의 극락왕생을 목표로 해서 포교활동을 전개하는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룸에서, 요즈음의 우리는 그나마 태평성대에 살고 있다는 착각마저 하게 된다.
아무튼 동학 창건 당시 의암의 오른팔격이나 다름없던 이용구가 문제였다. 이용구 그는 일본의 주구였다. 러일전쟁이 한창일 때 그는 일진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경선의 군용 철도를 부설하는데 돕기도 하고 두루두루 매국행위에 가담했다. 뒤에 민족대표로 우뚝 서는 의암이 이런 이를 끼고 있었던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겠지만, 1906년에 천도교가 창건한 뒤에 이용구는 의암을 끈질기게도 괴롭히다가 친일 세력만으로 사천교라는 간판을 내걸고 딴살림을 차리게 된다. 천도교로서는 이것이 오히려 전화 위복의 계기가 된 셈이다. 이용구는 현재 서울 종로구 경운동에 있는 천도교 총본부자리와 지척간에 있는 견지동에 시천교 본부의 간판을 내걸고 친일 세력을 배경으로 한동안 활동 했었다.
이용구의 배반으로 의암은 한동안 교단을 이끌어가는 데 재정상 커다란 곤란을 겪었으나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간 성미誠米 운동으로 이를 극복할 수가 있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천도교의 남다른 성격을 이해하자면 그 무렵 우리나라가 처한 특수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곧, 천도교가 단순히 종교적인 영감과 신비한 영계靈界의 문제에만 치중할 수 없었던 사정은 국권이 다른나라의 침력자에 의해 농간당하고 있었다는 현실에서 찾아야 한다. 또 민중으로 하여금 전통사회의 낡은 굴레에서 하루 바삐 벗어나게 해서 신문명의 개화사상에 접목시켜야 하는 계몽운동이 또한 시급했던 것이다. 의암이 내세운 인내천人乃天 사상이나 인심개벽설人心開關說 속에는 분명 그가 종교적인 성지이기보다는 독립운동가로서, 계몽사상가로서, 또 민중을 위한 교육자로서의 면모가 여실하게 드러난다.口